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23화 (223/239)

#223화. MAKE THINGS GO

그림은 두 개였다. CD 앞면과 뒷면에 들어갈 그림이 서로 달랐다.

앞면은 앨범의 주제인 ‘흥’이 사람들 가슴에서 타오르며 번져 나가듯이 사람들 가슴에서 작게 시작한 불꽃이 세상으로 번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뒷면은 서로 다른 모습의 원주민들이 젬베를 두드리고 서로 섞일 수 없는 지역의 동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는 형상이었다.

윤천화 미술가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졌지만 사람들은 동물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형상은 하마와 캥거루가 붙어서 리듬을 타는 형상이었다. 사람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이 또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그녀의 의도였다.

‘이거 어쩐다.’

자켓이 마음에 들어 함박웃음을 짓던 박 대표는 고민이 생겼다. 자켓을 계속 선물로만 받을 순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앨범도 그렇고, 이탈리아에서 열린 프로젝트도 그렇고, 뭔가 보상을 하려고 하면 그녀는 매번 거절했다. 심지어 불편하게 하면 다음부터는 같이 안 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수철 씨의 공연에 초대받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녀는 그거로 만족한다고 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박 대표는 편치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묘책을 찾았다. 전시회에 가서 윤천화 미술가의 작품을 하나 구매하는 것.

일반적인 자켓 값의 몇 배가 넘는 금액이지만 부담은 없었다. 그녀에겐 그 이상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기회를 노리던 박 대표는 그녀가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갔다. 그리고 적당한 그림을 사기 위해 눈알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멀리서 박 대표를 지켜보고 있던 윤천화 미술가가 다가왔다.

“자켓 선물했다고 그림 사 가는 거예요?”

의도가 들통이 나고 말았다.

“작품을 감상하러 온 사람이랑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눈빛부터 다르거든요.”

그 말에 박 대표는 마치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말은 못 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벅댔다.

“아, 아니, 그게요…….”

미술 쪽으로는 조예가 얕은 박 대표는 적당한 금액만 생각하며 그림을 선택하려다가 그녀에게 속내를 들켜 버린 것이다.

“호호.”

그녀는 박 대표의 어설픔에 웃음을 지었다.

“그건 비싸니까 싼 거로 하나 가져가세요.”

그녀는 멀뚱히 서 있는 박 대표를 끌고 가서 적당한 그림을 하나 추천했다.

“이 정도면 서로 부담 없으니까 괜찮을 거 같아요.”“네, 정말 감사해요.”“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호호.”

윤천화 미술가는 박 대표의 순진한 모습이 재밌는지 연신 웃음을 보였다.

“전시회 곧 끝나는데 저녁 같이할까요?”

“저, 저녁이요?”

이날 이후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 * *

“혹시?”

“혹시 뭐?”

디데이 뮤직의 신축 건물 현장에 윤천화 미술가가 나타나자, 수철은 짓궂은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박 대표는 수철이 얼굴을 가까이 붙여 오자 찔리는 게 있는지 한 발 물러서면서 눈치를 줬다. 다른 사람들 눈도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라고.

하지만 장난칠 기회를 잡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철이 아니다. 게다가 눈치만 볼 뿐 선뜻 묻지 못하고 서 있는 직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 싶었다.

시원하게 물었다.

“두 분, 사귀세요?”

녀석, 결국 그걸 묻네.

박 대표는 그런 표정으로 눈을 몇 번 흘겼다.

“그런 거 아니야. 건물 디자인하는 데 도움 주겠다고 해서 온 거야.”

“…….”

수철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박 대표 앞에 서서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박 대표는 난처한 기색으로 미적대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직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라고.”

“아직은?”

“……”

“저는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한 박 대표는 반색을 표했다.

“잘되다니, 뭐가?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수철은 지나치게 눈을 크게 뜨며 얼굴이 발개지는 박 대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건물이요. 건물이 잘 지어졌으면 좋겠다고요.”

“…….”

“쌤도 잘되면 좋고요.”

“…….”

수철이 묘한 미소를 띠며 배시시 웃자, 박 대표는 멋쩍게 목덜미를 긁었다.

“녀석, 참, 무안하게…….”

부정은 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이제 모든 것이 들통났다고 생각했는지, 대놓고 시선이 윤천화 미술가를 좇고 있었다.

건물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철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 * *

5월에 출시되는 앨범 ‘흥’은 한국과 미국, 동시에 홍보를 시작한다. 한국은 이미 탄탄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미국은 다르다. 개척해야 할 영역들이 많다. 그래서 미국 시장을 맡은 금별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국내는 디데이 뮤직이 준비를 마쳤으니까, 우리는 미국만 점검하면 돼. 다음 주는 다시 한번 전체 점검을 하자고. 이제 출시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파이팅하고.”

“네!”

출시가 임박하자 홍보를 맡은 팀에서는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마저 들었다. 수시로 미국지사와 연락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돈과 시간을 많이 투자했기에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9월에 열릴 쇼케이스도 동시에 진행됐다.

쇼케이스가 열리는 LA의 스테이플스 센터(Staples Center)는 LA의 농구팀인 레이커스와 클리퍼스의 홈구장이며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실내 경기장 중에서는 미국에서 최대 규모.

금별은 쇼케이스 전에 붐을 충분히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의 에이전시와 갖가지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금별에게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제시가 8월에 미국 투어를 시작한다고 합니다.”“좋은 소식이야, 우리에겐 아주 굿 뉴스야.”

미국을 다루는 법을 잘 안다는 ECM과 런던의 잘나가는 공연에이전시, 그리고 미국의 프로모션 업체가 공동으로 투어를 기획하고 진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 제시의 보이시한 매력이 미국에서 잘 먹히고 있었다. 투자 대비로 따지면 미국이 유럽보다 수요가 더 컸다. 그래서 몇 년을 관망하다가 드디어 익을 때로 익었다는 생각에 투어를 결정한 것이다.

8월이면 수철의 쇼케이스보다 한 달 먼저 시작한다. 금별에서는 미리 분위기를 볼 수 있으니까 좋아할 수밖에. 게다가 공연에서 부르는 곡은 모두 수철의 음악이라 홍보하기에도 금상첨화다.

“한 달이면 아주 좋은 시간이에요. 모니터링을 해서 대응할 시간도 가질 수 있고, 홍보 전략도 좀 더 플렉시블(flexible)하게 짤 수 있어요.”

하지만 금별은 좋은 뉴스가 아무리 많아도 평소보다 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아시아를 상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대중문화의 중심지인 만큼 무게감이 큰 곳이다. 동원된 자본도 많고, 인력도 그동안에 비해 최대 규모다. 실패하면 타격이 크다. 그래서 모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끌어모으고 혹시 모를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리스크를 걷어 내는 데 집중했다.

디데이 뮤직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국내 파트만 맡고 있기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했다.

“그곳 공연 프로모터들은 흥행을 장담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수철의 공연을 모니터링해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 거 같습니다.”“말은 그렇게 해도 긴장을 늦출 순 없을 거야.”

“그건 그렇겠죠.”

“우리도 한걸음 빠져 있지 말고 부채질을 계속해 줘야지.”

“어떻게요?”

“적극적으로 소스를 제공해 줘야지. 다음 달 뉴욕에서 열리는 뮤지컬과 유럽의 돌아가는 상황까지 말이야. 도움이 될 만한 건 모두 모아서 실시간으로 전달해 줘야지. 어찌 됐건 프로젝트의 핵심은 우리잖아?”

* * *

“형님,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데요?”

앨범 홍보가 시작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이 계속 이어지더니 급기야 8월이 되자 그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제시가 공연을 시작하기도 전에 수철의 이름이 계속 수면 위에 떠 있었다.

“앨범 홍보 열심히 한 거 때문이 아니지?”“네, 앨범이랑은 상관없어요.”

앨범과 상관없이 여기저기에 수철의 이름이 등장하더니 이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시와 함께 부른 듀엣곡이 상위권에 고정되듯이 박혀 있었고, 전혜미 소프라노가 발표한 ‘Radiate 그 찬란함에 대해서’라는 곡은 독특한 가사와 그동안의 이슈 덕분에 클래식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일반 대중들까지 알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해리의 요청으로 ECM과 합작한 ‘재즈로 바라본 한국의 전통음악 WITH 용수철’은 유럽과 미국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이슈가 되며 높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독특하고 새로운 형식의 앨범에 언론은 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거기에다 ‘AMERICAN RADIATE’라는 이름으로 막을 올린 뮤지컬까지 흥행 몰이를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그동안 너무 긴장한 거 같아서 헛웃음도 좀 납니다. 하하.”

이 부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쇼케이스에 관여한 모든 업체가 그러했다.

거기에다 하나 더.

스테파노도 큰 몫을 했다.

수철이 선물한 4악장의 교향곡, ‘누군가 사과를 깨물던 순간부터’가 악단을 구성할 때부터 연일 화제를 뿌리더니 초연이 끝나자마자 극장이 터져 나갈 듯한 환호성이 터졌다. 정숙한 클래식 팬들조차 뜨거운 열기를 참지 못하고 폭발시킨 것이다.

수철은 아쉽게도 이번에도 그 초연엔 참석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스테파노. 제 일정이 끝나면 뵈러 갈게요.”“괜찮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혹시 자네…….”

“……?”

“교향곡을 하나 더 주려고 이러는 건가?”

“……!”

미안함을 전하는 수철에게 스테파노는 혹시 교향곡을 하나 더 선물하려고 자꾸 초연에 빠지는 거냐며 농담을 던졌다.

* * *

“와우! 마에스트로 로렌조도 한마디 했네?”

스테파노의 공연과 관련한 기사를 살펴보다 로렌조의 인터뷰 기사를 발견한 박 대표는 탄성을 지르며 몸을 세웠다.

VIP석에서 교향곡을 감상한 로렌조는 평소답지 않게 양복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닦아서 눈가를 닦았다. 영롱한 눈빛으로 음악을 감상하던 그가 마지막 4악장에서는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나온 그의 인터뷰

[난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탤런트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천재라고 말해 주길 기대하지만, 난 그럴 수 없다. 그건 그 젊은 음악가에게 실례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걸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포기해라. 잘못하면 내 지팡이에 맞을 수도 있으니까.

대신 비슷한 얘기를 해 주겠다.

그의 세포는 음악으로 이뤄져 있는 것 같다. 천부적인 음감을 가졌느니, 한 번에 모든 성부를 듣고 악보를 그린다든지 그런 천재의 틀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그에겐 소리로 이뤄진 감각기관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다.

현대의학이 얼마 전 베토벤의 머리카락에서 음악 유전자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분석했더니 운명의 도입부인 ‘빠바바 밤!’이 모니터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용수철이 떠올랐다. 몸 안에 음악이 너무 많은 이 젊은이, 먼 훗날 그가 사라지고 누군가 그의 머리카락을 분석한다면 거기서 ‘Radiate’의 선율이 나오지 않을까?]

“로렌조 선생님 감동이네.”

기사를 읽은 박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해 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쨌든 수철이 만든 음악은 각각의 영역에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음악 관련 매거진에서 용수철은 이제 익숙한 이름이 되어 버렸다.

마치 몇 달간 음악계를 지배한 것 같았다.

이런 기류에 힘입어 앨범 ‘흥’의 곡들은 음원 차트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특히 첫 곡이자 타이틀 곡인 ‘까딱까딱’은 입소문을 타며 순식간에 탑 3에 진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철과 멤버들은 금별이 구성한 스케줄에 맞춰 인기몰이에 박차를 가했다.

―모두가 애타게 기다렸던 분들을 모십니다! Another Secret November!

공연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ASN’은 유명 쇼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자신들만의 매력을 드러냈다. 카메라는 시크한 미소의 수철을 놓치지 않으며 미국 전역에 화면을 내보냈다.

* * *

“익숙한 냄새가 나는군.”

리허설을 위해 무대에 오른 마커스는 오랜만에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왔다며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수철도 타원형의 넓은 공연장을 바라보며 상상했다.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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