#219화. 손끝이 파르르
테마는 살아 있지만, 전혀 다른 리듬과 색채. 하지만 분명한 모차르트의 곡.
스테파노의 숨이 멎을 것 같은 건 추운 날씨 탓이 아니었다. 그동안 수철에게서 받았던 충격 그 이상의 것이 밀려왔다. 멈춰져 있는 그의 입에서 입김만이 계속 뿜어졌다.
뭐지?
차 안에서 기다리던 로렌조는 스테파노가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함에 뒷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잠시 스테파노를 지켜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자네, 들어가지 않고 거기서 뭐 하는 건가?”
로렌조가 다가오자 스테파노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쉿, 조용히 하고 이리 와 보게.”
로렌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문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스테파노처럼 큰 문의 틈새에 귀를 갖다 댔다. 잠시 후, 로렌조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큰 눈을 더 크게 뜨더니 스테파노와 똑같은 모습으로 얼어 버렸다. 하얘진 얼굴에 호흡이 가빠졌다. 로렌조는 스테파노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철은 마치 이들이 문 앞에 서 있는 걸 알기라고 한 듯이 이번엔 로렌조가 특강에서 연주했던 베토벤의 소나타를 치기 시작했다. 잠시 원곡대로 치다가 순식간에 자기만의 스타일로 변주시켰다.
숨이 멎을 것 같았던 로렌조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헉헉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놀람을 넘어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두 거장의 입에서 두꺼운 입김만 계속 뿜어져 나왔다. 한동안 둘은 그런 자세로 멈춰 있었다. 수철이 건반에서 손을 뗄 때까지.
길가에 세워 둔 차 안의 운전사는 운전대에 몸을 붙인 채 둘의 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정지 화면처럼 문 앞에 귀를 대고 멈춰 있던 둘은 몸을 세웠다.
한동안 이어지던 수철의 피아노가 드디어 멈췄기 때문이다. 둘은 더 이상 피아노 연주가 이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벨을 눌렀다.
삐―
* * *
수철은 옷을 갖춰 입고 스테파노를 기다리며 창밖을 기웃거리다 손가락으로 툭툭 그랜드 피아노의 건반을 건드렸다. 그러다 생각나는 멜로디가 있는지 재미 삼아 피아노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연주해 보다 오늘 특강에서 들었던 멜로디가 떠올랐다. 몇 번 그 멜로디를 쳐 보다가 이렇게 저렇게 마음이 가는 대로 변주를 시켜봤다.
늘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러듯이 그렇게 멜로디를 각양각색으로 변주시키며 잠깐 재미 삼아 연주를 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간 걸 느낀 수철은 연주를 멈추고 시계를 확인했다.
올 때가 지났는데?
잠시 창가를 바라보다 휴대폰을 확인하려는데, 벨 소리가 들렸다.
삐―
코트를 챙겨서 아래로 내려갔다.
* * *
차 안에 공기는 평소 같지 않았다.
스테파노는 애써 웃음 지으며 수철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로렌조는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붉게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는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수철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수철은 그의 시선이 다소 불편했지만, 특강에서 본 모습이 있어서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초대받은 별장에 들어서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마에스트로들이 모두 일어나서 수철을 반겼다.
수철이 인사를 건네자 오늘 식사 자리를 만든 머리가 희끗희끗한 마에스트로가 수철의 자리를 알려 줬다. 수철이 자리에 앉자 마에스트로들은 먼저 지난번 프로젝트에 관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그들의 입에서 ‘Incredible’, ‘Unbelievable’ 같은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수철 씨는 그동안 우리가 봐 왔던 그런 엄청난 재능의 음악가와는 또 달랐어요. 그날 퍼포먼스는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였고요.”
“…….”
모두가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해서 수철은 겸손을 떨지 않고 대꾸 없이 들었다.
“뭐랄까, 각도가 달랐어요. 소리를 시작하는 각도가요.”
난데없는 말이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이해했다. 수철이 소리의 시작점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었다.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경청하던 다른 마에스트로도 입을 열었다.
“수철 씨의 재능이 너무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어요. 하하.”“맞아요. 수철 씨의 존재가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하고, 나아가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기뻤어요.”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랐다. 앞에 앉아서 대놓고 듣기 거북할 정도의 칭찬을 하다니. 그것도 마에스트로라는 거장들이.
더군다나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날 만찬회장에서 나오면서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천재도 실패할 수 있다고요.”
그 말에 그날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희끗한 마에스트로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용수철 음악가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근성이 있으니까요.”
근성?
“그날 퍼포먼스가 그랬어요. 포기하지 않는 근성. 거기에다가 공백에서 소리를 시각화하는 장면은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그때가 생각나는지 수철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수철은 대놓고 이렇게 칭찬하는 이 음악의 대가들이 짓궂음을 넘어 슬슬 불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머릿속으로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 3인방과 비교했다. 누가 더 짓궂은지.
마에스트로들이 칭찬하면 가슴에 손을 대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는 다른 음악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수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 건 손발이 오글거린다.
귀를 후빌 수도 없고.
빨리 칭찬을 멈추기 바랄 뿐이었다. 그렇다고 음악계에서 칭송받는 거장 어르신들의 말을 끊을 수도 없고.
음.
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로 대화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로렌조는 여전히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바깥의 매서운 바람을 맞다가 안으로 들어왔기에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로렌조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강에서 봤던 자신만만하고 여유롭던 모습은 다 사라지고,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조금 전 들었던 수철의 연주 생각에 빠져 있었다.
결국, 로렌조는 참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다.
“수철 씨, 아까 말이에요.”
“……?”
느닷없이 말을 끊고 들어온 로렌조를 모두 쳐다봤다.
수철이 고개를 돌리자 로렌조는 수철과 시선을 맞췄다.
“별장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 들었어요. 수철 씨 데리러 갔을 때요.”
“아…….”
“혹시, 괜찮다면 아까 연주를 다시 한번 들려줄 수 있을까요? 너무 인상적이어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군요.”
“…….”
수철은 대꾸가 없었고 스테파노는 로렌조에게 뭐 하냐는 시선을 날렸다. 수철은 오늘 식사 자리에 귀빈으로 초대된 사람이다. 그런 수철을 불편하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로렌조는 스테파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자기 할 말을 했다.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며.
“여기 계신 마에스트로분들도 같이 들으시면 좋을 거 같아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수철에게 향했다. 수철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난처한 표정으로 갸웃했다.
“글쎄요, 제가 뭘 쳤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요…….”
물론 거짓말이다. 어떤 멜로디를 어떤 손가락으로, 어떤 박자로 눌렀는지도 다 기억하고 있다. 단지 차에서 올 때부터 힐끔거리는 로렌조의 시선이 불편했고, 지금 그의 도발도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서 모르는 척을 했다.
게다가 로렌조가 연주를 듣고 놀랐다고 해도 그걸 다시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믿기 싫으면 믿지 않으면 그뿐.
스테파노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수철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지금까지 봐 온 수철의 음 기억력은 퍼펙트하다. 연주 도중에 창밖에서 들려온 새소리까지 악보에 그려 넣는 걸 목격하고 사색이 된 적이 있다.
그런 수철이 저렇게 말하는 건 분명 불편하다는 뜻이다.
스테파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로렌조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 오늘 좀 예민한 거 같군. 수철은 오늘 이 자리에 귀빈으로 초대된 손님일세. 어렵게 모신 손님이라는 말일세. 그러니까 불편한 분위기를 만드는 건 옳지 않아. 이제 그만하고 와인 한잔하는 게 어떻겠나?”
스테파노는 좁혔던 미간을 피며 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로렌조는 자신의 기세를 꺾을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눈으로 수철의 피아노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연주할 수 있는지, 자신이 들었던 그 선율에 어떤 방식이 작동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천재를 접해 본 경험이 많은 로렌조이지만, 그들과는 격이 다른 수철의 재능에 놀라 무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렌조는 스테파노가 내민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자네가 예민한 거 같군. 우리가 식사하면서 피아노 치는 건 늘 있는 일 아닌가? 그래서 정중히 요청한 건데 왜 그렇게 난색을 표하는 건가?”“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스테파노는 강하게 대꾸하려다 멈췄다. 자칫하면 특강에서 벌어졌던 각을 세우는 일이 또 벌어질 것 같았다.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은 탓에 멀리서 쌓인 눈을 밟으며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렸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때쯤 수철이 손을 닦으며 일어섰다.
“네, 쳐 볼게요. 치다 보면 생각나겠죠. 뭐.”
그 말에 스테파노는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입가엔 미소가 스쳤다.
마에스트로들은 분위기가 어색하면서도 로렌조의 도발도, 수철이 피아노 치겠다는 것도 말리지 않았다.
수많은 전문가와 관계자 그리고 자신들이 천재라고 수군대는 수철이다. 피아노 연주 실력이 어떨지 궁금한 건 당연하고, 로렌조가 대체 어떤 연주를 들었길래 오만하고 독선적이기까지 한 사람이 저렇게까지 궁금해하는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수철은 주인의 안내를 받아 거실에 있는 피아노로 이동했다. 마에스트로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거실로 나와 소파에 둘러앉았다.
로렌조에게 눈치를 주던 스테파노도 아까와 달리 수철이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음.
수철은 어떻게 쳤는지 기억이 안 난다면서도 무슨 곡이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마에스트로들을 배신이라도 하려는 듯, 앉자마자 자세도 잡지 않고 바로 건반을 눌렀다.
그 모습에 마에스트로들은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감고는 수철의 손가락 끝에서 튕겨 나오는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수철은 베토벤이 자신의 멘토인 하이든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Op.2를 먼저 치기 시작했다. 이 곡은 로렌조가 특강에서 쳤던 곡이다.
딴! 따라, 단. 딴! 따라, 단. 딴! 따라, 단.
수철은 세 잇단음표가 등장하는 도입부를 베토벤처럼 경쾌하게 치다가 곧장 변주하기 시작했다.
헉!
테마를 연주하기도 전에 변주를 시작하자 다른 마에스트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테파노까지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변주가 아니라 그냥 새로운 곡, 즉흥적으로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는 것이다. 그것도 베토벤의 멜로디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스테파노는 수철의 입가에 번지는 야릇한 미소를 봤다. 그건 마치 베토벤의 멜로디가 지겨워서 다르게 친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눈을 감고 수철이 만들어 내는 선율을 듣는 마에스트로들은 굳이 눈을 뜨고 피아노 치는 모습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건 수철의 소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바꿔 가며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기 때문이다.
로렌조는 아까 자기가 들었던 멜로디가 나오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철이 이내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변주시키자 손에 땀을 쥐었다.
한 번 친 멜로디는 재미없다는 건가?
그렇게 느껴졌다.
수철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스테파노, 로렌조 두 명의 거장은 농락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잠깐씩 아까 쳤던 멜로디를 들려주다가 곧바로 변주하는 모습이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마치 멜로디로 자신들을 갖고 노는 기분.
특히 로렌조는 계속해서 얼굴색이 변하면서 충격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연신 마른침을 삼키던 로렌조.
무릎에 올려놓은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