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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돌아왔다-227화 (227/239)

#227화. 닮은꼴

“내가 꿈속에서 수철에게 소리치고 있더라고.”

“뭐라고요?”

“‘네가 노래에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죄악이야! 그런 재능을 혼자만 갖고 있다가 소멸시키는 건, 재능을 준 신에게도 배신이라고! 재능을 즐길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에게도 배신이고!’”

“하하, 진짜요?”

박 대표가 뮤지컬의 대사를 읊듯이 말하자 이 부장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 내가 수철에게 버럭버럭하고 있더라니까?”“하하, 재밌네요. 예전 형님 별명이 버럭 박 대표…….”

“…….”

“어쨌든 진심이 튀어나온 거네요?”“나도 그게 헷갈렸어. 난 항상 수철을 중심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꿈을 꾸니까 정말 내가 다른 본심이 있는 건가? 의문이 들더라고.”

그 말에 이 부장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꿈은 꿈일 뿐이죠. 형님이 그럴 리가요. 형님은 항상 수철의 편이잖아요.”

“…….”

“그 얘기는 제 본심 같아요. 제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거든요.”

이 부장이 옆에서 본 박 대표는 항상 그런 모습이었다. 수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반대로 이 부장은 수철의 재능을 질투한 적이 있었다. 한때는 그랬었다. 수철이 딱딱하게 굴 때는.

“아직 대사가 다 끝난 게 아니야.”

“……?”

박 대표는 마치 이 부장의 훈훈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이 꿈속에 남은 대사를 읊었다.

“‘내가 느끼는 더 큰 배신감이 뭔 줄 알아? 바로 허탈감이야! 그런 재능을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허탈감 말이야! 네가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

“…….”

“그게 바로 배신이라고! 넌 모를 거야! 얼마나 그런 재능을 갖고 싶어 하는지!”

이 말에는 이 부장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건가?

어쩌면 이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심일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박 대표는 장작불이 줄어들지 않게 굵은 장작을 쪼개서 집어넣었다. 이 부장은 박 대표가 꿈속에서 한 말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박 대표는 그 모습을 힐끔 보고는 다시 입을 뗐다.

“수철이 그러더라고, 날 만난 게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하하.”“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박 대표는 그런 악몽을 꿨음에도 현실의 수철은 다르게 말하더라는 상반된 뉘앙스로 얘기한 건데, 이 부장은 박 대표의 말에 즉각 동의했다. 자기도 수철과 같은 생각이라며.

박 대표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사실 행운은 나지. 내가 수철을 만나서 결핍을 다 해소했으니까.”

박 대표의 눈동자에 불타는 장작이 비쳤다. 그 말뜻을 아는 이 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악가와 제작자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어느 한쪽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박 대표, 그동안 회사를 거쳐 간 뮤지션들에게 미안하다며 몇 번 술자리에서 그 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수철을 통해서 번듯한 회사, 잘나가는 회사의 대표가 됐고, 어느덧 회사는 박 대표가 손을 떼도 잘 돌아갈 정도로 성장했다. 그래서 박 대표는 이제 하고 싶었던 음악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새롭게 미래로 발을 내디딜 원동력이 생겼다.

이건 굳이 박 대표가 말하지 않아도 수철로 인해서 생긴 변화라는 걸 이 부장은 잘 알고 있다.

“정말 행운이야. 그래서 감사해, 수철에게.”

진심이 담긴 박 대표의 톤이 이 부장의 가슴을 건드렸다.

이 부장은 그런 박 대표의 옆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활활 타는 장작불에 그의 눈동자도 불타고 있었다.

“부럽네요, 형님이랑 수철.”

이 부장의 말이 조용히 박 대표의 귓가를 맴돌았다.

―장작 필요하지 않으세요?

불멍을 하며 감성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가슴엔 한 아름 장작을 들고 있었다.

“친절하네? 장작까지 다 챙겨 주고?”

박 대표는 그 청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제가 원래 좀 친절하죠.”

청년은 손을 툭툭 털며 시크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구예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 부장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하하, 재밌는 녀석이야. 사연이 좀 있어.”

박 대표는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근데, 누구랑 비슷하지 않아?”

“……누구요?”

“못 느꼈어?”

“네.”

이 부장이 고개를 젓자 박 대표는 바로 뒤로 돌아서 손을 흔들었다.

“인탁아! 유인탁!”

박 대표가 소리치자 아까 그 청년이 다시 뛰어왔다.

“왜요?”

귀찮게 왜 자꾸 부르냐는 얼굴이었다.

“장작이 너무 두꺼워, 좀 쪼개서 갖다줄래?”

“네?”

장난치냐는 표정이었다.

“친절하게 시작했으면 끝까지 친절해야지. 넌 선생님한테 잘해 줘야 하는 상황 아냐?”

“흥.”

청년은 잠시 박 대표를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두꺼운 장작을 집어 들고는 콧바람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거치네요?”

“반항기가 가득하지.”

“몇 살인데요?”

“17살, 청년처럼 보여도 아직 청소년이야.”

“그럼, 고등학생?”

“학교를 다니는 건 아니고.”“아……. 그런데 형님을 왜 선생님이라고 불러요?”“내가 가르치고 있으니까.”

박 대표는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이 부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때 인탁이가 쪼갠 장작을 들고 와서 툭 던져 놓고는 다시 말없이 사라졌다. 여전히 얼굴엔 반항기가 가득했다.

그래도 박 대표는 귀여운 눈으로 사라지는 인탁을 바라봤다.

“어때? 이제 생각났어? 누구랑 비슷한지?”

“글쎄요……?”

“눈빛을 생각해봐.”

“……어, 어어?”

“하하, 그래. 닮았지?”“네, 그러네요. 예전에 수철이랑 닮았네요.”

외모는 다른데 눈빛은 확실히 오래전의 수철과 닮아 있었다. 수철을 처음 봤을 때의 눈빛이 딱 저랬었다. 날카로우면서도 시크한. 거기에다 무심하면서도 뭔가 비웃는 듯한 미소까지. 모두 닮은 것 같았다.

순간, 이 부장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혹시 저 친구도……?”“수철과 같은 재능이 있냐고?”

“네.”

박 대표는 이 부장이 뭘 궁금해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기대를 깨고 고개를 저었다.

“하하, 전혀 아니야. 완전 반대야.”“반대요? 재능이 없다는 얘긴가요?”“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슬아슬해.”

“아슬아슬?”

“음치, 박치. 경계선에 서 있거든.”“아, 하하. 저랑 비슷한 친구군요.”

이 부장은 호기심이 생기는지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인탁을 슬쩍 한번 쳐다봤다.

“대체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거예요?”“사연이 좀 있지. 처음엔…….”

인탁은 디데이 뮤직에서 좀 떨어진 민가에 살고 있었다. 할머니와 둘이서.

디데이 뮤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인탁은 어느 날 대뜸 찾아와서 알바 할 거 없냐고 물었다.

직원들은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다 등 떠밀어서 돌려보냈다. 알바 할 게 없다고.

“그런데 다음 날 또 찾아온 거야. 자기도 노래하고 싶다고, 앨범 내고 싶다고.”

“하하. 그래서요?”

“그래서 윤 팀장은 또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우리 회사는 그럴 계획이 없다며 정중히 거절하고 돌려보냈지. 또 찾아올까 봐 말이야. 하하.”

“하하.”

그런데 인탁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찾아왔다. 여름에는 땀을 흘리고 서 있고, 장마에는 비를 맞고 서 있고.

―미치겠네, 신고할 수도 없고.

직원들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던 어느 눈 오는 날, 결국엔 할머니까지 지팡이를 집고 찾아오셨다. 꾸부정한 허리, 머리에 하얀 눈을 얹은 채로.

이 모습을 본 박 대표는 황급히 할머니를 모셔서 차를 대접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참 불쌍한 아이예요. 우리 인탁이는…….

할머니는 인탁의 부모님에 대해서, 자라 온 환경에 관해서 얘기하며 눈가의 눈물을 훔치셨다. 그리고 주름진 손으로 박 대표의 손을 꼭 잡았다.

―선생님이 좀 도와주세요.

쭈글쭈글한 눈가에 다시 간절함의 눈물이 고였다.

박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일 년만 돌봐 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꾸부정한 허리를 연신 숙였다.

박 대표는 가까우니까 알바도 시키면서 검정고시도 보게 하고, 상황을 봐서 좋아하는 음악도 좀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보니까 어머니 생각도 났고 걱정을 좀 덜어드리고 싶었다.

―대신 너, 술 담배 끊겠다는 조건이야!

―…….

―싫어? 싫으면 지금이라도 나가.

―알았어요, 끊으면 되잖아요!

녀석이 되레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가 그렇게 걱정하시는데 죄송하지도 않아?

―…….

박 대표는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녀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에.

그날부터 인탁은 디데이 뮤직에 둥지를 틀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공간 활용을 했고, 시키지 않아도 비질을 하고 수영장도 청소했다.

물론 꼬박꼬박 알바비를 줘야 했지만.

그리고 재밌는 건 그렇게 간절하게 들어오고 싶어 하더니 막상 받아 주니까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다.

―야, 인탁! 멋있는 유인탁!

―아, 왜요?

―좀 친절하게 대해 줘. 누나는 잘생긴 너의 친절한 모습을 기대한다고.

―그런 건 남자 친구한테나 기대하세요. 저한테 기대하지 말고.

직원들은 인탁을 좋아하면서도 한 가지가 불만이었다. 계속 퉁명스럽게 대한다는 것. 그래서 친절하게 대해 달라는 한마디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건 박 대표도 마찬가지고.

누구나 다 겪어 본 사춘기, 혹은 반항기.

사람들은 그걸 알기에 거칠게 굴지만 모두 인탁을 좋아했다. 할머니를 걱정하는 속마음도 알게 됐고, 의외로 의리가 넘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박 대표는 긴 얘기를 마치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 수철이랑 닮았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비슷한 구석이 많아. 분위기도 그렇고.”“가시가 많지만 친해지면 뜨거운 그런 거요?”“하하, 맞아. 바로 그런 거.”

이 부장이 잘 안다는 듯이 말하자 박 대표는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 부장이 그렇게 말한 건 자신이 수철을 처음 봤을 때 그랬기 때문이다. 금별기획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수철, 그래서 날이 서 있던 수철.

이 부장은 그때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 * *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어디 봐 봐요.”

레베카는 눈 덮인 산장에서 수철의 가사를 번역하고 있었다.

수철이 레베카를 요청한 건 베스트 앨범 때문이었다.

지난 두 장의 앨범에서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몇 곡과 이번에 발표할 앨범의 몇 곡을 섞어서 약속했던 것처럼 베스트 앨범을 만들 생각이다.

번역은 수철이 초안을 만들어 놓으면 레베카가 수정하고, 같이 토론하며 재수정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그만큼 한국 가사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면서 수철은 새로운 앨범에 대한 작업도 계속 이어 갔다.

수철이 새로운 앨범 ‘영웅과 쏟아지는 평화’의 작업을 하는 동안 레베카는 새로운 앨범의 영어 가사도 계속 완성해 갔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작업에 집중했다.

이번 앨범은 멤버들이 모여서 녹음을 하지는 않는다.

수철이 작업한 데모를 보내면 멤버들이 악기를 녹음해서 다시 보내고, 수철은 거기에 맞춰서 노래하고, 믹싱하고 마스터링 해서 최종본을 다시 보낸다. 그러면 디데이 뮤직은 그걸 받아서 앨범을 만들고, 플랫폼에 음원을 노출한다.

앨범 제작에서 유통까지 서로 얼굴을 볼 일이 없는 상황이다.

* * *

“정말 혼자 온 거야?”

박 대표는 혼자 덩그러니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 레베카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레베카가 혼자 출발할 거 같다고 했을 때 박 대표는 웬만하면 수철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다시 나가더라도 잠시 한국에 왔다가 가라고 수철을 직접 설득했었다. 그런데 덩그러니 레베카 혼자 돌아왔다.

“대표님 말씀도 안 통하는데, 제 얘기가 통할 거라 생각하신 거예요?”

레베카는 오히려 박 대표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박 대표가 묘한 미소를 띠었다.

“레베카가 괜찮다고 등 떠민 건 아니고?”“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눈을 크게 뜨고 되묻는 레베카를 보며 박 대표는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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