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배우에게 있어 평가를 받는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 같다.
본질 자체가 타인으로부터 평가와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직업이니까.
필모그래피가 쌓이면 쌓일수록, 평가는 더 많아진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브라운관용 배우.’
혹은,
‘스크린용 배우.’
보통 둘 중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마련.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 때문에, 배우의 활동 반경이 영화와 드라마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는 결과를 낳는다.
캐스팅 단계에서는 연기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이미지니까.
흔히 그렇지 않은가?
영화에 더 많이, 혹은 영화에만 출연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드라마에서 활약이 뛰어난 배우가 있듯이.
물론 양쪽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도 모자라 연극이라는 무대 연기 영역까지 섭렵하는 배우도 존재하지만, 극소수다.
중요한 건, 영상 연기 영역에서 타인의 평가에 의해 굳어진 활동 영역을 배우 스스로가 깨고 나오는 작업은 굉장히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집> 연기자가 드라마용·영화용이 따로 있나?]
영진위 측에서 <붉은 꽃잎>의 공식적인 최종 흥행성적을 발표한 직후.
국내 최대 연예계 전문 언론사인 ‘투데이 엔터’를 통해 한 기사가 업로드되었다.
[연기자들은 모두 ‘배우’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연기를 하지만, 흥행성적에 따라 뒤따르는 말이 갈리는 경우가 다반사로… (중략), TV와 스크린에서의 영향력에 따라 속칭 ‘영화용 배우’, ‘드라마용 배우’로 나뉘는 것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문장들로 구성된 내용.
해당 기사의 조회 수는 금세 1위를 기록하며 각 포털 사이트 메인에 게시되었다.
특히 10대부터 30대까지 젊은 연령층 네티즌들의 관심이 주목되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단 두 작품만으로 ‘~용 배우’라는 이미지를 허문 백우진의 행보가 놀랍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이유다.]
기사의 결론에서 우진의 이름이 언급되었으니까.
- 탁.
그 시각.
플라워엔터테인먼트 이은철 대표는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서가 든 파일철을 내려놓았다.
정면에 앉아있는 매니지먼트 팀장 김태곤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은철 대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우진 배우가 우리 회사에 들어온 지 벌써 1년이 넘었지?”
“네, 1년 4개월 정도 됐습니다.”
“놀랍군.”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김태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은철 대표는 옆에 놓인 서랍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매니지먼트팀에서 매월 초마다 내부 기준을 적용해서 점수로 환산한 뒤, 대표에게 보고하는 ‘소속 배우 브랜드 순위’ 자료였다.
“1년 4개월 동안 16번의 평가, 그리고 16번의 1위입니다. 백우진 배우.”
“처음 보는 일이라서, 당황스러울 정도야.”
“저도 그렇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타고난 귀공자 같은 이은철 대표는 사실 매니저 업계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사람이었다.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인재.
회사를 설립한 뒤, 대표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무 경험과는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업계에 대한 그의 통찰력이 없어질 리 만무하다.
그의 밑에서 매니저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따라온 김태곤 역시 마찬가지의 인물이었고.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의논해서 만든 자체 내부 평가 기준은 굉장히 까다로운 편에 속했다.
단순하게 작품의 성적, 대중의 관심 등 눈에 보이는 요소들만이 적용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회사 직원들의 의견은 물론, 촬영 현장에서 배우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제작진, 더불어 단역 배우들과 보조출연자들의 의견까지 종합해서 반영하는 보고서였다.
김태곤 팀장이 매번 소속 배우들의 촬영 현장에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평가 보고서에서 우진은 매번 1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그것도 2위와 압도적인 점수 차로 말이다.
“백우진 배우 촬영 언제 들어가지?”
“프리 프로덕션 끝났다고 연락받았습니다. 다음 달에 크랭크인 예정입니다.”
“제작사에서 시나리오 최종본 넘어오면, 나한테도 보내줘. 궁금하네.”
“알겠습니다.”
이은철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올리자 따스한 햇볕이 마구 쏟아졌다.
“어떻게 될 것 같아?”
“네? 뭐가요?”
“우진 배우 차기작 말이야. 듣기로는 태곤이 네가 독립영화라서 아주 격렬히 반대했었다면서.”
“아… 그랬었죠.”
“우진 배우가 이번에도 놀라운 결과를 보여줄 것 같냐고 묻는 거야.”
이은철 대표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인 김태곤이 이내 답했다.
“네, 이번에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됩니다. 확신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우진 배우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서, 대표님께 따로 보고드리진 않은 얘기가 있는데….”
“뭔데?”
잠시 주저하던 김태곤이 이내 말을 이었다.
“사실 우진이에게….”
우진이 김태곤의 격렬한 반대를 한 번에 무마시키고 <그을리다>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내용을 이제야 알게 된 이은철 대표의 눈빛이 번뜩였다.
잠시 후.
“알겠어. 나가서 일 봐.”
“예.”
“아, 참. SJ 쪽은 계속 지켜보고.”
“알겠습니다.”
- 달칵.
김태곤이 대표실을 나섰다.
이은철 대표는 창밖을 바라보며 손에 든 텀블러를 흔들었다.
그의 입가엔.
기대감에 가득 찬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 * *
다음 날이었다.
전날, 영화 최종 스코어 발표에 이어 우호적 기사까지.
호재가 연이어 터지며 떠들썩한 상황이었지만,
“…….”
정작 이슈의 주인공인 우진은 외부에 관심이 일절 없는 듯,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것들을 돌아볼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크랭크인이 한 달 남은 이 시점.
항상 그래왔듯, 작품에만 몰두해야 할 시기가 다시 찾아왔으니까.
“후우.”
한 시간이 넘는 발성, 발음 훈련을 마친 우진이 잠시 숨을 고르며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고 보니, <원티드>를 준비할 때였었지.
수현이 누나 따라 회사에 처음 입성했었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 가장 부러웠었던 것이 회사 3층에 있는 누나의 개인 연습실이었는데.
어느새 그 옆에 본인만의 전용 연습실이 생기다니.
우진은 며칠째 이곳으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가상 세계에서 아무리 실제에 가까운 것들을 체험했다 한들.
체험은 말 그대로 이미 끝난 것에 불과하다.
배우에게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경험한 것을 다시 일깨우고, 그때의 생생한 감각을 캐릭터에게 투영하는 작업일 터.
<붉은 꽃잎>도 극장가에서 내려온 마당에, 이제 몸에서 연산군을 완벽히 지워내고 온전히 이건우만을 묻혀야 한다.
“올 때가 됐는데….”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해소한 우진이 시계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아침 10시 30분을 지나는 시각.
- 똑똑똑.
그때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두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오디션 이후 처음 만나는 그들.
원종우와 문희연 역에 캐스팅된 윤맑음새와 권혁진이었다.
“왔어요?”
우진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윤맑음새와 권혁진은 오디션 때보다 더 떨려 보이는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선배님, <붉은 꽃잎> 정말 대박이었어요!”
“보는 내내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연기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시는지… 부럽습니다.”
처음에는 연예인을 보는 팬의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뭐랄까.
동경하던 롤 모델을 마주한 느낌의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하하, 쑥스럽네요.”
우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누구에게든 연기에 대한 칭찬을 받을 때면, 항상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끄럽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 다들 좋게만 봐주는 것 같아서.
그 정도로,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아직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와, 근데 여기가 선배님만 사용하시는 연습실인 거예요?”
윤맑음새와 권혁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습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작년 모습과 겹치는 이 광경.
고작 1년 만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물씬 드는 순간이었다.
“네, 연습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서 해요. 나 없을 때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말해놓을 테니까.”
“정말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요즘 연습실 대관료도 비싼데, 이렇게라도 도와줄 수 있으면 좋죠.”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윤맑음새와 권혁진이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씩씩하고 풋풋한 두 후배를 보며 우진은 다시 한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그럼, 대사 한번 맞춰볼까요?”
“네!”
우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틀 뒤에 있을 <그을리다> 첫 대본 리딩을 위한 연습이 시작되었다.
윤맑음새와 권혁진은 이때까진 몰랐다.
우진의 연습 방식은 엄청난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30분 정도가 흘렀을 때,
“헉헉… 이건 말도 안 돼….”
“이걸… 진짜 매일 하신다고요?”
“네, 전 두 사람 오기 전에 이미 한 시간 연습했어요.”
벌써 녹초가 된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을 일으키며 연습을 진행하는 우진은 쌩쌩했다.
그 모습에, 윤맑음새와 권혁진은 혀를 내둘렀다.
“와… 선배님의 연기력에 숨겨진 비밀을 드디어 알겠어요.”
“천재가 노력까지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하하, 너무 과분한 칭찬인데요? 얼른 일어나요.”
처음 겪어보면 꽤 힘들 수 있는 훈련이었지만, 우진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진행 덕이었을까.
두 후배는 내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대사 다시 한번 맞춰볼까요?”
“네, 선배님!”
즐거운 연습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 * *
“팀장님, 여기 계셨어요?”
“어? 어.”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김태곤 팀장은 이민성 차장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가 보고 있던 광경.
우진이 두 후배와 대본을 리딩하는 모습이었다.
이민성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이거 데자뷰인가요?”
“뜬금없이 뭔 소리래?”
“뭔가, 작년에 비슷한 광경을 봤었는데 말이죠.”
김태곤이 피식 웃자 이민성이 말을 이었다.
“그때 우진이를 발굴하셨던 팀장님의 눈으로! 이번에도 실력 발휘하시는 겁니까?”
김태곤이 별안간 이민성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아아!”
“1절까지만 하면 참 좋을 텐데. 넌 항상 2절을 넘기더라?”
“하아.”
“됐고, YTV에서 제안 온 거 확인해봤어?”
“네, 류 감독 측에서 요구한 게 맞답니다.”
김태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가서 일 봐.”
이민성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먼저 자리를 떴다.
이내 김태곤은 연습실로 들어섰다.
“우진아.”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우진이 김태곤에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이어,
“인사해요. 이쪽은 우리 회사 매니지먼트팀의 김태곤 팀장님.”
“안녕하세요! 배우 권혁진이라고 합니다.”
“저는 윤맑음새입니다!”
“아, 반가워요, 김태곤이라고 해요. 이번에 우진이하고 같이 영화 들어가는 신인 배우분들?”
“네, 그렇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태곤과 윤맑음새, 권혁진이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이어, 김태곤이 우진에게 말했다.
“우진아, 잠시 시간 돼?”
“네, 팀장님.”
“밖에서 잠시 얘기 좀….”
“그러시죠.”
우진은 그를 따라 연습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김태곤이 입을 열었다.
“큰일은 아니고, YTV 측에서 프로그램 섭외가 와서 어떤지 물어보려고.”
“섭외요? 저한테요?”
“어.”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우진의 물음에, 김태곤이 말을 이었다.
“다큐멘터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