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진지한 녀석
“하하, 그래? 그럼 테스트해 볼까?”
“네, 좋아요.”
수철은 먼저 짧은 음악을 들려주고, 오선지에 박자를 그리게 했다. 그런데 녀석은 놀랍게도 수철이 그리라고 하기도 전에 악보를 다 그려 버렸다.
햐, 이 녀석 봐라?
수철은 좀 더 어려운 리듬을 들려주고, 녀석의 모습을 살폈다.
“한 번 더 들려줄까?”“아니요, 괜찮아요.”
인탁은 수철이 한 번 더 들려줄까 오히려 걱정하며 서둘러 악보를 그렸다. 다음 곡도 마찬가지였고, 그다음도 마찬가지였다.
좀 더 길고, 복잡한 리듬을 들려줘도 결국 그려냈다. 생각하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퍼펙트하게 그려냈다.
흐뭇하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녀석이 가진 불굴의 의지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까진 딱 좋았는데.
그 후로 수철의 귀가 좀 아파졌다.
“지금 저 음악은 말이죠…….”
인탁은 음악만이 아니라 새 소리, 바람 소리 등 자연이 들려 주는 모든 소리에서도 박자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수철에게 일일이 자랑스레 떠들었다.
마치 갓 말을 배운 아이처럼 계속 조잘대서 귀가 아플 정도였다.
박자감이 생기자 음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드디어 어느 날 노래에 관해서도 묻기 시작했다.
“노래 부를 때 있잖아요…….”
그동안 인탁은 커트 코베인을 최고로 생각한 탓에 노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노래만 열심히 따라 부르면 되니까. 그래서 수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러다 성대 다 망치지.
못 들어주겠다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녀석이 도움을 요청해 왔다.
“어떤 게 알고 싶어?”“노래 연습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서요.”
“발성 연습법?”
“네.”
“그러려면 음정과 소리에 대해서도 좀 알아야 하는데? 결국 음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는 얘기야.”“그래서 제가 처음 볼 때부터 그랬잖아요?”
“……?”
“음악 좀 가르쳐 달라고요.”
녀석은 두 번 말하기가 쑥스러운지 손바닥으로 짧은 머리를 쓸어내렸다.
하하, 녀석. 성질은.
“알았어. 일단 테스트부터 해 보자.”
녀석의 발성에 대해선 이미 꿰뚫고 있지만 그래도 세심하게 짚어 줄 생각에 일단 노래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인탁을 데리고 본관 4층에 있는 연습실로 올라갔다.
“이제 노래 한번 불러 봐. 들어 볼 테니까.”
수철은 의자를 돌려서 인탁을 마주 보고 앉았다.
“……?”
녀석은 선뜻 노래를 시작하지 못했다. 뻘쭘한 얼굴로 오줌 마려운 녀석처럼 쳐다보고만 있었다. 안 시킬 때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돌아다니더니 막상 시키니까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
“어떤 노래를 부를까요……?”“아무거나, 네가 잘 부르는 거로.”“그럼, 커트 코베인에 ‘Come As You Are.’ 부를게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괜히 뜸 들이기는.
“알았어, 불러 봐.”
―Come as you are, as you were
As I want you to be
As a friend, as a friend
As a known enemy
수철은 팔짱을 낀 채 인탁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발성을 체크한 게 아니었다. 인탁이 자기 노래에 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 표정을 살폈다.
“오케이! 잘 들었어.”
적당한 순간에 끊었다. 끝까지 다 들을 필요는 없었다. 인탁도 얼른 끊어 주길 바라는 눈치였고.
“5층으로 올라가자.”
수철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5층이요?”
“그래, 얼른 따라와.”
수철은 영문을 몰라 하는 인탁을 데리고 5층 녹음실로 올라갔다.
“아, 여기가 이렇게 생겼었군요?”
인탁은 녹음실 내부를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인탁이 관리인이라는 소리는 들어도 이곳까진 들어올 수 없었다. 소속 뮤지션이 녹음할 때를 제외하고는 오픈하지도 않는 공간이다.
“구경은 나중에 하고 어서 부스 안으로 들어가 봐.”
수철은 인탁을 부스 안으로 밀어 넣고 두터운 헤드폰을 쓰게 했다. 그리고 컨트롤 룸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
“내 목소리 들리지?”―네.
“그럼 아까 네가 부른 노래 반주 작게 틀어 줄 테니까. 다시 불러 봐.”―또요?
“그래, 불러 봐.”
―네.
수철이 반주를 틀어 주자 인탁은 마이크 앞에 서서 눈에 힘을 주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Come as you are, as you were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표정이 안 좋아졌다. 급기야 미간을 좁히더니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만요, 그만! 인제 그만할게요.
녀석은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 소리를 지르더니 팽개치듯이 헤드폰을 벗어 버렸다.
그리고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부스 한편에 등을 돌리고 서서 식식댔다.
수철은 유리창을 통해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인탁은 수철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지 구석의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수철은 인탁이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라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인탁은 자기의 생생한 목소리를 아마 처음 들었을 거다. 지금 인탁이 헤드폰을 통해 들은 소리는 바로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는 소리다. 자기가 아는 자기 목소리와 타인이 듣는 목소리는 다르다. 인탁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환상이 깨져 버린 것이다.
자신의 소리가 이렇게 처참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래서 수철을 보기가 부끄럽고 민망했을 것이다.
수철은 인탁이 부스에서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끼이익.
30분이나 지났을까, 인탁이 드디어 두꺼운 부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커피 한잔 타 줄까?”
“아니요.”
인탁은 시선을 맞추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수철은 혼자서 커피를 타서 마시면서 잠시 기다렸다. 인탁이 먼저 말을 걸 때까지.
“안 나가세요?”
넓고 컴컴한 컨트롤 룸.
녀석은 결국 어색한 상황을 참지 못하고 수철이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실 때쯤 말을 붙여 왔다.
“밖에 나갈래?”
“네.”
밖에 나가서 열을 식히고 싶은 모양이었다. 수철은 녹음실 문을 잠그고 인탁과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 * *
“왜 그러고 있어?”
인탁은 하루 종일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가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다. 수철의 공간까지 따라와서 괜히 주위를 빙빙 돌았다.
참다못한 수철이 먼저 말을 거니까 녀석은 대답은 하지 않고 뻘쭘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서 앉았다.
“어떻게 하면 돼요?”
“뭘?”
“노래 말이에요.”
“글쎄……?”
“…….”
수철은 인탁이 뭘 궁금해하는지 알지만, 방법을 말하지 않고 멀뚱히 바라만 봤다.
“…….”
“…….”
인탁은 아까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눈빛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철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왜 그렇게 악쓰면서 소리를 지르려고 그래?”
“…….”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봐.”“커트 코베인이 그렇게 부르니까요.”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그 사람은 악을 쓰는 게 아니라 그게 자기의 소리라서 그런 거야.”
“…….”
“너는 같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 안 올라가는데 억지로 소리를 내는 건 좋지 않다는 말이야.”“……그래도 고음을 질러야 락커죠.”“고음 안 질러도 락커 할 수 있어. 그리고 안 올라가는데 그렇게 악악 쓰고 지르면 성대만 망쳐.”
녀석은 기가 죽었는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유명한 락커들도 다 그렇게 했대요. 소리 지르다 보면 언젠가 터진다고요.”
“누가 그래?”
“락 하는 형들이요.”
“하하, 나 참.”
헛웃음이 나왔다. 잘못된 정보가 사람을 망치는 사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건 맞지 않는 얘기야. 그러다 네 목에 힘줄이 먼저 터질 거 같은데?”
“…….”
“…….”
“……필을 살리려면 그래도 고음을 질러야 하잖아요? 락은 필이 중요하니까요.”
말에 자신이 없는지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힐끔 눈치까지 봤다. 녀석은 최후의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수철은 그걸 챙겨 줄 생각이 없다. 잘못된 믿음은 확실하게 잡아 줘야 한다.
“필이 중요하지. 그런데 네 필만 신경 쓰면 어떡해?”
“……?”
“남한테 들려주려면 남의 필도 신경 써야지. 안 그래?”
“……!”
녀석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잠시 멍한 얼굴로 앉아서 수철을 바라만 봤다. 그러다 다시 눈에 초점을 잡고는 의자를 바짝 붙여 왔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요?”“숨쉬기부터 해야지.”
“숨쉬기요?”
“그래, 숨쉬기가 노래에서 가장 중요해.”
“…….”
* * *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더니 녀석이 변해 가는 모습이 눈에 확 띄네. 하하.”
창가에 서서 인탁을 바라보던 박 대표는 웃으며 등을 돌렸다. 수철은 소파에 앉아서 수정과를 마시다 빙그레 웃었다.
박 대표는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내밀었다.
“어떻게? 인탁이가 월드 스타가 될 거 같아?”
“네?”
“저 녀석이 처음에 나한테 한 말이야. 자신이 월드 스타가 돼서 세상을 휩쓸 거니까. 얼른 자신과 계약하자고. 하하.”
“아……. 하하.”
박 대표는 웃음을 멈추고 수철을 지긋이 바라봤다. 뭔가 아쉬운 눈치였다.
“실력이 늘어서 좋긴 한데, 녀석이 변한 게 좀 아쉽기도 해.”“……뭐가 변했는데요?”“내가 인탁을 좋아한 건 녀석의 두툼한 배짱이었거든. 근거 없이 호언장담하는 모습이 은근 매력 있잖아? 하하.”
박 대표뿐만이 아니라 직원들도 그랬었다. 인탁의 거침없는 배짱을 좋아했었다. 인탁은 자신의 매력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드니까 자길 놓치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었다. 수철은 그럴 때마다 피식 웃었고. 박 대표는 그런 모습이 사라져 가서 아쉽다는 거였다.
“음악을 알아 가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런 재미가 사라져서 좀…….”
박 대표는 다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의 인탁을 바라보는 박 대표는 어딘가 섭섭한 표정이었다.
인탁이 노래에 집중하고부터 모습이 좀 바뀌기는 했다. 설레발을 떨던 모습도 사라졌고, 사람들과 장난을 치던 모습도 사라졌다. 빗자루를 들고 소리 지르던 모습도 사라지고 항상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끼와 열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던 것이 안으로 스며든 것일 뿐이다. 그건 수철이 잘 안다.
“정 실장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
“넌 워낙 탁월해서 끼가 가려져 있지만, 저 녀석은 그렇지 않아서 잘 드러나는 거라고.”
수철은 가끔 인탁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같은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 끌린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박 대표가 말한 그 부분이었다.
“음악은 재능보다 끼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저 녀석이 좋아하는 커트 코베인도 그랬잖아?”
한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박 대표가 등을 돌렸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수철은 끄덕였다. 진심 그렇게 생각한다. 끼가 없으면 재능을 태울 에너지가 없으니까.
“녀석이 이젠 너에 대한 존경의 눈빛이 가득해.”
“그런가요?”
“그래, 이제 네가 커트 코베인의 자리를 꿰찬 모양이야. 하하.”
* * *
“오셨어요? 용수철 선생님.”
“녀석.”
수철이 연습실에 들어서자 인탁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수철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인탁이 장난을 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귀여웠다.
인탁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철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수철은 인탁에게 한 명의 뮤지션일 뿐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박 대표의 표현대로 예의를 갖추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미세하지만.
사실 수철이 인탁에게 뭘 가르쳐 준 건 별로 없다. 그냥 자신의 소리가 어떤지 알게 해줬을 뿐이다.
호흡을 잡아 주고, 안 올라가는 고음보다는 나름 자신만의 색깔인 중음역대를 안정적으로 낼 수 있게 도와줬다. 가끔 음정 연습도 도와주고.
그런데 이번에도 녀석의 미친 열정 탓에 빠른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괄목할 만한 엄청난 발전은 아니지만, 이전 상태에 비하면 눈에 띄는 큰 성장이었다.
수철이 만족할 정도로.
무엇보다 인탁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진지하게 소리에 접근하는 모습이 수철은 보기 좋았다.
“앨범 만들고 싶다고 했지?”
“네, 꿈이죠.”
“그럼, 꿈을 이뤄 볼까?”
“네?”
녀석은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동그래진 눈으로 수철을 빤히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라? 남들 다 하는 건데?”“진짜요? 뻥 아니죠?”
“내가 왜?”
인탁은 믿지 못하겠는지 수철의 표정을 계속 살폈다.
“싫음 말고.”
“아닙니다! 용수철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철이 등을 돌리자 인탁은 수철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