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비행기 타고 오는 동안
‘RADIATE TO PRISM’ 프로젝트 이후 유럽이 떠들썩한 건 당연하고, 그 소문이 미국까지 퍼져 나갔다. 유력 일간지인 뉴욕타임스(NYT)에서는 밀도 있게 이 프로젝트를 다루며 수철을 집중 조명했다. 수철을 원작자이자 이런 형식의 프로젝트를 가능케 한 장본인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CNN 뉴스에서도 화제작으로 소개했다.
―이곳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라 스칼라(La Scala) 극장은 2차 대전 때 공습으로 파괴되었다가 전후에 재건된 세계에서 가장 명성 있는 오페라 극장입니다. 정통 오페라만 무대에 올리는 이곳에서 유럽의 침체된 공연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요, 그 결과는 엄청난 흥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라 스칼라 극장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소식을 전하는 기자는 이번 프로젝트는 새로운 시도를 넘어 모험이었고, 과감한 선택을 한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엄청난 성공을 이뤄 내 찬사를 받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기자의 소식을 들은 앵커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미국 공연계의 침체된 분위기와 비교했다.
―위기일수록 과감한 도전과 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때가 지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고정관념을 무너트린 라 스칼라 극장의 도전과 성공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미국의 침체된 공연시장에도 ‘RADIATE TO PRISM’ 같은 획기적인 시도가 필요하고, 그것이 돌파구가 될 거라는 전문가의 인터뷰도 같이 내보냈다.
작품성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어서 아쉬웠지만,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이슈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몇몇 방송사는 수철의 음악을 집중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THE 끼’ 뿐만이 아니라 ‘ABYSS’, ‘INTERSECTION’, ‘SUNSET’에 실린 음악들을 모두 끄집어내 전문가들과 함께 토론하고 감탄하는 시간을 가졌다.
라디오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수철의 노래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작곡한 음악까지도 계속해서 내보냈다. 덕분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수철이 만든 음악들이 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150년의 역사를 가진 브로드웨이의 뮤지컬계도 들썩였다. 유럽의 돌아가는 판세를 지켜보던 한 제작사 대표가 컨택을 해 왔다.
―라이온킹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라이온킹뿐만이 아니라…….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원작인 라이온킹을 뮤지컬로 제작하여 흥행 대박을 터트린 제작사 대표가 직접 디데이 뮤직으로 연락을 했다.
수철이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Radiate’를 뮤지컬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 때문이다.
디데이 뮤직은 이미 유럽의 여러 제작사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대부분이 ‘Radiate’를 오페라와 뮤지컬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제안들이었다.
소문을 들은 한국의 제작자들까지 요청을 해 와서 디데이 뮤직은 이들을 만나고 기획안을 받아 보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업계의 영향력과 과거 크레딧(credit)을 위주로 먼저 회사를 추려 봐.”
“네.”
박 대표는 제작사 선정을 고민하고 있었다. 붐이 일어난 만큼 시기를 늦출 이유는 없었다. 자본력과 영향력을 갖춘 검증된 회사를 선택하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
그런데.
“대표님, 브로드웨이라는데요?”
생각지도 않은 미국에서 컨택이 온 것이다.
“잠시만.”
박 대표는 직감했다. 이것이 새로 도약할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이미 유럽에선 수철의 영향력을 모두 증명했다. 작곡, 작사, 노래, 공연에 프로젝트까지.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아직 그만큼에 달하지 않는다.
미국이 그렇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유럽만큼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인 만큼 마지막으로 도전할 시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중을 기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박 대표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제안부터 면밀하게 검토했다.
수철이 다음 앨범을 내기 전에 뮤지컬로 먼저 이슈를 만든다면, 미국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데도 큰 힘을 받을 수 있다.
“자, 모여 봐.”
박 대표는 회의를 거쳐 빠른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금별과도 미팅을 진행했다.
“기획안 봤지?”
“네, 기획안도 탄탄하지만, 회사 이름만 듣고 그냥 진행해도 되겠어요. 흥행을 많이 터트려서 유명한 곳이잖아요.”
금별의 이 부장도 바로 동의했다.
“그럼 오페라는 이탈리아 제작자에게 사용권을 허락하는 겁니까?”“그래, 프로젝트를 만든 스테파노와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세워 줘야지.”“뮤지컬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선택하는 거고요?”“그래, 그게 시장 논리에도 맞지.”
오페라 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 유럽엔 오페라를, 뮤지컬 시장이 큰 미국엔 뮤지컬을 배정하면서 디데이 뮤직은 더 많은 기대를 할 여건을 조성했다.
박 대표는 이 소식을 수철에게도 알렸다.
“어떻게 생각해?”
―잘 선택하신 거 같아요. 너무 유럽에만 몰려 있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 그게 가장 큰 이유야. 시장을 두 개로 나눠야 기회도 더 많이 생기는 거고.
―그렇군요. 그런데 쌤, 제가 뮤지컬 대본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대본? 웬일이야 네가 대본을 다 보겠다고 하고?”
매번 얘기해도 시큰둥하게 흘려들으며 ‘알아서 해 주세요’라고만 하던 수철이 대본을 보겠다고 하니 신기할 정도였다.
―영화음악을 한 적이 있으니까 한번 보려는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하고요.
“뮤지컬 음악?”
―네, 가능하다면요. 제가 만든 프로젝트를 뮤지컬로 올린다고 하니까 음악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을 거 같아요.
“그래, 당연히 좋지. 알았어.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를 먼저 보내 줄 테니까 한번 봐 봐. 대본은 아직 안 나왔는데, 오는 대로 보내 줄게.”
수철은 박 대표가 보내온 뮤지컬 줄거리를 훑어봤다. 마음에 들었다. 무거운 주제를 사람들이 보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게 특히 좋았다.
수철은 몇 주 후 도착한 절반 정도의 대본을 읽어 보고 결정했다. 직접 음악을 만들어 보겠다고.
박 대표는 당연히 찬성했고, 뮤지컬 제작사 대표도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작품에 참여할 음악가를 섭외하느라 골머리 썩고 있었는데, 프로젝트의 원작자인 수철이 음악까지 맡아 주겠다니 기뻐할 수밖에.
게다가 수철이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될 게 뻔하고, 그건 곧 OST 앨범 같은 다양한 수익모델을 창출할 기회로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슈들은 뮤지컬의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고.
이들은 항상 흥행에 목마른 집단이다. 그래서 녹음을 시드니에서 하겠다는 수철의 제안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바로 출발하라고요?”―네.
“아니, 오늘 전체 대본을 보냈는데 지금 바로 출발하라고요?”
전체 대본을 보내자마자 수철이 출발하라고 하니까 어이가 없어서 계속 되물었다.
―네, 오시는 동안에 만들어 놓을게요. 걱정 말고 출발하세요.
남녀 주인공 테마 송 각각 한 곡, 같이 부를 듀엣곡 한 곡, 그리고 장면을 연결하는 20개가 넘는 짧은 음악들, 거기에다 분위기가 바뀔 때마다 들어가는 시퀀스의 테마 송만 7개다.
그런데 바로 출발하라고?
전화기를 든 채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대표에게 수철이 다시 말을 붙였다.
“여기까지 오시는 데 이틀 정도 걸리잖아요?”―그렇죠, 지금 바로 출발해도 그 정도는 걸리죠.
“그러면 충분해요.”
충분하다니? 허, 허.
대표는 헛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는 만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럼, 진짜 믿고 출발합니다?”“네, 이틀 후 시드니에서 뵐게요.”
수철이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멤버들 녹음 스케줄과 맞추기 위해서다. 앨범 녹음을 하려고 시드니로 돌아왔다. 뮤지컬보다는 앨범이 우선이다. 그래서 굳이 천천히 할 이유가 없는 뮤지컬 음악을 먼저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어찌 됐건 수철의 요청으로 제작사 대표와 음악 감독, 남녀 배우, 배우들의 에이전트 두 명이 함께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니까 비행기가 시드니까지 가는 동안에 다 만들겠다는 얘기인 거죠?”
“그런 얘기지.”
“나, 참. 천재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무슨 작곡 기계도 아니고 이틀 동안 어떻게 찍어 낸다는 건지.”“어쨌든 사용권을 허락한 저작자가 가능하다고 하니까 믿고 가 보는 거지. 가 보고 아니면 회사에 책임을 물으면 되는 거고.”
* * *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변동 사항이 있으면 수시로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뉴욕에서 제작자 일행이 시드니로 출발할 무렵, 레베카도 한국에서 출발했다.
수철의 일정을 돕고 관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레베카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습성을 잘 꿰고 있다. 그곳에서 에이전트를 했기 때문이다.
“레베카―!”
레베카는 미국에서 오는 사람들보다 하루 먼저 시드니에 도착했다. 서울과 시드니가 가까운 거리가 아니지만, 뉴욕은 그보다 더 멀었다.
오랜만에 만난 수철과 레베카는 서로 반가워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노르웨이에서의 시간은 즐거웠나요?”“물론이죠. 퍼펙트했어요. 쌤이 별장 알아보고 있다니까 레베카도 꼭 가 봐요.”“네, 그래야겠어요. 수철 씨 모습 보니까 더 구미가 당기네요. 호호.”
수철은 일은 뒤로 미뤄 놓고 재규어에 레베카를 태우고 해안도로를 달리며 시드니 바다를 구경시켜 줬다. 그리고 수철의 단골인 본다이비치의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저녁도 먹었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바로 그곳이군요? 수철 씨가 하염없이 노을을 바라봤다던.”“네, 맞아요. 레베카가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요.”
수철은 잠시 예전 자신의 모습을 추억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건가요? 작업해야 하지 않나요?”“이미 다 만들었어요.”
“호호, 벌써요?”
“네, 대본 읽어 보면서 금방 만들었어요.”
수철은 대단하다며 고개를 젓는 레베카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 * *
“허……. 소문대로 엄청난 분이시군요.”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건 당연하다던 제작사 대표는 수철이 만들어 놓은 30여 개의 음악을 듣자마자 얼굴이 벌게졌다.
아무리 대단해도 자신들을 희롱하는 거 아니냐고 떠들었던 음악 감독과 에이전트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이게 말이 돼? 이틀 만에 다 만들었다는 게?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에다 그들은 수철이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도, 분명 철없고 오만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었다. 자신들을 먼 시드니로 오라고 하면서 그동안에 작업해 놓겠다고 하는 걸 보면.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 있으면 말씀하세요. 금방 바꿀 수 있으니까요.”
“네.”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거나 추가로 음악을 넣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네, 고마워요.”
그런데 같이 녹음하면서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너무 친절해서 절로 허리가 숙여질 정도였다. 음악을 빨리 만든 건 미룰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작업해 놓은 음악은 듣는 사람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퍼펙트했다. 음악에 대본이 눌리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덕분에 제작사 대표, 음악 감독뿐만이 아니라 배우들까지 모두 만족해했다.
수철은 음악을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배우들의 노래 연습까지 관여하고 녹음도 직접 디렉팅을 했다. 음악의 전개에서 소리의 포인트까지 다 짚어 주며 세심하게 디테일을 챙겼다.
이를 지켜보는 제작사 대표는 연신 싱글벙글.
멀리까지 온 본전을 다 뽑았을 뿐 아니라,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수철을 절대 신뢰하게 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철을 경험하며 ‘Radiate’뿐만이 아니라 수철을 소재로 한 뮤지컬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수철은 새로운 앨범의 녹음을 모두 마치고 마스터링 된 시디를 들고 귀국했다.
발매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 그동안 휴가도 보내고, 회의에도 참석하고, 회사에서 새로 짓고 있는 건물도 보고, 사람들도 만날 생각에서다.
―저기다!
수철이 공항에서 나오다 예상치 못한 인파에 둘러싸였다. 기자까지 몰려와 플래시를 터트리며 마이크를 내밀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음에도 비행기에서 수철을 알아본 사람이 소문이 퍼트렸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수철은 레베카와 윤 팀장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와서야 어렵게 탈출했다.
휴―
휴―
차에 오른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5월에 풀기로 했어.”
회의실에 마주 앉은 박 대표는 프로모션에 관한 설명부터 했다.
이번 앨범은 서두르지 않고 두 달 후에 발매하기로 디데이 뮤직과 금별기획, 두 회사가 협의했다는 얘기였다. 흥행을 철저히 계산한 결정이었다.
“쇼케이스는 미국에서 먼저 하게 될 거야. 9월에.”
이번 앨범은 처음부터 타깃을 미국으로 잡았다. 금별에서는 거기에 맞춰 적극적으로 밑 작업을 하고 작은 것 하나에도 공을 들이고 있었다.
미국 공연을 늦게 잡은 것도 그동안에 붐을 일으키고 흥행의 특수를 누리겠다는 계산이었다.
“공연은 금별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진행하겠지만, 거기는 레베카의 영역이기도 하지. 레베카가 할 일이 많아.”박 대표 말에 레베카는 장난스런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일이 많아졌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 무대라서 그런지 신이 나 보였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 주겠다는 표정이었다.
* * *
“그럼요, 당연히 제가 해야죠.”
이번에도 자켓은 윤천화 미술가가 맡았다.
지난번 수철과 프로젝트를 같이한 탓에 이젠 수철의 음악만 들어도 그림이 술술 그려진다는 농담도 던졌다.
그런데, 어?
농담이 아니었네?
농담이 아니었다.
수철이 굳이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녀는 수철의 음악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덕분에 자켓은 지난번 앨범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번엔 보자마자 딱 알겠어요.”
사람들은 지난번과 달리, 처음 보는 순간부터 자켓의 의미를 파악했다.
사람들이 윤천화 미술가만의 도형을 이해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윤천화 미술가가 그만큼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췄다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