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작은 선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길 기대해요.”
마에스트로 로렌조는 수철과 헤어지며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욕구불만 같은 감정을 느꼈다. 간절하게 원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그래서 더 간절해지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의 재능이 경이롭고 부럽고, 그래서 같이하고 싶은데 그럴 순 없는.
로렌조는 수철이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길게 입김을 내뱉으며 거리에 서 있었다.
* * *
―스웨덴에 이틀 더 머물겠다고?
“네, 할 일이 좀 생겼어요.”―무슨 일인데?
“특별한 일은 아니고요, 그냥 며칠 좀 더 보내고 싶어서요.”―알았어. 시드니로 출발하기 전에 전화하고.
“네,”
다음날 수철은 박 대표와 통화하며 일정을 조절했다. 그리고 곧바로 스테파노에게 전화했다.
“별장에 며칠 더 머물러도 될까요?”―당연하지, 몇 달, 아니, 몇 년은 더 머물러도 돼.
“하하, 감사해요.”
―그런데 무슨 일이지? 마음에 드는 여자라도 발견한 건가?
“네, 맞아요. 하하.”
―진짜?
“네, 스테파노에게 어울릴 만한 여자분을 발견했어요.”―뭐? 허허, 이런, 늙은이를 희롱하다니.
“죄송해요.”
―죄송하긴. 이젠 말로도 못 당하겠군. 하하.
* * *
수철은 산책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틀간 꼼짝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소파에 기대서 악보를 그리다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눌러 보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뭐라고?”
수철이 떠나기 전 마지막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스테파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수철이 내민 선물 때문이었다.
“그동안 너무 감사해서요.”
“…….”
스테파노는 충격에 대꾸하지 못했다. 수철은 그런 스테파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감사할 일이 많은데 제가 드릴 게 없어서 이렇게라도 작은 선물을 드려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수철이 스톡홀름에 이틀을 더 머문 건 스테파노에게 줄 선물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걸 이틀 만에 만들었다고?”
수철이 선물이라며 내민 악보를 잡은 스테파노는 머리부터 흔들었다. 수철이 작업한 건 바로 4악장의 교향곡이었다.
악보를 건네받은 스테파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놀라서 에스프레소를 엎지를 뻔했다.
“…….”
수철은 대꾸 없이 스테파노를 빤히 바라봤다.
스테파노도 같이 빤히 바라봤다. 스테파노는 수철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당연히 이틀 만에 만들었겠지.
수철과 악보를 몇 번 번갈아 보며 악장을 넘기던 스테파노는 추운 날씨에 얼음 동상이라도 된 듯 그대로 얼어 버렸다.
한참 뒤에야 스테파노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턱 밑에 에스프레소 자국이 묻어 있었다.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4악장이네?”
“네.”
수철은 턱밑을 닦으라며 냅킨을 내밀면서 대답했다.
“1악장이…….”
스테파노가 악보를 넘기며 악장을 훑어보자, 수철은 그의 말을 낚아채며 설명을 붙였다.
“1악장은 보통의 클래식처럼 그렇게 구성했어요. 빠른 소나타로요. 2악장부터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요.”
“하하, 그래. 그래야 자네의 맛이 나지. 똑같은 건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아.”“네, 그래도 4악장은 다시 소나타 형식으로 마무리했어요.”“그래, 그런 거 같군.”
스테파노는 두꺼운 안경을 벗어 한번 닦고는 4악장을 뒤적였다.
“혹시 소프라노가 필요하시면 전혜미 선생님을 고려해 보세요.”
“전혜미?”
“네, 제 생각엔 그분이 부르시면 잘 어울릴 거 같아요. ”“그래, 그렇게 할게. 전혜미 소프라노라면 나도 기대가 돼.”“아, 그리고 제목도 붙였어요.”“……제목? 그렇지, 제목이 있어야지. 그래, 뭔가?”
스테파노는 아직도 얼떨떨한지 정신을 놓고 있다가 물었다.
“누군가 사과를 깨물던 순간부터요.”
“뭐……?”
두꺼운 안경을 내리고 수철을 봤다.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수철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제목이었다.
누가 교향곡에 이런 영화 같은 제목을 붙이겠는가.
덕분에 잠시 무거웠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사과라면, 이브의 사과를 말하는 건가?”
“네. 맞아요.”
“왜 그런 제목을 붙였지? 동양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서양에서 이브의 사과는 유혹에 들고, 죄에 빠지고, 그런 의미라네.”“그래서 붙인 거예요.”
“……그래서?”
“네, 음악도 그때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요.”
“……?”
스테파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점점 미궁 속에 빠져드는 표정이었다.
“그런 어두운 부분이 있으면, 즐거운 부분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사람이 살 수 있죠.”“……그래, 그렇다고 치고?”“음악이 그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
“……!”
“…….”
“……!!”
수철은 눈을 끔뻑였지만, 스테파노는 눈을 닫지 못했다. 오히려 점점 크게 떴다.
“수철, 자네 말이야.”
스테파노는 심하게 흔들렸던 초점을 바로 잡았다.
악보를 내려놓고 잠시 수철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풀어 나갈 생각인지 얘기해 주겠나? 음악 인생 말이야.”
“음악 인생이요?”
수철은 너무 거창한 질문에 멈칫하며 되물었다.
“그래, 오랫동안 궁금했던 거야. 그 정도 친분은 생겼다고 믿고 물어보는 거네.”
스테파노는 앞으로 수철의 행보가 궁금했다.
수철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새로운 역사가 될 수도 있다.
거장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해 온 마에스트로들도 느닷없이 나타난 어린 천재한테 한 방에 무너졌다. 그건 스테파노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는 질문하면서 자신은 이루지 못했지만, 수철은 그 재능을 세상을 위해, 음악이 주는 행복을 위해 써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수철이 천천히 입을 뗐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 얘기를 좀 해 보려고요.”“다른 사람들 얘기라면 어떤……?”“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이제 찾아보려고요. 지금까지는 제 얘기만 했는데,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할 얘기들을 해 보고 싶어요.”
스테파노가 기대했던 답변이었다.
그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졌다. 모든 주름이 펴질 정도로.
스테파노가 생각하는 음악은 그런 거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신의 선물 같은.
수철이 그런 일을 하겠다니 기쁠 따름이었다.
스테파노는 식은 에스프레소 잔을 비우고 자세를 가다듬고는 마지막 말을 했다.
“난 자네가 작품을 만들어 내는 능력도 천부적이지만 자네의 보이스도 그에 못지않다고 생각해.”
스테파노는 작심한 듯 지금까지 한 적이 없는 말을 꺼냈다.
“나도 많은 보이스를 만나 봤지만, 자네의 보이스는 정말 신비로워. 내가 지휘자이자 작곡가다 보니까 그동안 자네의 작품에만 눈이 쏠려 있었던 거지, 다른 마에스트로들도 나랑 같은 생각이야.”
스테파노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감사해요, 스테파노.”
수철이 고마움을 표하자 스테파노는 흐뭇한 미소로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오페라나 팝페라 쪽으로도 영역을 넓혀 보는 것도 고려해 보게. 꼭 정통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말이야. 나이 든 음악가의 조언이니까 참고하게.”
스테파노는 수철의 선물에 답이라도 하려는 듯 깊은 눈빛을 보였다.
“네, 감사해요.”
수철은 읊조리듯이 대답하며 깊은 미소를 보였다.
“이제 출발해야지?”
시간을 확인한 스테파노가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철은 스테파노의 손을 잡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잘 쉬었어요. 좋은 음악도 많이 만들 수 있어서 감사하고요. 노르웨이 별장에서의 시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예요.”
스테파노는 뒤늦게 안경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 * *
“헤이! 드디어 우리의 히어로가 컴백하셨군!”
마커스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수철을 반겼다.
수철은 앨범에 실릴 새로운 곡을 들고 1년 만에 시드니로 돌아왔다.
“노르웨이는 좋았고?”“네, 아주 훌륭했어요.”“그래, 표정만 봐도 얼마나 좋았는지 알 거 같아.”
수철은 다른 멤버들과도 인사를 나누고는 자리에 앉았다. 멤버들은 수철이 어떤 음악을 만들어 왔을지 기대에 찬 눈으로 수철 주위에 둘러앉았다.
수철은 노르웨이에서 만들어 온 가사와 음악을 공개했다.
“첫 번째 곡은 ‘까딱까딱’이에요. 장르는 펑키고요.”
“까딱까딱?”
이언은 수철이 내민 가사와 데모를 듣다가 갸웃했다.
“네, 이번 앨범에서는 사람들이 그루브를 느끼는 다양한 모습을 여섯 개로 나눠 봤어요. 그래서…….”
수철은 이번에도 장르는 다르지만, 음악을 꿰뚫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는 설명을 붙였다.
멤버들은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어로 번역된 가사를 훑어보고, 데모를 들으며 수철이 만든 곡들에 귀를 기울였다. 음악을 들을수록 멤버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갔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음악이 끝나자 수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세한 디테일은 연습하면서 같이 만들어 가면 될 거 같아요. 아, 그리고 앨범 제목은 ‘흥’이라고 붙였어요.”
“흥?”
“네, 영어로 하면 Excitement 정도 되죠.”
수철은 처음부터 흥과 관련된 한 권의 시집 같은 앨범을 만들어 볼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었다. 한국의 음악가라면 한번은 ‘흥’에 관해서 얘기를 해봐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카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한국어로만 부를 생각이야?”
“네, 우선은요.”
루카스는 더 많은 인기와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를 놓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의 눈빛을 보였다. 수철이 설명을 덧붙였다.
“영어로는 느낌이 맞지 않아서요.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몇 장 모이면 그중에 베스트만 뽑아서 영어로 낼 거예요.”
외국인에게 한국어의 중요성을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표현력이 뛰어난 한국어가 세상에 퍼지길 기대한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쉽게 가진 않는군.”
가사를 들여다보던 마커스가 팔짱을 끼며 툭 내뱉었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마커스를 봤다.
“쉽게 갈까요?”
“하하, 쉽게 가는 방법은 알고?”
“몰라요. 흐흐.”
“그럴 줄 알았어. 사실 뭐 별거 없지. 지난번 앨범이랑 비슷하게 가는 게 쉽게 가는 거지.”“그렇게 하면 재미없잖아요?”“재미는 없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지.”
“…….”
“물론 그렇게 하자는 게 아냐. 그게 좋다는 것도 아니고. 우린 수철, 너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사랑해. 쉽게 가지 않아서 더 좋다는 뜻이야. 맞지?
마커스는 멤버들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멤버들은 그렇다며 서둘러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무거웠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으니까.
수철은 멤버들의 경직된 모습에 피식 웃으며 일정을 설명했다.
“이번엔 다 같이 녹음할 수가 없으니까 먼저 여기서 리듬 파트를 연주해서 보내면 영준이 형은 영국에서, 다혜는 한국에서 녹음해서 보내 올 거예요. 이언은 그다음에 기타를 녹음하면 되고요.”“오케이. 그런데 보컬 녹음은? 이번에도 한국에서 할 생각이야?”“아니요. 이번엔 여기서 하려고요. 한국은 춥잖아요. 헤헤.”“하하, 그렇지. 작년에 우리가 좀 떨었지?”“이언, 그때는 추울 때가 아니었어요. 진짜 추위를 경험하면 이언은 아마 도망갈 거예요. 하하.”“그 정도야? 하하.”
둘이 큰 소리로 웃는데 마커스가 끼어들었다.
“여기서 보컬 녹음할 생각이면…….”
“……?”
“어때, 태즈메이니아에 한 번 더 가는 게? 보여 줄 희귀 동물이 있는데.”“마커스, 그건 좀.”
* * *
수철은 앨범 녹음을 하기에 앞서 만날 사람들이 있었다. 높은 경쟁을 뚫고 디데이 뮤직과 계약한 사람들이었다.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아니에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건 당연하죠. 전혀 부담 갖지 마세요.”
수철이 미안해하자,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온 뮤지컬 제작자는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