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25화 (225/239)

#225화. 한량

박 대표가 놀라는 이유가 있었다. 다혜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바로 박 대표의 후배이자 수철에겐 형인 영준이라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이.

박 대표는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수철은 둘 사이에 이상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불편할까 봐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둘 사이에 오가는 부드러운 시선, 급격하게 바뀐 다혜의 말투, 연습이 끝나면 눈치를 보다가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

수철은 둘이 사귀는 것보다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그래서 조심히 물었다.

―영준이 오빵.

코를 뚫어 주고 싶었다. 닭살이 돋아서 팔을 쓸어내렸다.

영준이 형이 다혜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쩐지. 다혜 녀석, 공연 끝나고 영국으로 간다고 할 때부터 이상했어. 하하, 전혀 예상을 못 했네. 예상이 아니라 상상도 못 했어. 가만있자, 둘의 나이 차가 몇이지………?”

박 대표는 뒤늦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손가락으로 둘의 나이 차를 꼽기 시작했다.

수철은 그런 박 대표를 황당한 눈으로 빤히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너무 놀라시는 거 같아서요.”“당연히 놀라지! 충격이잖아. 넌 안 놀랐어?”

“쌤.”

“뭐?”

“쌤도 만만치 않으세요.”

“내가 뭐?”

“쌤이랑, 윤 선생님이랑요.”“우린 뭐, 운명적으로……”

말을 하다가 멈췄다.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수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 통역해 주고 영어 가르쳐 주다가 그렇게 된 건가?”“그것도 있고, 다투다 정이 들었어요.”

“다퉈?”

“영준이 형이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해서 다혜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티격태격했었거든요.”“아, 하하. 싸움 정. 그거 무섭지, 특히 타지에서 기댈 곳이 없으면 더하고.”

박 대표는 마치 경험해 본 적이 있다는 듯 아련하게 말했다. 그리곤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러다 다혜를 제수씨라 부르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쌤은 저보다 낫죠.”

“……?”

“저는 다혜를 형수님이라고 부르게 생겼어요.”

“허…….”

* * *

짝짝짝!

“와― 멋있다!”

“우리에게도 드디어 이런 파라다이스가!”

디데이 뮤직의 새 건물이 드디어 완성됐다. 사람들은 박수치고 환호했다.

누군가는 건물 앞까지 달려가 두 팔을 벌리고 빙빙 돌며 좋아했고, 누군가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 정도로 새롭게 지어진 건물은 훌륭했다.

“자연과 잘 어우러져서 회사가 아니라 휴식 공간 같네요.”

회사 뒤편의 산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그랬고, 넓은 마당을 삥 둘러 서 있는 나무들이 그랬다. 거기에다 마당 한편에 서 있는 두 대의 카라반과 바비큐 시설은 일하다 나와서 캠핑 분위기를 느끼며 식사를 할 수 있고, 피곤하면 낮잠도 즐길 수 있다.

정원에 있는 육각형의 정자는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자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건물 뒤편에는 목조 건물로 만든 사우나와 그 앞으로 작은 수영장도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면 회사가 아니라 별장 아닌가요? 하하.”

누구는 캠핑장이라고 하고, 누구는 오버해서 파라다이스라는 표현까지 썼다. 어찌 됐건 모두가 마음에 드는 디데이 뮤직만의 공간이 드디어 완성됐다.

“정말 잘 지었네요. 마음에 들어요.”

넓은 마당에 서서 건물을 바라보는 수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박 대표도 옆에 서서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건물을 완성하고 조경까지 하니까 완전 예술작품 같지 않아?”“네, 그렇게 보여요.”

유명 건축가들이 디데이 뮤직의 컨셉을 잘 이해해서 설계한 게 주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이 넓고 나무가 많아서 멀리서 보면 공원 같더라고요.”“그 점이 매력이지, 나도 들어올 때마다 스트레칭도 하고, 한 번씩 크게 심호흡도 해. 그렇게 신선한 공기 잔뜩 마시고 나면 도시에서의 공해를 털어 버리는 느낌이거든.”

박 대표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지은 건물은 박 대표에게 하나의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박 대표는 오래전부터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업무는 서울에서 보고, 서울과 떨어진 한적한 곳에다가 뮤지션들만의 창작 공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땅을 구입할 때부터 신중에 신중을 기했고, 주변의 환경도 잘 살폈다. 자연과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땅을 사고 나서는 실력 있는 건축가와 상의하며, 생각했던 대로 이곳에 업무 공간만이 아니라, 창작공간, 연습공간, 녹음 공간, 휴식공간 그리고 산책 공간까지 만들었다.

“대표님, 축하드려요.”

짝짝짝!

“그리고 감사해요.”

사람들은 꿈을 이룬 박 대표를 축하하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소속 아티스트와 직원들을 아끼는 박 대표의 고마운 마음에 한 번 더 박수를 쳤다.

수철도 같은 마음이었다.

“쌤, 대단하세요.”

박 대표가 훌륭한 일을 했다는 생각에 양쪽 엄지를 치켜세웠다. 항상 감사하지만, 오늘은 그 느낌이 더했다.

오랜만에 수철에게 칭찬을 들은 박 대표는 입이 벌어졌다.

“이제 안을 좀 둘러볼까?”

수철을 건물 안쪽으로 이끌었다.

건물은 총 3동이다. 중앙에 5층짜리 메인 건물이 있고, 좌측으로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3층짜리 귀엽게 생긴 건물이 있다. 우측으로도 2층짜리 작은 건물이 하나 있다.

“이쪽이 회의실이고, 이쪽 3개 방이 사무실, 그리고 이쪽은 자료실, 그리고 이쪽은…….”

계단을 올라가자 2층에 넓은 업무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3층부터 5층까지는 전부 음악 공간이었다. 합주실과 악기 연습실이 있었고, 작업실과 보컬 연습실, 시청각 자료실도 있었다. 맨 위층에는 녹음실도 갖춰져 있어서 창작부터 녹음까지 원 스탭으로 다 할 수 있다.

“녹음 장비는 최고라고 보면 돼. 나중엔 마스터링도 여기서 할 수 있을 거야.”

박 대표는 필요하면 실력 있는 엔지니어를 섭외해서 마스터링까지도 진행할 생각이라고 했다.

역시 쌤.

수철은 다시 한번 엄지를 세웠다. 이제 이곳에 틀어박혀서 작업하면 돌아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매인 건물 좌측에 있는 3층짜리 아담한 건물을 가리켰다.

수철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저곳은 수철의 공간이다.

수철이 요청해서 만든 곳이다.

수철은 박 대표가 사 놓은 큰 부지를 보자마자 자신이 한국에 오면 작업하고 쉴 수 있게 공간을 하나 지어 달라고 했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서울을 다 정리하고 이곳으로 옮길 생각에서다.

박 대표도 수철이 한국에 오면 머물 공간을 하나 마련해 줄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물까지 짓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쌤, 이번엔 제 돈 받으셔야 해요.”

“허, 참.”

박 대표는 수철이 우겨서 돈까지 내놓자, 몇 번 고개를 젓고는 협상을 했다.

“대신 네가 없을 땐 다른 사람들도 쓰게 해 줘야 해.”

“콜!”

박 대표는 수철이 한국에 없을 땐 공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는 조건으로 수철의 뜻을 받아들였다. 덩그러니 건물을 비워 둘 수는 없어서다.

“역시, 잘 만드셨네요.”

건물에 들어선 수철은 공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박 대표가 자신의 취향을 고려해 곳곳에 넓고 큼직한 창을 많이 만들어서 햇볕도 잘 들고, 시원한 공기도 잔뜩 마실 수 있게 해 놓았다. 3층은 작업 공간, 2층은 침실과 거실, 1층은 휴식 공간과 주방. 모두 마음에 들었다.

“딱 제 스타일이에요.”

내부를 둘러본 수철은 박 대표에게 감사를 표했다. 세심하게 디테일을 잘 챙겨 줘서.

메인 건물 우측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은 박 대표의 공간이다. 서울로 가지 않을 때는 이곳에서 머물 생각으로 만들었다. 몇 개의 침실이 더 있어서 방문객이 머물 수도 있다.

“정말 아름답지 않아?”

박 대표는 특히 메인 건물의 1층 로비를 마음에 들어 했다. 회사의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며 연신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으시겠어요.”

“당연히 좋지!”

……?

박 대표는 대답하고는 수철을 힐끔 쳐다봤다. 수철의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철은 모른 척 시선을 피하면서 미소만 지었다.

건물 내부는 윤천화 미술가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

정면 벽에 크게 그려진 천재 음악가들의 뒷모습은 시선을 뗄 수 없어서 한참을 쳐다보게 했고,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몇백 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입구에 세워 놓은 하늘을 향해 휘파람을 부는 얼굴의 조형물은 보고 있으면 정말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그림들은 음악가의 창작욕을 고취시켰다.

엄청나신 분이야. 하하.

수철은 웃음이 났다. 수철의 공연이라면 빠지지 않고 찾아오던 윤천화 미술가가 공연 관람까지 포기하면서 공을 들인 흔적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박 대표의 말대로 내부 디자인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디데이 뮤직만의 상징이 녹아 있었다. 한번 방문한 사람은 잊지 못할 만큼.

그래서 수철은 박 대표가 윤천화 미술가의 작품을 보며 감탄하자 장난스레 대꾸한 것이다. 박 대표는 뒤늦게 그 뜻을 알아채고 눈을 흘긴 것이고.

“쌤, 정말 아름다운 것 맞아요.”

“……그치?”

“네, 특히 눈웃음이 정말 아름다우세요.”

수철은 좋아라 하는 박 대표를 보며 한 번 더 장난을 쳤다.

“뭐? 이 녀석이!”

박 대표는 주먹을 쥐었다 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으로도 수철이 틈만 나면 장난을 칠 거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괜히 재미 삼아 장난을 쳤지만, 수철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윤천화 미술가의 손길이 닿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박 대표의 이번 신축 건물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한 가지 오점만 빼고.

“쌤, 사우나 앞에 수영장 있잖아요?”

“응, 거기 뭐?”

“낙엽이 잔뜩 쌓여 있던데, 청소는 누구의 몫일까요?”

한참을 생각하던 박 대표는 손을 들어 올렸다.

“가위바위보 해서 정할까?”

* * *

신축 건물로 이사 온 후로 수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곳에 처박혀 한량처럼 지냈다.

정자에서 낮잠을 자다가 직원들이 퇴근하면 고기를 구워 주며 바비큐 파티를 벌였고, 밤새도록 카라반에서 하준과 잡담을 하기도 했다. 나무 사이에 해먹을 걸어 놓고 독서를 하다가 괜히 부랑자처럼 트레이닝바지에 손을 집어넣고 마당을 서성이기도 했고, 온종일 개들과 뛰어다니고 고양이와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음악 빼고는 다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어느 직원의 말처럼 딱 그랬다.

“심심하면 수영장에 낙엽이라도 좀 치우지?”

수철이 자꾸 직원들과 소속 뮤지션들을 불러내서 일정에 차질을 주자 박 대표는 핀잔까지 줬다.

수철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공연도 브라질 공연이 마지막이었다.

회사에서는 수철이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니까 들어오는 제안이나 다른 일정에 관한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말만 꺼내도 손을 저을 게 뻔했다.

“그래도 수철 씨가 공간 활용도는 제일 높은 거 같아요.”

수철의 모습을 재밌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회사 곳곳에 있는 모든 공간을 활용하고 있으니까.

“하하, 그런 거 같네요. 그런데 수철 씨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거 같아요.”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 유럽에서는 올해 시상식에서 수철의 음악이 몇 개 부분의 후보에 오를지, 어떤 상을 수상하게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평론가들은 각자의 예상을 내놓으며 논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남의 일. 수철은 마치 그들의 기대를 배반이라도 하려는 듯 음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있었다.

마치 그동안 다 써 버린 에너지를 비축하려는 듯이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살았다.

“부럽다.”

“멋있어요.”

누군가는 부러워했고, 누군가는 멋있다고 했다.

어찌 됐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는 그들의 관심사일 뿐, 수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게 수철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날은 몇 달 동안 이어졌고, 가끔 박 대표를 따라 밤낚시를 가는 것 외에는 밖에도 잘 나가지도 않더니.

헉!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지게 했다. 수철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막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너, 그, 그게 무, 무슨 꼴이야!”

박 대표는 놀란 눈이 잔뜩 커져서 손가락을 내민 채 말까지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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