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의 다이어리-49화 (49/333)

49화

장장 4개월의 시간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붉은 꽃잎>.

이제 마지막 한 씬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크랭크업을 선언하게 될 장소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아닌 양평 대부산이었다.

산 정상까지 세트 부품을 올리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단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레디, 액션!”

<붉은 꽃잎> 현장은 물론,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다시는 외쳐볼 기회가 없을 한 마디.

류 감독은 목이 멘 나머지 하마터면 끝까지 외치지 못할 뻔했다.

그는 입을 가린 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고, 조감독이 말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비 갠 뒤 초원에는 푸른 풀이 무성하고, 살구꽃 가지 위엔 나비가 즐겁게 너울거리거늘….”

사방이 높은 울타리로 막힌 허름한 초가집 마루에 힘없이 앉아있는 연산.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하늘마저 창천(蒼天)이 아니구나.

“검은 먹구름으로 둘러싸여 한 줄기 빛조차 없으니, 실로 야속하구나.”

- 털썩.

연산이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 쏴아아.

수만 개의 빗방울이 그를 향해 사정없이 떨어진다.

금세 그의 몸을 적시는 물방울.

그러나,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적신다 한들, 이 몸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까지 지울 수 있으랴….”

연산의 죽은 눈동자가 하늘을 바라보며 감기지도 않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다.

빗방울인지, 눈물인지도 모르겠는 액체가 연산의 눈을 타고 흐르면서,

“…….”

그제야 새빨갛게 충혈된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연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이내 힘없이 뻗은 그의 손가락을 비추었고, 마지막으로 그가 끼고 있는 옥가락지를 비추며 멈춰 섰다.

“컷.”

촬영의 끝을 알리는 컷 소리.

모두의 시선이 류 감독에게 향했다.

몰려오는 아쉬움에,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후우.”

류 감독은 깊은 한숨을 내뱉자마자 이내 밝은 표정을 지으며,

“크랭크업!”

마침내 전체 촬영 종료를 선언했다.

- 와아아아아!

- 짝짝짝짝짝!

산 정상에서 울리는 환호와 박수 소리가 메아리와 겹쳐 천지가 떠나갈 듯 크게 들렸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70년대 초에 뛰어든 영화계의 변천사를 몸소 겪으며 지금까지 달려온 류창민 감독.

아날로그 방식의 대명사인 ‘필름 영화산업’에서부터 최신식 방식인 ‘디지털 영화산업’에 이르기까지 흐른 40년의 긴 시간.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 번도 정상의 자리를 내려놓은 적이 없었던 그가 이제 왕관을 내려놓는 순간에 이르렀다.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우진은 출연진 대표로 그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작업 기간 내내 촬영과 시나리오 수정을 반복하며 창작의 고통을 이겨낸 거장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선물이었다.

류 감독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다들 고맙습니다. 단언컨대 40년 영화 인생에서 여러분과 함께 한 시간이 제일 행복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도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말을 마친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양어깨가 들썩였다.

“자, 다들 박수! 더 크게!”

조감독의 외침에 출연진의 박수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거장의 울음소리를 덮어주려는 모두의 배려.

끝났다는 후련함보다 끝이 났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그래도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또 만남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마지막 작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후회는 없었다.

“우리 배우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현역으로서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배우들과 포옹을 나눴다.

선배로서 후배들을 훌륭하게 이끌어주고 독려해준 오성철.

데뷔작, 사극, 홍일점 등 어려운 조건들을 극복하고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분위기 메이커, ‘신블리’ 신다희.

그리고….

여태껏 만났거나 같이 작업했던 수백 명의 배우들 중에서 유일하게 ‘천재’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 젊은 배우.

열정, 실력, 태도, 책임감, 노력 등 모든 면에서 거장을 소름 돋게 한 유일한 배우, 백우진.

그들과 마지막을 함께 했기 때문에,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메가폰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류 감독이었다.

“현장 정리하고 바로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조감독의 공지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현장을 떠났다.

류 감독은 다시 한번 현장을 쭉 둘러본 뒤,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가장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다시 조용해진 대부산 정상.

그곳을 채운 적막함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회자정리]

- 거장이 떠나고 생긴 빈자리.

[거자필반]

- 새로운 젊은 원석이 채웠다.

2011년, 한국 영화계를 뒤흔들 선수교체.

OUT 류창민 ↔ IN 백우진·신다희

<붉은 꽃잎>의 크랭크업이 그 기점이었다.

* * *

4개월을 함께 동고동락한 전우들과 헤어지는 일은 참 힘든 일.

작품이 끝나면, ‘시원섭섭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곤 한다.

이보다 더 찰떡인 표현이 없다.

촬영 기간 4개월.

준비 기간 5개월.

우진은 총 9개월의 시간 동안 연산군에게 닿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면서 느꼈던 괴로움을 내려놓자니 너무나도 시원하지만, 9개월 동안 또 다른 자신으로서 내면에 존재했었던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 정말 섭섭했다.

<원티드>에서 만났던 규보 형을 떠나보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감정.

그때는 가상 세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고, 다양한 방법으로 만났었기에 형제 같은 유대감을 느꼈었다.

그랬었기에 쿨하게 보내줄 수 있었지만….

이번에 이루어진 가상 세계 속 만남은 단 한 번에 불과했으며, 그것마저 아주 짧게 끝났었다.

이후에 어떠한 조언도, 추가적인 만남도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홀로서기에 가까웠다.

온전히 피를 깎는 노력과 본인의 힘으로 만든 캐릭터가 <붉은 꽃잎> 연산군이었다.

그러니 그와 이별하는 것이 규보 형과의 이별보다 훨씬 더 서운하게 다가올 수밖에.

뒤풀이 현장은 마지막 촬영지인 양평에 있는 한우 고깃집이었다.

“오빠! 수고하셨어요.”

“고생했다~ 아쉬워 죽겠네.”

우진은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성철 선배, 다희와 함께 자리를 즐겼다.

시끌벅적한 술자리.

지난 4개월 동안 쌓인 이야기보따리가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왔다.

“한잔합시다!”

이쪽저쪽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술잔을 나누던 류 감독의 발걸음이 가장 마지막에 닿은 곳.

주연배우 테이블.

- 짠!

맛있는 음식, 좋은 사람들.

<붉은 꽃잎>에서의 팀워크는 오늘이 마지막이었기에, 아쉬우면서도 후련한 마음을 한 잔의 술에 담아 삼켰다.

삼킨 술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내면 어딘가에 저장되겠지.

“감독님. 개봉은 언제로 생각하고 계세요?”

“7월 중순에서 8월 초로 얘기 중이에요. 제작사랑 배급사 쪽에서도 연휴 시즌에 개봉하자고 논의 중이라.”

그동안 거장이 국내 영화계에서 유일하게 넘지 못한 벽.

바로, 천만 관객 스코어.

진정한 유종의 미를 위해, 개봉 시기를 최대한 좋은 타이밍으로 조율 중인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차기작으로 염두에 둔 작품이 있습니까?”

류 감독의 물음에 가장 먼저 다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기획사와 계약 체결이 우선 목표라 했다.

그러면서 우진이 소속된 플라워엔터테인먼트와 계속 논의 중이라고 조심스레 밝혔다.

‘…역시 김태곤 팀장님.’

한 번 점찍은 배우는 절대 놓치지 않는구나.

우진은 그녀의 말에 미소 지으며 안주를 집어 먹었다.

그런 그를 다희가 슬쩍 쳐다보았지만, 우진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가 플라워엔터를 첫 소속사로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음을.

“성철이는?”

“저는 바로 드라마 들어갑니다.”

성철 선배는 쉴 틈 없이 곧바로 드라마 촬영에 들어간다고 했다.

<원티드>, <붉은 꽃잎>에 이어 휴식 없이 3연속이라니.

대단한 연기 열정이 아닐 수 없었다.

“케이블 드라마고, 내용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의병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정말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그는 악역을 맡았다고 했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이라는데….

성철 선배는 무덤덤하게 악역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을 받아들인 모습이었다.

계속해서 그를 악역으로 찾는다는 것은 곧 대한민국에서 그보다 악역 연기를 더 잘하는 배우는 없다는 소리기도 하니까.

배우로서 특출난 연기 분야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다.

“솔직히 임사홍 역에 캐스팅이 됐을 때는 또 악역이라 싫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느꼈어요.”

성철 선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악역도 굉장히 매력 있구나…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라는 걸요.”

류 감독이 호쾌하게 웃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성장통 한번 세게 앓았구만.”

“감독님과 여기 두 후배 덕분에 한층 성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류 감독이 성철의 어깨를 두드리며 우진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저는….”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차기작은 정해진 게 없습니다. 촬영에만 집중하느라 소속사에서도 얘기 들은 건 없어요.”

“그래요? 야, 재필아!”

우진의 말에 류 감독이 근처 테이블에 앉아있는 조감독을 큰 소리로 불렀다.

“너 입봉작 시나리오 빨리 써야겠다?”

“네?”

“우진 배우 아직 차기작 안 정해졌다는데, 후딱 써야 기회가 올 것 같은데?”

류 감독의 장난에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빵 터졌다.

“일단은 조금 쉬면서 천천히 보려고 합니다. 두 작품을 연달아서 했거든요.”

“그래요. 열심히 일했으면, 열심히 쉴 줄도 알아야지.”

“자자, 한 잔 드시죠. 건배!”

“짠!”

뒤풀이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 * *

밤샘 뒤풀이를 마치고 우진은 망원동 집으로 돌아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허름하고 공허한 5평짜리 원룸.

그래도 그리웠던 곳으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4개월 동안 사람이 산 흔적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어머니께서 수시로 드나드시면서 청소를 해주신 모양이었다.

“엄마도 참….”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우진은 온종일 입고 있었던 옷을 벗어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건….’

그러다 문득, 손가락에 끼고 있던 옥가락지가 눈에 띄었다.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다이어리는 여전히 반응이 하나도 없고.

기념품처럼 남겨진 규보 형의 메스처럼, 연산이 그냥 준 선물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우진은 손에서 옥가락지를 빼내 최규보의 메스 옆에 올려두었다.

마지막 촬영과 밤샘 술자리로 이미 몸과 정신이 지친 상태.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잠부터 자는 것이 급선무였다.

- 쏴아아.

샤워를 마치고 나온 우진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내 커튼을 치자 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우진은 핸드폰도 무음으로 바꾸고는, 곧바로 매트릭스 위에 몸을 던졌다.

“…….”

스르르.

잠이 쏟아진다.

점점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단잠에 빠지려는 찰나.

실로 오랜만에,

- 위이잉.

긴 시간 동안 묵묵부답이었던 ‘그것’이 반응을 일으켰다.

‘……!’

펼쳐진 다이어리가 허공에 떠 있는 채로, 우진을 향해 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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