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원래 그의 것
앙상하게 갈비뼈가 드러나 있는 아이들, 팔다리가 없는 아이들, 총을 메고 있는 아이들. TV에서 보던 모습보다 더 적나라한 사진들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들 때문에 휘청거린 것은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사진들 사이에서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한껏 웃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
세 개밖에 없는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몇 개 없는 치아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철의 음악에 등장하는 바로 그 아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사진은 박 대표의 가슴을 더 두드렸다.
‘제 꿈은 비행기 조종사예요.’
플래카드를 들고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를 세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가 메고 있는 흙탕물이 담긴 항아리와 파란 하늘의 비행기는 대조됐다. 꿈과 현실처럼. 아이는 지독한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 아이의 꿈이 비행기 조종사인 이유는 엄마를 태우고 날아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수철이 알려 줬다.
박 대표는 보기만 해도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천사처럼 웃고 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문명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얼굴엔 불만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이 대비되며 떠올랐다. 세상이 이래도 되나,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 아이가 엄마를 태우고 날아가고 싶은 곳이 어딜까.
박 대표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다시 수철과 통화했다.
“네 뜻대로 할게, 그리고 디데이 뮤직과 나도 참여하겠어.”
박 대표는 수철의 뜻을 받아들이고, 같이 동참하기로 했다. 회사도 이 앨범에 관한 수익은 한 푼도 가져가지 않고 모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 *
“레베카! 어서 가자고!”
마지막 사진을 본 박 대표는 소리쳐 레베카를 부르고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마지막 수철이 보내 온 사진은 봉안당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계신.
수철은 짐도 풀지 않고 봉안당에 가 있었다.
그곳에서 기나긴 여행의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엄마 아빠에게 귀국 보고를 하면서.
“그럴 만도 하지. 3년이나 못 뵀으니.”
봉안당에 도착한 박 대표와 레베카는 멀리서 엄마 아빠의 사진 앞에 서 있는 수철의 모습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수철과 반가움을 나누기 전에 묵념부터 했다.
―이제 자주 올게요.
수철은 꽃을 갈아 드리고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쌤, 잘 지내셨죠?”
수철은 그제야 박 대표와 눈을 맞추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네 덕분에 잘 지냈다. 녀석, 하하.”
박 대표는 3년 만에 돌아온 수철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미소를 머금었다.
수철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고, 살이 빠진 탓에 앙상한 느낌도 들었지만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밝았다. 건강해 보였다.
어딘가 성숙해진 느낌도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눈빛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사물을 보는 시선이 깊어진 것 같았다.
* * *
―수철 씨!
수철이 돌아오자 직원들이 모두 달려 나왔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환영합니다!”“하하, 감사합니다. 실장님, 잘 지내셨죠?”
수철이 정 실장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자 뒤따라 나온 다른 직원들도 뒤에서 수철을 반겼다.
“와! 수철 씨. 와! 와!”“하하, 다들 잘 지내셨어요?”
사람들은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하기도 하고 팔을 흔들며 환호성을 내기도 했다. 모두가 돌아온 집시 수철을 환영했다.
“3년 동안 머리를 안 자른 걸까요? 땋거나 묶어도 될 정도인데요?”“대표님 말씀처럼 영락없는 집시의 모습이야.”“그래도 여전히 멋있네요.”
“내 말이.”
수철은 회사의 사우나에서 몇 시간 땀을 빼더니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가 며칠간 잠만 잤다. 몇 년 동안 밀린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변한 게 많네요?”
푹 휴식을 취한 수철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햇살을 맞았다. 정원을 거닐고, 마당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그동안 변한 모습을 살펴봤다.
수철이 없는 동안 카라반도 한 대 더 늘어 있었고, 못 보던 넓은 식탁과 거대한 파라솔도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과일나무들도 마당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안 변하면 이상하지. 3년이나 지났는데.”
같이 마당을 걷던 박 대표는 수철이 집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처럼 느껴졌다. 따라다니며 변한 모습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 줬다.
“직원분도 몇 명 더 늘어난 거 같던데요? 못 봤던 얼굴이 있더라구요.”“세 명 더 늘었지. 소속 뮤지션도 두 팀 더 늘었고.”
“아…….”
“지금은 공연 중이라 자리를 비웠지만, 나중에 돌아오면 보게 될 거야.”
수철이 없는 동안에도 회사는 계속 성장했다. 수철은 박 대표와 같이 산책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철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니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여기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박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빠져 있던 퍼즐의 큰 조각 하나가 제자리를 찾아서 딱 맞춰진 느낌이었다. 수철은 디데이 뮤직에서 그런 존재였다. 박 대표에게도.
서로를 보는 둘의 시선이 편안해 보였다.
* * *
“너도 알고는 있어야지. 나한테 다 맡겨 놓고 있다고 해도 말이야.”
오랜만에 수철과 야외로 나가서 점심을 즐기던 박 대표는 ‘오, 신이시여!’ 앨범의 저작권료를 포함한 수익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수철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장 크게 지출되는 곳은 월드비전이야. 30%가 그곳으로 가지.”
박 대표는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어떤 재단에 기부하고 어떤 식으로 매달 지출하는지 설명했다.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게 별도로 페이지를 만들어 놨어. 이런 일은 투명하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
기부금 지출 내역을 당사자가 언제든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해 놓았다는 말이었다.
이번 앨범의 수익이 워낙 많다 보니까 재단을 만들어서 운용하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도 나왔었다. 그러는 쪽이 여러 가지 사회적인 혜택도 많고, 선한 영향력을 펼치기에도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수철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재단이 존재하고 있기에 활용 가치를 높이는 게 중요하지, 자신의 이름까지 걸고 재단을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건 자신에게도 어울리지 않다. 아이들을 돕고 싶은 거지, 내세워서 사업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박 대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일이 얼마나 전문성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수철과 회사는 돈을 내놓기만 하고, 실행은 오랫동안 그 일을 해 온 경험 많은 단체가 하는 게 맞다. 많은 돈을 내놓는다고 해서 굳이 자신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
“지금은 디데이 뮤직 전 직원과 소속 뮤지션들도 다 동참하고 있어. 개별적으로 말이야. 그래서 후원하는 아이들과 편지도 주고받고 있고.”
듣기 좋은 얘기였다. 수철이 기부를 시작하자 전부 동참한 것이다. 적게는 세 명에서 많게는 열 명까지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쌤, 안 그래도 상의드리려고 했었는데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릴게요. 제가 칠레에서…….”
수철은 흐뭇한 얼굴로 박 대표의 얘기를 듣다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갸웃하며 수철의 얘기를 듣던 박 대표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뭐? 저작권을 통째로 넘기겠다고?”
박 대표는 수철을 빤히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수철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네, 그랬으면 해요. 감독님께 보탬이 되고 싶어서요.”
수철은 칠레 여행 중에 필립 윤을 만났었다. 마침 필립 윤이 그곳에서 촬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찾아갔었다.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의 침략으로 사라진 칠레의 한 부족과 기후 변화로 사라져 가는 남극의 한 생명체를 연결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 생명체는 바로 펭귄이었다. ‘침략’이라는 키워드로 몇백 년 사이의 역사를 연결하고 있었다.
―부족은 이미 멸종되었고, 펭귄들은 멸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차이점만 있죠.
두 사건 모두 결과는 멸종이라는 얘기였다. 섬뜩한 얘기였다. 직접적으로 작품에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인간의 멸종을 암시하고 있었다. 수철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필립 윤과 진지하게 이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지금은 촬영 중이라서 길게 시간을 뺏을 수는 없지만.
―쿠바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수철은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물었다. 얼마 전까지 쿠바에서 촬영한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칠레에 있는 게 신기해서다.
―한국인의 발자취를 좇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죠. 멕시코에 갔다가 쿠바로 간 한 가족이 있었는데, 그 가족이 이곳 칠레까지 흘러들어 왔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지금의 이야기로 연결됐어요. 이 영화의 도입부에 그 가족의 얘기가 나와요.
수철은 필립 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탐험가 같기도 하고, 역사학자 같기도 했다.
레디― 액션!
수철은 대화가 끝나고 필립 윤이 촬영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그때 문득 필립 윤이 또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한 길을 놔두고 수철이 처음 봤을 때의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중적인 흥행을 기대하지 않는, 그래서 아무도 투자하지 않는 그 길.
사람들은 여러 영화제에서 명성을 얻은 감독이 왜 그런 길을 가느냐고 질타할 수도 있겠지만 수철은 필립 윤의 마음을 잘 안다. 그런 욕구는 스스로도 막을 수 없다. 그건 창작자의 운명 같은 거다.
힘든 길을 가지만 얼굴이 밝은 이유가 그런 거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살고 있으니까.
감독님은 왜 그러시지?
사람들 말을 듣고 대중을 따라가시지, 왜 고집스럽게.
한편으로는 웃음도 났다.
동질감의 웃음이었다.
뭔가 도움이 돼야 할 거 같은데.
수철은 발걸음을 돌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여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었다. 그러다 저작권이 떠올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작사로 받는 저작권료도 꽤 많을 텐데?”
사라 제이의 가사로 받는 저작권료가 많을 거라는 얘기였다. 수철이 작곡으로 많은 저작권료를 받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되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그걸 다 영화에 집어넣고 계신 거 같더라고요.”
음,
“저작권료가 많다고 해도 영화 제작까지는 무리지. 자금난에 시달릴 수 있을 거야.”
박 대표도 수철의 의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네, 그래서 필립 감독님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고 싶어요.”“작곡 저작권을 양도해서?”“네, 사라 노래는 영국에서 등록했으니까 저작권을 넘길 수 있다고 들었어요.”“그건 그렇지만…….”
사라 제이가 부른 ‘To be near you’는 그녀의 영향력 덕분에 아직도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여전히 많은 돈이 매달 작곡 저작권료로 들어오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곡 한 곡만으로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박 대표는 망설였다. ‘오, 신이시여!’ 앨범은 처음부터 기부 의도를 갖고 만들었기에 주저 없이 수철의 뜻을 받아들였지만, 이번은 조금 다르다.
수철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필립 윤 말고도 세상엔 그런 예술가가 많다.
돈을 떠나서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저작권 수익 전부를 주는 것도 모자라서 필립 감독에게까지.
무슨 저작권 기부 천사도 아니고.
“브라이언한테는 물어본 거야? 저작권 양도에 관한 거?”“아니요, 쌤과 상의도 안 했는데 제가 먼저 말을 꺼낼 순 없죠. 단지 영준이 형이 영국에선 저작권을 사고팔기도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서요.”“그래, 맞아. 거기선 가능해. 폴 매카트니도 비틀즈 노래를 돈 내고 부르니까. 저작권이 넘어가서.”
“아…….”
“…….”
박 대표는 저작권 양도가 가능하다는 말만 하고 수철의 물음에는 명확히 답을 하지 않았다. 수철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망설이는 박 대표를 향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쌤이 거절하시면 저도 다시 생각해 볼게요.”
“…….”
“그런데 처음부터 그 곡은 필립 감독님의 것이었어요.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꽃이 피지 않았을 테니까요.”
‘백자의 눈물’이 아니었으면 그 음악은 유명해질 수 없었다. 그랬으면 사라 제이가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그 음악은 이제 필립 윤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저작권료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박 대표는 진지한 얼굴로 수철의 뜻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네.”
수철은 주저 없이 끄덕였다.
박 대표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보였다.
“하하, 녀석. 마음을 다 굳혀 놓고 다시 생각해 본다고 하기는.”
결국 박 대표는 수철의 뜻을 받아들였다.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꽤 큰돈이니까 필립 감독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해.”
“네, 감사해요.”
“법률적인 부분은 브라이언과 상의해야 하니까 그 부분은 내가 직접 진행할게.”
“네, 쌤.”
박 대표는 얼굴이 밝아지는 수철을 잠시 바라보다 수저를 집어서 산채비빔밥 사이에 푹 쑤셔 넣었다. 한입 잔뜩 퍼서 입에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저작권 또 넘길 데 없지?”
박 대표는 양쪽 볼 가득히 산채비빔밥을 집어넣은 채 물었다.
자꾸 빠져나가는 저작권료 스트레스를 우걱우걱 나물을 씹으면서 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