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의 다이어리-59화 (59/333)

59화

점심 식사 이후 곧바로 촬영에 들어간 씬은,

[#S8-20 / 실내 / 외부대신 이완영, 밀정 염인섭]

<조선 션샤인> 8 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

우진과 다희가 맡은 배역인 김정완과 이애진 부부의 의병단 동지인 염인섭은 이번 에피소드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인물.

그를 연기하게 될 배우가 바로 안종훈이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오성철 선배님과 안종훈 배우님. 스탠바이 부탁드립니다!”

조연출이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신호를 내렸고,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금세 마무리된 촬영 준비.

오성철과 안종훈이 카메라 앞에 섰다.

동선 체크까지 마무리되면서,

“슬레이트!”

순식간에 주변은 적막으로 휩싸였다.

우진은 다희와 함께 임은봉 PD 옆에서 숨을 죽이고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지금, 그 누구보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진이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설렘과 흥분이 몸을 감싸고 있는 상태.

안종훈의 연기를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분명히 성오가 말해줬었다.

안종훈이 이상하게 변했다고.

이제는 백우진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생난리를 칠 정도로.

‘나를 향한 적개심과 분노가 정작 너를 얼마나 성장시켰을까?’

설렘과 흥분을 넘어선 궁금함이 머리끝까지 치솟고 있었다.

「형, 오랜만에 보니까 진짜 많이 변했네. 작품 하나 성공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지?」

「말조심해. 너한테 뺏기고만 살던 백우진 아니야. 이젠 제발 남의 것 넘보지 말고 네 실력으로 승부했으면 좋겠다.」

작년 대한예술대상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나눴던 대화를 분명 기억하고 있겠지.

딱 1년이 지난 지금.

백우진은 모두가 인정할 만큼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자, 안종훈은 어땠는지….

‘어디 한번, 보여줘 봐!’

우진은 속으로 외쳤다.

어쩌면, 모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배우면 배우답게, 연기로 하는 대결이랄까.

“레디, 액션!”

임 PD가 크게 외치며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0초가 채 지나지 않아,

“컷!”

그가 다시 외쳤다.

우진이 모니터에 꽂힌 시선에 힘을 꽉 주기도 전에 끝나버린 첫 테이크.

안종훈의 대사가 꼬이면서 NG가 나버린 탓이었다.

문제없이 넘어갈 만한 가벼운 실수였기에, 곧바로 다음 테이크가 이어졌다.

“다시 갈게요~ 레디, 액션!”

카메라 프레임 속 무대는 다시 구한말(舊韓末), 격동의 시대로 돌아갔다.

“거사는 오늘 밤 11시입니다. 인원은 총 넷이고, 책임자는 김정완이라는 자로서….”

거사 계획을 술술 털어놓는 염인섭과 상당히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를 듣고 있는 외부대신 이완영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염인섭의 짧은 독백이 이어졌다.

자신을 암살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하였으니, 이완영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겠는가.

“…이상입니다.”

“허허, 제법이구나야?”

이완영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금괴 한 덩이였다.

“넣어두라.”

“감사합니다, 대감!”

염인섭은 허둥지둥 금괴를 품에 넣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카메라는 곧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이완영의 얼굴을 비추는데,

‘뭐지?’

모니터링을 하던 우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옆에 있는 다희를 쳐다보았다.

“다희야. 뭔가 좀….”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오빠도 이상한 거 느꼈죠?”

그녀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컷!”

아니나 다를까.

헤드셋을 벗으며 촬영을 잠시 중단시킨 임 PD가 배우들을 향해 다가갔다.

“종훈 씨, 잠시만요. 여기서….”

그는 안종훈에게 세세한 디렉션을 준 뒤, 다시 연출 테이블로 돌아왔다.

“갑시다. 레디, 액션!”

재개된 촬영.

하지만….

“컷! 다시!”

이후에도 몇 번씩이나 테이크는 반복되었지만,

“다시!”

임 PD의 입에서는 끝내 ‘오케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긋했던 그의 목소리에 점점 짜증이 섞여 나왔다.

어느덧 열두 번째 테이크까지 반복되었지만, 끝내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하아….”

그러자 임 PD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헤드셋을 벗었다.

- 탁!

동시에, 그가 손에 쥔 대본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화기애애했던 현장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안종훈을 토닥이던 성철도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모습이었다.

“종훈 씨! 대체 뭐가 문젭니까?”

“…….”

안종훈은 말없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잠깐만, 임 감독. 10분만 쉬었다가 갑시다.”

성철이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훈이 너 담배 피우냐?”

“예….”

“따라와 봐.”

그가 안종훈을 데리고 촬영장 밖으로 사라졌고, 자리로 돌아온 임 PD는 화를 참으며 촬영분을 리와인드하고 있었다.

“우진아, 다희야.”

별안간 준안이 형이 작게 속삭이며 두 사람을 불렀다.

고개를 까딱이는 걸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따라 촬영장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왜 저래?”

준안이 형이 입을 열었다.

묻는 걸 보니, 형은 차에서 쉬다가 방금 나온 모양이었다.

배우가 촬영 중일 때, 매니저들은 차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보통이니까.

마치, 군대에서 운전병들은 훈련 중에도 일찍 취침에 들게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랄까.

오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촬영장 분위기가 갑자기 안 좋아진 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별일 아니에요. 그냥 NG가 계속 나서 그런 거지.”

“누가?”

“안종훈이요.”

“그럴 것 같았어. 너랑 다희가 그럴 리 없지!”

준안이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형.”

“왜?”

“옆에는 누구…?”

그의 옆에 우물쭈물한 모습으로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종훈이 형 매니저인 정수호라고 합니다.”

“아, 반가워요. 백우진이라고 합니다.”

“저는 신다희예요.”

“반, 반갑습니다!”

그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한눈에 보아도 어려 보이고, 매니저 경력이 짧은 느낌.

“성오는 잘 지내죠?”

“아, 네! 안 그래도, 오늘 우진 배우님 보면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나저나 수호 씨.”

“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우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수호에게 물었다.

“종훈이 말이에요. 연습 얼마나 한 거예요?”

“연습… 이라뇨?”

“지금 하는 대본이요. 종훈이가 얼마나 보고 왔어요?”

“아, 그게….”

수호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더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 * *

안종훈의 연기는 분명, ‘발연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신인상 출신에 주연 경력만 3년 차인 배우인데, 기본 이상의 수준은 당연히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특별출연이라서 분량도 적으니, 그에게는 어려운 연기도 아니었을 터.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촬영을 이렇게 지연시키고, 분위기까지 갑자기 안 좋아지게끔 만든 그 원인.

그것은 수호의 말 한마디에서 알 수 있었다.

“종훈이 형… 오늘 촬영장 오는 길에 대본 처음 보신 거예요.”

우진은 물론이고, 다희와 준안까지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

무려 일주일 전에 대본을 전달받았을 텐데, 촬영 당일 오는 길에 처음 봤다고?

“그럼 대사도…?”

“네… 오는 길에 외우셨어요.”

“그래서 그랬구만! 이제야 이해가 확 되네요.”

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우진과 그녀가 안종훈의 연기를 보고 느꼈던 이상함은 전혀 과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수호가 이어서 털어놓은 말들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그는 8 화 대본을 받자마자 염인섭이 등장하는 부분만 형광펜으로 칠해서 배우에게 넘겼다고 했다.

즉, 안종훈은 8 화 전체의 내용을 보지 않았던 것.

8 화 대본을 다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극 중 염인섭이 동지들을 배신하고 일제 밀정으로 돌아선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선에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유일 뿐, 진짜는 바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어린 딸의 병원비.

10년 만에 얻은, 금지옥엽(金枝玉葉)과도 같은 딸을 보낼 수 없었던 염인섭은 극한의 내적 갈등을 겪다가 결국 이완영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안종훈이 보여줬던 연기에는 그런 염인섭의 고뇌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금괴를 보는 순간, 딸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동지들을 죽게 만든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보여야 하거늘.

그런 모습 전혀 없이, 전형적인 일제 앞잡이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가짜 연기를 하고 있으니.

상대역인 성철은 물론이거니와 임 PD의 표정이 안 좋을 수밖에.

‘조금도 분석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단 말인가.’

겨우 세 씬 등장하는 특별출연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분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배우로서의 기본 자질 문제지.

“종훈이 형이 오면서 저한테 엄청 화냈어요. 배역이 맘에 안 든다고, 이게 말이 되냐고….”

“왜요?”

“…….”

수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세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우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편하게 말해요.”

“그게, 우진 배우님한테….”

안종훈은 자신이 밀정 역할인 것부터가 불만이었다고 했다.

덩달아 우진의 배역까지 거론하며 사소한 불만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고.

「김정완 역할은 여배우랑 애틋한 씬도 있고, 조국을 위해 싸우는 멋진 역할이잖아? 그런데, 왜 내가 맡은 염인섭은 동지들을 팔아먹는 일제 앞잡이 역할이냐?」

「형… 그건 연기니까 괜찮….」

「그래! 여기까진 상관없다 쳐! 그런데, 왜 하필 내가 백우진보다 못한 배역이냐고? 개 X발!」

「…….」

「야! 차 세워, 차 세우라고! 촬영 안 해, 아니 못 해! X발!!!」

운전 내내 종훈의 분노를 듣느라 힘들었다는 소감(?)으로 말을 끝내는 수호였다.

우진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희와 준안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헉!”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수호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왜 그래요?”

“저, 괜한 말 한 건 아니죠?”

다희의 물음에 그가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진은 그의 등을 토닥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끼리 한 말은 오프 더 레코드니까. 약속할게요.”

“진, 진짜요? 감사합니다!”

수호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준안이 형은 그런 그가 귀여운 듯,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나도 이럴 때가 있었는데.”

“갑자기 형 연대기로 넘어가는 거예요?”

“대화의 흐름 무엇?”

화기애애한 무드 속에서 웃음이 터졌다.

촬영장도 다시 이런 분위기로 바뀌었으면 좋겠건만.

“아무튼, 나는 이 친구랑 차에서 좀 더 쉬고 있을게.”

“네, 형.”

“이따 봐요, 오빠!”

준안과 수호가 주차장 쪽으로 사라졌다.

다희는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우진에게 물었다.

“안종훈은 오빠를 왜 그렇게 싫어한대요?”

“그러게나 말이다.”

“둘이 뭔 일 있었죠? 그쵸?”

“별거 아니야.”

“아, 뭔데요? 말해줘어어어~”

우진은 칭얼대는 다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때였다.

“오케이!”

그사이, 다시 촬영에 들어갔던 촬영장 쪽에서 임 PD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가까스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가자.”

“말 안 해줄 거예요?”

“오늘 촬영 다 끝나면 얘기해줄게.”

“진짜죠? 약속!”

우진은 다희와 함께 다시 연출 테이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과는 다른 류의 두근거림이 그의 걸음에 묻어있었다.

생각보다 안종훈을 많이 과대평가하고 있었구나.

인성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뭐, 놀랍지도 않았지만….

공과 사도 구별 못 할 줄이야.

‘이따가 보자, 종훈아.’

우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안종훈과 마주치게 될 밤 씬에서, 그가 무안해질 정도로 연기를 해볼 생각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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