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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의 다이어리-50화 (50/333)

50화

다이어리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사방으로 뻗치고 있었다.

【초대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우진은 책상 위에 놓인 옥가락지를 챙김과 동시에 문구 아래에 있는 ‘예’ 버튼을 눌렀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아무리 특별한 접촉이 없었다고 해도, 마지막 인사조차 없었으면 진짜 서운할 뻔했다.

【가상 세계로 이동합니다.】

메시지 창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화려한 빛이 그를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가상 세계에 도착한 듯,

- 휘이잉.

시원한 바람이 온몸에 느껴졌다.

우진은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이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홀로 서 있는 곳은 강녕전 앞뜰 한복판이었다.

“…….”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붉은 꽃잎> 마지막 씬을 다시금 연상케 했다.

폐왕이 된 연산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었던 맑은 하늘, 창천(蒼天)이었으니까.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에 내리쬐는 햇살.

그것이 얼굴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곳이 이렇게나 평안한 공간이었나.’

9개월을 연산으로 사는 동안 강녕전에는 늘 피 냄새와 신음, 그리고 고통에 젖은 절규만이 진동했었거늘.

이렇게 고요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을 줄이야.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바라보는 강녕전.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궁궐의 웅장함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우진은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궁이 내뿜는 기운을 만끽했다.

- 저벅저벅.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우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서 뒷짐을 진 채로 환하게 미소 지으며 걸어오는 한 남자, 바로 이융이었다.

그가 다가와 말했다.

“다시 만나니 참으로 반갑구나.”

“오랜만입니다, 전하.”

반가운 인사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 순간,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살짝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규보 형 때처럼 조금 더 많이 소통했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과인과 잠시 걷겠는가?”

“좋습니다.”

순간의 정적이 이융의 반가운 제안으로 깨졌다.

우진은 흔쾌히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하듯 이융을 따라 강녕전을 거쳐 경회루, 그리고 이어서 몇몇 궁의 시설을 거닐었다.

그들이 거닌 모든 장소의 겉은 평범하고 조용한 모습이었음에도, 뭔가 이상하게 서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선명한 핏자국들이 뿌려져 있는 느낌이랄까.

미쳐버린 폐왕이 저지른 악행들이 오버랩되는 기분.

이융도 우진과 같은 마음인 듯, 모호한 표정으로 주변의 풍경들을 시선에 담고 있었다.

“아, 이거….”

그런 이융을 뒤로 하고, 우진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옥가락지였다.

그의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몇 안 되는 소중한 물건이라 했으니 이젠 돌려줘야겠지.

“잘 간수해주었군.”

이융은 건네받은 옥가락지를 다시 본인의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

“답례를 하고 싶다만.”

그가 조그마한 함(函)을 건넸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라.”

형형색색의 화려한 함을 열자, 그 안에는 조그마한 은잔(은으로 만든 술잔)이 들어있었다.

“과인의 청을 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이융이 말을 이었다.

“반복되었던 몽이 과인에게 말하려고 했던 바를 그대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했을 뿐입니다.”

“과인이 부탁했던 일과도 같지.”

이융이 우진의 손을 잡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짧게나마 이곳저곳을 거닐며 그대가 과인에게 보여준 미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는 우진을 통해 미래의 자신이 저지르는 악행들을 가감 없이 보면서 다짐했다고 말했다.

‘절대 저 모습으로 변모하지 않겠다.’라고.

우진은 그의 진심에 목례로 화답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고자 하네. 대답해줄 수 있겠는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질문이라면, 기꺼이요.”

잠시 머뭇거리던 이융이 곧장 입을 열었다.

우진은 귀를 기울였다.

“폐왕이 될 과인의 운명은 미래의 과인이 저지른,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행 때문인 점은 잘 알았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

“다만, 과인이 그렇게 된 연유는 아직 모르겠구나.”

우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융이 모를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가 몰라야 한다고.

“그대가 보여준 모습으로 과인이 변할 정도라면, 필시 예사롭지 않은 계기가 있었을 터.”

“…….”

“그대는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나지막한 이융의 목소리에 살짝 간절함이 더해졌다.

“과인에게 말해주겠는가?”

“그럴 순 없습니다.”

우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이융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사는 세계에서의 당신은 이미 흘러간 역사입니다. 그것은 타의로 바꿀 수 없고, 바꿔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제가 만일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말씀드린다면… 곧 제 손으로 당신을 폭군으로 만드는 꼴이 됩니다.”

“……!”

“그래서 저는, 답을 알고 있음에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진의 시선은 이융의 두 눈에 고정되어있었다.

논리적으로 제 뜻을 설명하는 우진의 말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니다. 과인이 생각이 짧았던 것뿐.”

이융은 그제야 홀가분한 표정으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대가 과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실마리를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과인을 모질게도 괴롭혀왔던 몽도 끝났으니, 그대의 몫은 끝났다고 할 수 있겠지. 이제 남은 건 과인의 몫일 터.”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주신 선물은 소중히 받겠습니다.”

이융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대의 세계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우진의 대답에 이융이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슬슬….

손의 감각이 서서히 약해짐과 동시에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형체도 점점 희미해졌다.

이윽고, 둘의 형체가 서로의 육안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즈음.

- 스르륵.

주변을 물들이며 다가온 어둠이 우진의 두 눈을 감쌌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상당히 익숙한 이곳.

그는 벽면을 더듬거렸다.

- 탁.

스위치가 눌리며 어둠이 사라졌고, 우진은 자신의 원룸에 서 있었다.

어우, 잠이 확 깨네.

‘돌아왔구나.’

방 내부는 가상 세계로 흘러 들어가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다이어리에서 문구가 튀어나왔다.

【미션 완료. (2/10)】

【미션 진행도 : 20프로】

【보상 : 용량 추가 (+10)】

이내 그것은 땅에 떨어졌다.

우진은 다이어리를 주워 책상 앞에 앉았다.

손에는 이융이 준 함이 그대로 들려있었다.

그런데,

‘뭐, 뭐야?’

함을 열어본 우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함에서 꺼낸 내용물.

은잔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왜?”

조금 전 가상 세계에서 확인했을 때는 분명 은색 빛이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는데….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꺼낸 은잔은 곳곳에 녹이 슬어 있었다.

우진의 머릿속엔 불길하면서도 합리적인 의심이 가득 차올랐다.

‘설마….’

현실로 돌아와 은잔을 확인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2분에 지나지 않았건만.

이융의 세계에서는 벌써 9년이 흘러버린 것일까?

그가 하사한 은잔이 녹이 슬었다는 것은….

9년이란 시간이 흘러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았을 때, 가상 세계의 이융은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아.”

우진은 착잡한 마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역사는 절대로 바꿔서도, 바뀌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다만,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가상 세계 속 역사라면….

그곳에서의 연산, 아니 이융은 부디 다른 결말을 맞이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바람은 결국 바람에 지나지 않았구나.

실제 역사에서의 연산도, <붉은 꽃잎>의 연산도, 그리고 가상 세계 속 연산도….

‘어떠한 연산군도 결국 성군이 되지 못했구나.’

우진은 녹이 슨 은잔을 다시 함에 넣었다.

함은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과 별개로, 은색 빛이 바래져 버린 은잔을 품어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다.’

짧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을 4개월, 아니 9개월 동안 경험했던 연산의 삶.

그 끝에 남겨진 감정은 결국 씁쓸함과 안타까움이었다.

우진은 책장에 함을 놓은 뒤,

- 철컥.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이제 곧 3월의 봄이었건만, 오늘 새벽의 밤공기는 한겨울 매서운 바람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 * *

휘몰아치던 스케줄을 끝내자 또다시 찾아온 스토브리그 기간.

여유로운 일상이 찾아왔다.

지난 9개월 동안 못 봐서 쌓여있는 드라마, 영화들을 보면서 휴식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분 좋은 소식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먼저,

[우진 오빠, 이제 한 식구네요!]

다희가 결국 플라워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문자로 알려왔다.

우진과 그녀는 이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또한,

[‘7번가의 아이들’ 박수현,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명품 연기!]

[17.4%, 동 시간대 시청률 1위! <7번가의 아이들>, 그 중심에는 배우 박수현이 있었다!]

[‘시청률 신흥강자’ 박수현에 쏟아지는 광고계 러브콜 ING….]

가장 친한 동료이자 역시 한솥밥을 먹고 있는 수현의 드라마가 흥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리고, 우진이 <붉은 꽃잎> 촬영에 한창 매진하고 있던 사이.

그가 출연한 S사의 커피 광고가 TV와 인터넷에서 이미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

반응이 너무 좋은 나머지, S사의 신제품의 판매량은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S사 측에서는 전속모델 계약 기간을 연장하고 싶다는 의사와 함께, 기존에 계약한 2억의 모델비에 추가로 인센티브까지 포함된 금액을 입금하였다.

인터넷 뱅킹으로 금액을 확인하니, 상상 이상의 액수.

입이 너무 크게 벌어져서 순간 턱이 빠지는 줄.

‘딱히 쓸데가 없는데.’

이렇게 큰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얼떨떨한 우진이었다.

“음….”

통장에 입금된 액수를 보고 놀라 커진 눈으로 이내 주변을 둘러보던 우진은,

‘일단 이사부터 해야 하나.’

원생에서 15년 무명의 삶이 녹다 못해 찌들어있는 정든 원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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