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흥.’
쇼케이스 첫날 새벽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현장에서 한정으로 판매하는 수철과 ‘ASN’의 굿즈를 사기 위해서다.
금별기획은 협찬사, 광고사와 협력하여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기념품을 제공하고, 관객 전원에게 애플파이와 커피도 무료로 제공한다. 관객이 최대로 즐길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10분 남았습니다.
공연을 앞두고 스탭들은 큐 사인을 교환했다. 손에 든 무전기에서 카운트다운이 흘러나왔다.
―큐!
공연이 시작되자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졌다. 기대감으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밝아져야 할 조명이 반대로 꺼져 버리자 사람들은 긴장하며 깜깜해진 무대를 바라봤다.
궁금증이 커질 무렵 어두운 무대에서 한줄기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천장에서 내려온 핀 조명이 소리가 시작되는 곳을 비췄다.
그곳엔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가녀린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길이가 다른 관(管)을 순서대로 나란하게 묶은 악기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숨을 불어 넣고 있었다.
소녀가 든 악기는 팬플루트(Pan flute)였다.
인디언의 전통악기이자 잉카 고유의 악기.
원주민은 시꾸(sicu)라고 부르고 스페인어로는 쌈뽀냐(Zampona)라고 부르는 팬플루트에서 서정적인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소녀의 손목처럼 여리고 가는 소리는 넓은 운동장을 향해 계속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펴져 나가는 소리를 바라봤다.
두둥! 두두둥!
곧이어 어둠 속에서 두툼한 가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물 가죽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는 가녀린 팬플루트의 소리를 떠받치며 마치 사냥터에 나가는 전사를 위한 행진곡처럼 울려 퍼졌다.
음향 시스템의 연출인지, 사람들의 느낌인지 알 수 없지만, 팬플루트 소리는 하늘을 날고, 북소리는 땅을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착착착.
어둠 속에서 건장한 사내들이 발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미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온 원주민들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전통 복장을 입고 영적인 의미가 담긴 문양으로 몸에 페인트를 한 채 수루두, 땀보린, 봉고 등의 다양한 북을 메고 등장했다. 일렬로 발걸음을 맞추며 무대 앞으로 이동했다.
두둥! 두두둥!
이들은 소녀의 뒤에 서서야 발걸음을 멈추고 북만 두드렸다.
비장한 모습으로 쉬지 않고 그들만의 타악기를 두툼한 봉으로 계속 두들겼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소녀를 지키는 호위 무사들 같았다. 팬플루트 소리와 북소리도 그런 느낌이었다. 가녀린 소리를 보호하는 무겁고 둔탁한 소리들.
―두둡, 둡둡둡!
그때 갑자기 무대 뒤쪽에서 북소리에 맞춰서 움직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동시에 꺼졌던 전체 조명이 켜지며 확 밝아졌다.
때를 맞춰 무대 앞에서는 불꽃이 치솟았고, 천장에서는 레이저 빔이 무대를 가로지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공연의 주제가 ‘흥’인 만큼 무대 연출을 처음부터 강하게 하고 있었다.
와―!
수철과 멤버들이 동시에 무대 위에 나타나자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
수철이 한 손으로 마이크가 꽂혀 있는 마이크 대를 하늘 높이 쭉 뻗어 올리자 한 번 더 큰 함성이 터졌다.
마이크 대를 번쩍 들어 올린 그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던 황금 칼을 꺼내 치켜올린 것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게 신호였다.
수철의 액션에 맞춰 모든 악기들이 그루브를 싣고 총출동했다.
원주민들은 더 열정적으로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수철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리듬을 타고 갖가지 소리를 만들어 갔다. 스캣으로 단어를 내뱉으며 가사의 의미보다는 리듬을 만드는 데 힘을 실어 흥을 키웠다.
수철이 내뱉는 자유로운 리듬의 스캣은 그전과 다르게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래서 더 사람들의 뇌리에 팍팍 박혔다.
한창 흥을 키워가던 사운드는 소녀가 팬플루트에서 입술을 떼자 ‘ASN’의 악기 소리도 동시에 멈췄다.
넓은 타원형의 운동장에는 이제 북과 수철의 목소리만 남았다.
오롯이 북소리와 목소리,
스크린 화면에 멤버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했다. 새롭게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원시적인 미국과 남미대륙을 보여 주며 오래전 원주민이 사냥을 나설 때, 부족
간 전쟁에 나설 때의 모습을 보여 줬다.
그때 그들의 모습과 지금 무대의 모습이 겹쳐졌다.
같은 모습이었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사람들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소리의 울림도 같았다.
원시의 넓은 대륙을 울리는 소리는 오직 북소리와 목소리밖에 없었다.
화면에 선조들의 모습이 보이자 북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팔뚝에는 더 힘이 들어갔고 표정도 더 비장해졌다.
소리의 방향이 바뀌었다. 처음엔 수철이 그들의 북소리에 맞춰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어느덧 수철이 북소리를 끌고 가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일렬로 늘어선 채 수철의 목소리에 맞춰 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 사라졌던 소녀가 나타나 수철의 옆에 섰다. 그리고 다시 팬플루트에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수철은 북을 끌고 가던 리듬을 멈추고 소녀의 피리 소리에 맞춰 멜로디를 만들며 교차했다.
와―!
짝짝짝!
그렇게 공연의 첫 포문을 열고는 박수 칠 시간도 넉넉하게 주지 않고 바로 다음 곡으로 연결했다.
북소리가 잦아들 무렵 ‘ASN’은 곧바로 펑키한 음악을 시작했다. ‘까딱까딱’이었다.
사람들은 스크린에 나타난 소년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양손을 옆으로 든 채 손가락을 튕기며 어깨를 들썩이다가 머리를 까딱까딱 흔들기 시작했다. 2만여 명의 사람이 같은 동작으로 동시에 흥을 타기 시작했다.
이번 공연의 컨셉은 흥과 흥겨움에 관한 모든 것이다. 음악을 들어 본 스탭과 관계자는 한 방에 그 컨셉을 모두 이해했다. 자신들이 바로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대 연출은 물론이고 티켓과 스텝의 옷에도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는 형상을 집어넣었다. 머리를 까딱까딱하는 윤천화 미술가의 이미지를 새겨 넣었다.
“자! 바로 갑니다!”
두 번째 곡이 끝나자 수철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다혜가 양손으로 빠르게 건반을 훑었다. 마커스는 두꺼운 베이스 줄을 터뜨릴 듯이 격렬하게 튕기기 시작했고, 루카스는 드럼을 부숴 버리겠다는 듯이 크게 휘두르며 강하고 공격적인 소리를 만들었다. ‘ASN’의 사운드가 넓은 운동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와―! 와―!
관중들은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에 벅찬 감정을 느끼고 목이 터지라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열기는 하늘 끝까지 타올랐다. 조명은 LA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어둠을 다 뚫어 버릴 기세로 현란하게 흔들어 댔고, 사람들도 머리를 흔들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총공격!”
수철은 계속해서 흥을 돋웠다. 마이크를 들어 소리치며 점프를 했다. 그러자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수철을 따라 동시에 점프를 시작했다. 작은 지진이 난 것처럼 운동장이 울렸다. 그 울림은 운동장을 벗어나 밖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LA사람들 모두에게 오늘 공연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처럼.
“마지막 곡입니다! 남기지 말고 다 태우세요!”
수철의 공연 퍼포먼스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앨범의 주제에 충실하려는 듯 주도적으로 나서며 쉴 틈도 주지 않고 사람들의 흥을 계속 끌어 올렸다.
공연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흥겨움을 숨김없이 날것 그대로 다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이 자리를 기다려 온 사람들처럼 흥을 마음껏 내뿜으며 춤을 췄다. 2만여 명이 뿜어내는 흥이 어우러져 운동장은 화려한 퍼포먼스로 가득 찼다. 카메라는 공중에서 이 경이로운 장관을 선명하게 담고 있었다.
* * *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흥’을 만들어 낸 공연이었다는 기사가 많네요.”
레베카가 휴대폰을 살펴보다가 옆자리에 앉은 수철을 봤다.
쇼케이스 이틀 후, 수철은 레베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짬이 난 틈을 타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수철은 ‘흥’을 강조하는 기사가 재밌게 느껴졌다.
“우리와 똑같이 느끼긴 어렵죠. 기사를 봐도 Fun, Pleasure, Joy, Excitement. 같은 단어들을 쓰고 있으니까요. 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봐야죠.”“그것도 좋은 거 같아요.”
“…….?”
“흥이 원래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아, 네. 호호.”
레베카는 수철의 의미를 이해했다며 웃었다. 그러다 뭔가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아, 참! 어제 저녁때 ECM의 해리 이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수철 씨가 일정 중이라서 미처 말하지 못했어요.”“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쇼케이스 성공적으로 끝난 거 축하한다고요. 아, 그리고 대중의 귀 수준이 높아져서 가수들이 긴장하게 생겼데요. 호호.”
수철의 노래 때문에 사람들의 듣는 수준이 높아져서 가수들이 앞으로 힘들게 생겼다는 얘기였다. 음반사의 간부인 그가 농담 삼아 푸념을 늘어놓았다.
“해리와 영국 에이전시가 이번에 확실히 패배를 인정했어요.”
“그게 무슨……?”
“금별 기획이 한 수 위라는 것을요.”
이번 수철의 공연을 지켜본 제시 팀의 기획자들은 공연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프로모션에서도 금별 기획이 영국의 에이전시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인정했다. 조직력에서도 앞섰고, 공연 스케일에서도 앞섰다. 그들보다 금별이 미국에서 더 큰 홍보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정작 미국을 다루는 법은 금별기획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저기네요.”
브로드웨이에 도착한 수철은 안경에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AMERICAN RADIATE’를 관람하기 위해 레베카와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미국을 통일한 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바로 말이었습니다. 말들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연결하고 소통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훌륭한 역사적 사건이었을까요?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는 걸.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광야를 달릴 때부터 미국의 트라우마가 시작됐죠. 피의 역사가요.
작품은 수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생동감이 넘쳤다. 무대 위의 배우들과 극장을 울리는 사운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관객들의 표정에서 그걸 읽을 수 있었다. 스토리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수철은 뮤지컬만이 주는 매력이 분명 있다는 걸 느꼈다.
관객들과 소통하는 코드가 공연장이나 오페라하우스와는 달랐다. 훨씬 더 밀접하게 눈빛을 교환했고, 무대 위의 배우들은 관객의 표정을 다 읽는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무대와 관객의 호흡이 하나 되는 현장이었다.
규모에서도 콘서트장과는 차이가 나서 뮤지컬이 훨씬 밀도 있게 느껴졌다.
짝짝짝!
수철은 흐뭇한 얼굴로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제 확실히 하나의 작품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서 기뻤다. 마음 같아서는 꽃다발이라도 들고 가서 축하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몰래 들어갔다 몰래 빠져나오는 상황이었다.
“어땠어요?”
“좋았어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브로드웨이를 잘 아는 레베카는 수철의 느낌이 어떤지 알면서도 한 번 더 물었다. 수철은 만족한 얼굴로 끄덕였다. 수철의 반응에 만족한 레베카는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프로는 다르죠?”“네, 소문대로 잘하네요. 인기를 끄는 이유를 알겠어요.”
괜히 이름난 제작자와 배우들이 아니었다. 연기와 음악과 연출 3박자가 딱딱 맞아서 돌아가는 모습이 감동적일 정도였다. 사람들이 객석을 꽉 채우는 것은 당연했다.
* * *
“수고들 했어. 어서 와.”
수철은 흥의 나라라고 불리는 브라질 공연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선 건배부터 한번 할까?”
“건배!”
“브라보!”
박 대표는 하루 휴식을 취한 수철과 디데이 뮤직의 소속 아티스트, 그리고 직원 모두가 함께하는 파티를 벌였다. 성공적으로 끝난 공연을 축하하고 그동안 고생한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자리에 빠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다혜다.
“뭐? 아니, 어쩌다가?”“어쩌다가라니요?”
“아니, 어…… 그러니까 언제부터?”
수철에게 다혜가 빠진 이유를 들은 박 대표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