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26화 (226/239)

#226화. 여행자 수철

“왜요? 헤헤.”

수철은 사람들의 놀라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냐고? 머리가 그게 뭐야? 안경은 또 뭐고?”

박 대표 앞에 서 있는 수철은 빡빡머리였다. 느닷없이 머리를 다 밀고, 여태까지 한 번도 안 쓰던 안경까지 쓰고 나타났다.

“어때요? 못 알아보겠죠?”

탐정 놀이라도 할 생각인지 손에 든 모자를 눌러 쓰더니 얼굴을 좌우로 돌리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의도로 저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우리가 모르는 여자 친구가 있었나?

그리고 실연을 당해서 저러는 건가?

사람들은 갖가지 상상을 하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수철은 사람들의 모습과 상관없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수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던 박 대표는 황급히 자신의 사무실로 수철을 끌고 들어갔다.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소파에 마주 앉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긴요, 아무 일도 아니지.”

수철은 박 대표와 달리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직 어색한 까까머리를 손으로 한번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제 건물 다른 사람이 써도 돼요.”“그건 또 무슨……?”

“떠날 거거든요.”

“뭐?”

박 대표는 여러 번 놀라고 있다. 시선을 고정한 채 미간을 좁혔다. 수철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한 바퀴 휙 돌고 오려는 거니까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박 대표는 표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물었다.

“……돌고 오다니? 어딜?”“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어요. 우선 동남쪽부터 가 보려고요.”“동남쪽이면……?”

“베트남이요.”

“베트남?”

박 대표는 다시 미간을 좁혔다. 베트남에 뭐가 있는지 떠올리려고 집중했다. 그런데 딱히 음악과 관련지을 만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베트남에 뭐가 있는데?”“저도 몰라요. 가서 알아봐야죠. 뭐가 있는지.”“허허, 그걸 왜 알아봐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뜬금없이 베트남을 가서 뭐가 있는지 알아보겠다니, 무슨 여행사 가이드 같은 말로 들렸다. 하지만 수철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궁금해서요. 거긴 어떤 나라인지, 어떤 사람이 사는지.”

음,

박 대표는 기울였던 몸을 세우고 잠시 바라봤다.

“노르웨이처럼 작업하러 간다는 말이 아니잖아?”“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보려고요.”

진짜 역마살이라도 낀 건가?

박 대표의 눈에 수철이 세상을 떠도는 집시처럼 느껴졌다. 다시 히피가 되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일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얼마나 있다가 오려고?”“모르겠어요. 가 볼 나라가 많으니까 몇 년 걸릴 수도 있겠죠?”“몇 년? 허, 허허. 몇 년이라니…….”

반쯤 정신이 나간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

“…….”

둘은 대화 없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박 대표는 음악가인지 여행가인지 모를 수철의 말에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웠고, 반대로 수철은 그런 박 대표를 보며 까까머리를 긁적였다.

수철이 박 대표의 물음에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건 이런 상황이 어색해서다. 상의도 없이 혼자서 결정하고 통보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깔려 있다. 하지만 꼭 떠나야 한다. 머릿속에 흐트러져 있는 생각들을 구체화하려면. 박 대표도 나중에 알게 되면 등을 두드리며 잘했다고 말해 줄 거라 확신했다.

“네가 갑자기 집시처럼 보인다.”

눈싸움에서 진 박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집시처럼 살아 보려고요.”

“허.”

“…….”

“역마살이 꼈다는 말 알아?”“네, 제가 딱 지금 그런 상황이죠.”

“…….”

* * *

“잘 지내고 계세요.”

수철은 그 말을 끝으로 한국에서 사라졌다.

아무도 수철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통화하기도 어려웠다. 박 대표조차 그랬다. 문자를 보내도 한참 후에야 답장이 왔다. 왜 답장이 늦었냐고 물으면 핸드폰을 쓰지 않아서 그렇다는 답장이 또 며칠 만에야 날아왔다.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할 무렵에야 달랑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보냈다.

알프스산맥의 어느 도시일 때도 있었고, 안데스산맥의 어느 도시일 때도 있었다. 아프리카의 야생동물이 보일 때도 있었고, 남극의 펭귄이 보일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사막을 걷고 있었고, 어떤 때는 눈 위를 걷고 있었다.

―여기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같은데요?

―여기는 칠레 이스터섬(Easter Island)이네요. 저쪽에 모아이(Moai) 석상이 보이잖아요.

―아, 저 여기 알아요. 배낭여행 가 본 적이 있거든요. 여기는 앙코르와트(Angkor Wat)가 확실해요.

사람들은 수철이 한 번씩 보내오는 사진을 보며 어디에 있는지 추측하는 것에 재미를 붙여 가고 있었다.

―와, 부럽다. 인도에, 체코에, 이집트에, 수철 씨는 역시 멋있어.

황당해하던 사람들은 어느덧 부러운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빡빡이였던 수철의 머리는 점점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뮤지션이라기 보단 장거리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다듬지 않아서 고무줄로 대충 동여맨 긴 머리, 꽤 덥수룩해진 수염.

그런데도 신기하게 수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여기저기서 수철을 봤다는 목격담이 무성했다.

“이젠 여행자가 아니라 순례자처럼 보이네요.”“그러게요. 순례길을 걷는 것 같아요.”

여행자인지 고행을 하는 종교인인지 모를 수철의 모습을 따라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재밌는 건 그 와중에도 수철의 영향력은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커지고 있었다.

오페라는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있고, 뮤지컬은 브로드웨이를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로 역수출되고 있었다.

“AMERICAN RADIATE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데요?”

라이온킹이 애니메이션 원작을 뮤지컬로 만들었다면, 이번엔 뮤지컬 ‘AMERICAN RADIATE’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들어왔다.

거기에다 교향곡 ‘누군가 사과를 깨물었던 순간부터’는 풍성한 이슈를 몰고 다니더니 급기야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예술의 나라답게 다양한 시도가 벌어지는군.”

수철이 선물한 작품이니까 수익을 기대할 순 없지만, 수철의 명성이 계속 높아지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녀석, 이번엔 또 어딜 간 거지?”

계속되는 즐거운 소식에 기분이 좋다가도 수철이 보내오는 사진을 보면 웃음이 멈췄다.

수철은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혼자서 딴 세상에 살고 있었다.

* * *

“꽃이 피는 거 보니까 벌써 이 년이 지났네.”

수철이 떠난 후 두 번째 맞는 봄, 이 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눈 덮인 산장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진이 한 장 날아왔다. 그리고 곧이어 전화가 울렸다.

―쌤, 잘 지내고 있죠?

“허허, 너, 참. 진짜. 목소리 까먹겠다.”―하하, 제 목소리가 그리우셨나 봐요?

수철은 한참 만에 전화를 하고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사진은 뭐야? 작업을 시작한 거야?”

박 대표는 퉁명스럽게 물으면서도 오랜만에 수철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을 보니 내심 기뻤다. 그동안 느꼈던 것을 드디어 앨범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앨범 제목은 ‘영웅과 쏟아지는 평화’로 정했어요.

“영웅과 쏟아지는 평화?”―네, 자세한 건 이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가사를 보면 무슨 뜻인지 금방 아실 거예요. 나중에 음악을 들어 보셔도 알 테고요.

“그래, 알았어. 내가 도와줄 건 없고?”―레베카가 이곳에 왔으면 좋겠어요.

“레베카?”

―네, 레베카가 할 일이 좀 있거든요.

* * *

“그래서 레베카가 캐나다로 간 거예요?”“그래, 그렇다니까?”

“하하, 재밌네요.”

이 부장은 박 대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얘기에 비해 박 대표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우린 별로 재밌지가 않아. 수철이 점점 종잡을 수 없어지고 있어.”“원래 그랬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거 같아. 진짜 역마살이라도 낀 건지.”

박 대표는 시선을 장작불에 둔 채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잠시 멍하니 불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 후에 출발한다고?”

“네.”

이 부장은 이사 진급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영국의 지사장으로 가게 됐다. 그래서 박 대표와 모처럼 시간을 보내려고 가족들과 함께 디데이 뮤직으로 놀러 왔다.

“애들도 같이 출발하는 건가?”

박 대표는 마당에서 강아지들과 놀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봤다.

“제가 먼저 가고, 와이프랑 애들은 3개월 뒤에 올 거예요. 여기서 정리할 게 좀 남아서요.”

“그렇군.”

둘은 대화를 멈추고 장작불을 바라봤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미래에 대한 아쉬움을 불빛에 녹였다.

참 많은 일이 있었고, 큰 도움이 됐었는데.

박 대표는 타오르는 장작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부장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근 몇 년은 어느 때보다 바쁘게 지나간 시간이었다.

“수철은 그동안 어디를 그렇게 다녔데요?”

조용한 분위기를 깨며 이 부장이 입을 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가끔 보내는 사진으로 예상만 할 뿐이지.”“어쨌든 세계를 돌아다닌 건 맞고요?”

“응.”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자작자작 나무 타는 소리와 멀리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만이 들렸다. 말은 하지 않아도 둘은 다시 몇 년간의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시선은 불빛에 고정한 채.

이번엔 박 대표가 먼저 입을 뗐다.

“수철이 떠나기 전에 그런 말을 하더라고.”

“……?”

“다른 사람의 얘기를 음악에 담고 싶다고.”

“…….”

이 부장은 생각에 잠긴 듯 대꾸 없이 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 대표는 혼자 독백하듯이 시선을 장작불에 둔 채 말을 이었다.

“음악이 필요한 사람들을 많이 봤대,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그래서 여행을 떠난 건가요?”

“그런 거 같아.”

박 대표가 천천히 끄덕였다.

이 부장은 꼬챙이로 삐뚤어진 장작을 툭툭 치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죠?”

“뭐가?”

“음악이 필요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는 말이요.”“모르겠어. 나도 그걸 물어봤는데, 정확히 말하지 않더라고. 단지 그걸 더 알기 위해서 긴 여행을 떠나는 거라고. 그래서 지구를 전부 돌아다닐 생각이라고. 그렇게만 말하더라고.”

“…….”

이 부장은 말없이 장작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그러자 붉은 재가 치솟았다. 고개를 급히 돌려서 피하고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다시 장작을 집어서 올려놓았다.

박 대표는 얼굴에 검정이 묻은 모습을 보며 피식 웃다가 휴대폰을 꺼내 뒤적였다. 뭔가 찾아서 이 부장 앞에 내밀었다.

“이것 봐 봐.”

이 부장은 휴대폰 가까이 눈을 붙였다.

“수철이에요?”

“그래, 집시 같지 않아?”“하하, 진짜 그러네요. 머리에 띠를 두른 것 보면 히피 같기도 하고.”

둘은 수철이 보낸 사진을 돌려보며 킥킥댔다. 세상은 수철의 얘기로 떠들썩한데, 정작 수철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모습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다 보여 주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박 대표는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지 혼자 배시시 웃다가 입을 열었다.

“흐흐,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어.”

“……?”

“수철의 악몽에 관해서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그게 기억에 남았는지 글쎄 나도 그날 밤 비슷한 악몽을 꾼 거야. 하하.”

“네? 진짜요?”

“응.”

“하하, 재밌네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이 부장은 미소를 머금으며 박 대표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 박 대표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며 천천히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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