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30화 (230/239)

#230화. 불치병

―수철 씨, 감동이에요. 소중한 저작권을 저에게 선물하겠다니.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건 말도 안 돼요. 마음만 받을게요.

소식을 접한 필립 윤은 강력한 거절 의사를 보였다.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 완강하게 거절해서 수철이 난감할 정도였다. 수철은 박 대표에게 했던 얘기를 반복해서 전했다.

“마땅히 드려야 해서 드리는 거예요. 본래 있어야 하는 곳에 가는 거라고요.”

하지만 수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존심 싸움이 벌어졌다.

―이럴 필요까지 없는데, 내가 그렇게 안 좋아 보였나 봐요?

“감독님이 왜요?”

―그렇지 않으면 왜 저작권을 나에게 주려는 거예요? 선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잖아요?

“원래 감독님 거라서 돌려드리는 거라니까요. 전 처음에 영화음악만 한 거고, 감독님의 영화가 유명해져서 사라가 노래를 부르고 한 거잖아요. 그래서 저작권료를 받고 있고요. 저는 충분히 보상받았으니까 이제 감독님이 가져가세요. 제가 계속 돈을 받기에 불편해요.”―…….

필립 윤은 수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도.

반면에 수철은 필립 윤이 갈등한다고 생각하고, 받아도 되는 당위성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말을 덧붙였다.

“영화 아니었으면 제가 그 음악을 만들지도 않았을 테고, 영화 덕분에 어쨌든 음악이 유명해진 거잖아요? 그래서 사라 제이가 노래까지 한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건 감독님이 주인인 게 맞아요. 전 덕분에 그동안 두둑이 많이 벌었고요.”

―수철 씨……

부담스럽게 필립 윤이 감동하는 게 느껴졌다. 쓸데없이 감정적인 멘트가 길어질까 봐 서둘러 잘랐다.

“감독님.”

―……네.

“제가 좀 바쁜데, 나중에 통화하면 안 될까요?”―네, 그러세요. 꼭 전화 주세요.

물론 수철은 전화하지 않았다. 다시 전화하면 쓸데없는 감정 소모와 신경전이 벌어질 게 뻔하기에.

어찌 됐건 암묵적으로 필립 윤이 수철의 큰 선물을 받아들이는 상황이 됐다. 전화를 기다리던 필립 윤이 참지 못하고 결국 여러 번 연락을 해 왔지만, 수철은 그때마다 작업 중이라고 시크하게 말하고 끊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무색하게 몇 달 뒤 필립 윤은 입이 벌어져서 전화를 해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큰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하하, 수철 씨. 고마워요. 저작권료 보고 까무러칠 뻔했어요. 앞으로 제작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하하.

수철은 필립 윤이 좋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미션을 성공한 느낌이 들었다.

―안 받겠다고 끝까지 거절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하하.

기분이 좋은지 농담도 던졌다. 그러다 곧바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제 후반 작업에 돈이 부족해서 헉헉댈 일은 사라졌어요.

“잘되셨어요. 후반 작업 잘하시길 바라요. 나중에 끝나면 저에게도 보여 주시고요.”―그럼요, 꼭 그래야죠. 그런데 수철 씨.

“네, 말씀하세요.”

―이거 끝나고 다음 작품은 그린피스와 북극곰에 대해서 다뤄 볼 건데, 생각 있으면 투자를 받아 줄게요.

햐, 하하.

웃음이 나왔다.

“감독님.”

―네

“저, 작업 중이에요.”―아, 미안해요. 전화 기다릴게요.

“…….”

* * *

“쟤가 인탁이예요?”

“응.”

“에이, 뭐예요? 하나도 안 닮았네.”

인탁을 처음 봤을 때 수철의 반응은 그랬다.

사우나 외벽에 물을 뿌리며 열심히 솔을 문지르고 있는 인탁을 보며 수철은 박 대표가 자신을 속였다고 했다.

“하하, 왜 그래? 내가 보기엔 많이 닮았는데. 널 처음 봤을 때랑 말이야.”

박 대표는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며 웃음을 지었다.

수철은 다시 한번 인탁을 유심히 봤다. 자유로운 영혼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 필이 받으면 솔을 마이크 삼아 소리를 질렀다.

수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제가 진짜 저랬단 말이에요? 설마.”

수철은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했다.

“물론 저러지는 않았지. 하지만 느낌은 비슷했어. 풍기는 끼가 말이야.”

박 대표는 빙그레 웃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인탁과 수철을 번갈아 봤다.

아무리 봐도 닮았단 말이야.

박 대표는 자신의 느낌을 확신했다. 수철의 눈빛이 예전과 다르게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그래도 그 느낌은 남아 있었다.

“반가워요, 인탁 씨.”

수철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인탁은 등을 돌리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급히 헤드폰을 벗어서 목에 걸었다.

수철은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인탁을 바라보는 수철의 눈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인탁 씨가 뭐예요? 그냥 인탁이라고 부르세요, 형.”

인탁은 역시 듣던 대로 넉살이 좋았다. 수철을 보며 놀라는 것도 잠시, 금세 형이라고 부르며 수철이 내민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하하, 그래 만나서 반가워 인탁아. 난 용수철…….”“알아요. 수철이 형, 여기서 형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그래, 암튼 반갑다.”“네, 형.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인탁은 거침이 없었다. 인사를 나누고는 곧바로 수철이 만든 노래를 흥얼거렸다. 수철의 노래를 잘 안다는 뜻이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반면 인탁의 의도와 상관없이 수철은 한 번에 인탁의 노래 실력을 알아 버렸다. 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지도 알아 버렸다.

“형.”

“응?”

“저 음악 좀 가르쳐 주세요.”

“음악?”

역시 대단한 넉살.

인탁은 인사를 나눈 지 10분도 안 돼서 바로 수철에게 음악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듯이 말했다. 수철은 그런 인탁을 귀여운 눈으로 바라만 봤다.

* * *

“원래는 일 년만 있기로 했는데, 벌써 이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어.”

수철은 박 대표에게 인탁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검정고시도 합격했고, 약속했던 대로 술, 담배도 끊었어. 덕분에 회사에 곶감이 떨어질 날이 없어. 할머니가 너무 기뻐하셔서 말이야. 하하.”

“곶감이요……?”

인탁의 할머니는 감사한 마음을 보답할 길이 없어서 감을 말려서 계속 가져오신다고 했다. 그래서 박 대표도 열심히 먹고 있다고.

“너도 하나 먹어 봐. 정말 맛있어.”

박 대표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박스에서 곶감을 꺼내 수철에게 내밀었다.

“잠시만.”

“……?”

그리고는 잔을 가져와 포트에 있는 붉은색 물을 따랐다. 잣도 꺼내 물 위에 두 개 띄웠다. 향을 맡아 보지 않고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정과였다.

“곶감은 수정과랑 먹어야 제맛이지.”

수정과가 든 잔을 내려놓고는 자신도 한 잔 따라서 마주 앉았다.

“지금은 저 녀석이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갈 지경이야.”

“왜요?”

“저 녀석이 여기 관리를 다 하고 있거든, 개랑 고양이도 이제 저 녀석만 졸졸 따라다녀.”“하하, 존재감이 커졌군요.”“엄청 커졌지, 직원들도 모두 저 녀석을 좋아해. 이젠 저 녀석이 떠나가겠다고 할까 봐 우려하고 있다니까? 하하.”

“하하, 재밌네요.”

박 대표는 인탁이 없으면 회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고 했다. 인탁은 어느덧 디데이 뮤직의 식구가 되어 있었다.

수철은 박 대표의 얘기를 들으며 마시던 수정과 잔을 내려놓았다.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하던데요?”“자기 이름으로 앨범 내는 게 꿈이니까.”“아, 그렇군요. 어쩐지.”

인탁이 캐묻듯이 이것저것 앨범에 관해 질문을 던진 이유를 알았다. 너무 질문이 많아서 수철이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박 대표도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래서 요즘 내가 차근차근 좀 가르쳐 주고 있어. 쉽지는 않지만.”

뭐가 잘 안 되는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왜요?”

“열정은 너무 넘치는데, 이론을 배우는 걸 너무 싫어해.”“아, 하하. 이론은 누구나 머리 아파하죠.”“그래서 악기 위주로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래도 이론을 배워야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잖아? 천재가 아니라면 말이야.”

“…….”

박 대표는 별 뜻 없이 얘기했는데 살짝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박 대표는 급하게 말을 돌렸다.

“처음 봤을 땐 너랑 닮은 구석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 눈빛, 열정,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끼.”

“…….”

“그런데 한 가지가 너무 다른 거야. 하하!”

진지하게 말을 하던 박 대표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하!”

박 대표는 수철이 쳐다보는데도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배꼽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뭔데 그러세요?”

수철이 궁금한 눈빛으로 몸을 붙이자 박 대표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췄다.

“음악 말이야.”

“아, 하하.”

예상은 하고 있었다. 노래하는 걸 직접 들어 봤으니까.

그런데 그게 저렇게 웃을 일인가?

갸웃하는데 박 대표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못해도 너무 못하는 거야. 하하! 아이고 배야!”

평소 박 대표의 모습이 아니었다. 남의 재능을 비웃지는 않으니까. 물론 웃음의 뉘앙스가 비웃음은 아니었다. 정말 재미난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웃음이 너무 지나쳤다.

수철의 눈빛을 의식한 박 대표가 기대고 있던 소파에서 몸을 세웠다.

“하하, 미안.”

박 대표는 힘이 빠질 때까지 다 웃고 나서야 수정과 한 모금을 마시며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처음 저 녀석이 왔을 때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게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불치병이 있대.”

“네?”

수철이 눈을 크게 뜨자 박 대표는 손을 저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불치병이 아니라, 음악성을 말하는 거였어.”

“……?”

“음치에다 박치.”

“아…….”

“그런데 자기는 그럴 수밖에 없대.”

“……왜요?”

“돌아가신 엄마는 산골 출신이고, 할머니에게 자신을 맡겨 놓고 원양어선을 타러 떠난 아빠는 어부니까 자신이 음악성이 없는 건 당연한 거라고 하더라고.”

산골에 살아서 또는 어부여서 음악성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인탁은 부모님이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음악성이 없는 건 당연하다고.

부모님께 물려받을 유전자가 없다고.

집에는 흔한 피리 같은 악기도 하나 없었다고 했다.

박 대표의 말을 들은 수철은 끄덕였다. 공감이 갔다.

“어쨌든 긍정적이네요.”“너무 긍정적이지. 그래서 참 다행이고.”

박 대표는 인탁이 구김살 없이 낙천적이라서 보기 좋았다. 가정환경이 좋다고 할 수 없는데도 부정적인 길로 빠지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암튼 자신은 부모님의 음악 DNA가 꽝이라서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제로인 거래. 물려받을 DNA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음악성이 더럽게 없는 건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하하!”

“하하하!”

수철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박 대표가 왜 그렇게 과하게 웃었는지 이제 이해가 됐다. 인탁의 말이 재밌기도 하면서 논리적이었다.

박 대표도 몇 번 크게 웃고는 다시 눈에 힘을 줬다.

“그런데 저 녀석에게 정말 엄청난 게 하나 있어.”

박 대표의 바뀐 표정에 수철도 웃음을 멈췄다.

“……뭔데요?”

“가사가 진짜 예술이야.”

“가사요?”

“응.”

갑자기 수철은 인탁에게 흥미가 확 생겼다. 대체 어떤 가사를 쓰길래 박 대표가 저렇게까지 얘기하는지 궁금해졌다.

자신을 빼고는 가사에 대해서 칭찬을 잘 하지 않는 박 대표다. 저렇게 눈에 힘까지 주고 얘기하니까 흥미가 발동했다.

“아직 순서도 모르고 거칠고 문장력도 엉망이지만, 단순하면서도 사람의 심장을 찌르는 한 가지가 항상 있어.”

“아…….”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내가 계속 관심 갖고 지켜보는 거야. 음악도 가르치면서.”

이제야 박 대표가 재능이 없다면서도 옆에 두는 이유를 알았다. 음악까지 가르치는 이유를.

“그럼 작사가를 권해 보시는 게 낫지 않나요? 안 되는 음악을 그렇게 악을 쓰면서 할 이유가…….”

수철은 말끝을 흐렸다. 음악이란 것이 재능과 상관없이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지만 음치에 박치면, 음…….

판단이 잘 안 섰다.

힘든 길인 줄 뻔히 아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때 박 대표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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