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갑자기 나타난 이정혁이 손민석을 겨누고 있던 본인의 총구 앞을 가로막고 선 것부터가 이진태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만.
그것만으로는, 손민석을 죽임으로써 ‘복수’의 끝을 달성하겠다는 결심을 절대 흔들 수 없었다.
물론, 그 끝에는 본인의 죽음도 포함임을 각오한 지 오래였고.
그런데,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진심이 느껴지는 이정혁의 말 한마디에, 이진태의 심정이 처음으로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뭐, 뭐라고?”
“살려주세요, 아버지. 대통령이 아닙니다. ‘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살려달라는 대상이 ‘대통령’이 아닌, ‘이정혁 본인’일 줄이야.
현재 상황의 구도를 완벽하게 뒤집어버리는 말이었다.
‘음?’
‘뭐지? 대사가 다른데?’
우진과 이강식, 그리고 정재민.
촬영 현장에 있는 모두가 세 사람의 연기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우진이 직접 쓴 대사를 사전에 전달받았던 두 사람.
우승현 PD와 스크립터가 눈이 마주친 채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내 스트립터가 속삭이듯 물었다.
“감독님, 이대로 가요?”
“어, 일단은.”
“네, 알겠습니다.”
“틀리지 않게 잘 적어줘. 한 글자라도 놓치면 안 돼.”
어차피 해당 씬에서 우진의 대사는 본인들과 촬영 감독, 고작 셋만 미리 알고 있었던지라.
사실 대사가 어떻게 되든, 바뀌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 씬의 기본 전제는 ‘애드리브인 상황’이었으니까.
이강식 선배도 우진의 대사를 처음 들음으로써 오는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이정혁의 대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에 들어가겠다고 했었고.
다만, 분석과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하는 배우가 사전에 알려준 대사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이 궁금해진 우 PD는 흥미로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시선을 떨군 이진태를 향해,
- 척!
이정혁이 품에서 총을 꺼내 겨누었다.
그 행동에, 격하게 흔들리던 이진태의 동공이 다시금 고정되었다.
“절 구하기 위해서 심장에 총까지 맞았던 그런 아버지께… 맞서기 위해 지금, 이렇게 총을 겨눠야만 하는 아들의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총을 잡은 이정혁의 손과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가 한 번쯤은, 복수보다 저를 더 생각해주시길 바랐어요. 딱 한 번만, 저를 위해서 멈춰주시진 않을까 하고…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단 말입니다!”
이정혁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물이 당장에라도 폭포수처럼 쏟아질 듯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정작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캬!”
김수림 작가가 짧게 감탄 소리를 내며 표정을 찡그렸다.
서민경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건 안 비밀.
스승이 본인 창작물의 일부분을 타인이 적도록 허락한 것도 꽤 놀라운 일이었거늘.
보통 이런 경우엔, ‘어디 한번 지켜보겠다’, 뭐 이런 표정이 나와야 정상이지 않은가.
그런데 하물며, 그 대목을 보면서 이렇게나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시다니.
그 정도로 김수림의 얼굴에 드리운 감정은 짜릿함을 넘어선, 마치 ‘카타르시스’ 같았다.
비단, 작가진뿐만이 아니었다.
우진의 절제된 연기가 이정혁의 슬픔을 극대화했다.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마음껏 울지 못하고, 힘겹게 감정을 누르고 또 누르면서 말을 꺼내야 한다니.
흐르지 않는 눈물이 오히려 슬퍼 ‘보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슬픔의 정점을 찍는 느낌을 준다.
말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슬프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보는 사람들 모두가 슬픈 감정을 느끼게끔 하고 있다.
배우는 흐르는 감정을 절제하며 보여주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관객과 시청자는 캐릭터의 쏟아지는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연기.
카메라 속 우진은 항상 자신이 지향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연기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우진도, 이강식도, 정재민도.
그래서일까.
연출진이 일부러 의도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두 후배와 톤이 약간 달라 이질감을 만들어 냈던 정재민 선배님의 대사도 어느 순간부터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세 명의 배우가 내뿜는 에너지가 화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그 찰나,
- 찰칵, 척!
이정혁이 갑자기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대었다.
“지금 뭐 하는 게냐!”
당황한 이는 이진태와 손민석만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창문을 통해 이진태를 조준하고 있던 수 개의 붉은 점들 역시 갑작스러운 이정혁의 행동에 초점을 잃은 듯,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이진태의 흔들리는 얼굴 앞에서, 이정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 저의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제 손으로, 스스로 끝내겠습니다.”
손민석을 향한 이진태의 복수심만큼이나, 아버지를 막기 위한 아들의 의지도 강력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정혁으로서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 어떤 설득도 먹히지 않는다면, 남은 건 하나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직접 부딪히는 것.
마지막 카드를 내뺀 이정혁은 그만큼 훨씬 더 처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눈에만 보이는 이강식 선배의 얼굴 옆 파란 창.
그 안의 메시지를 적는 실제 이정혁의 마음을 떠올리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연이어 몰아치는 형세처럼 우진에게서 간절한 설득이 절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크윽.”
이진태가 고통스럽다는 듯,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복수 앞에서 망설일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늘 다짐해왔는데.
30년 만에 처음 겪는 작금의 상황은, 그에게도 상상 이상으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고맙네.”
별안간 손민석이 뒤에서 이정혁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
“그리고, 미안허이.”
이내 그가 이정혁을 옆으로 밀쳤다.
이진태와 손민석 사이에 있었던 이정혁이라는 벽이 치워졌다.
자연스럽게, 이진태의 총구는 다시 손민석의 심장을 겨누는 구도가 되었다.
이정혁이 밀려 넘어짐과 동시에,
“진태, 쏘게. 그동안,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외면했던 내 업보. 자네 손으로 직접 심판하게나.”
손민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었기에,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냐만… 정말 미안하네. 자네에게도, 내 한순간의 선택으로 소중한 목숨을 잃는 대원들에게도. 진심이야. 정말, 미안해.”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내 비루한 목숨을 끝으로, 부디 이쯤에서 멈춰주시길. 그럼….”
손민석이 말을 맺었다.
갈 곳을 잃은 듯, 흔들리던 붉은 조준점들이 어느새 이진태의 가슴과 머리에 고정되어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이진태가 포효했다.
그의 붉어진 눈망울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30년간 흘리지 않고 참아왔던 눈물이,
- 툭.
땅에 닿은 찰나.
“아, 안 돼!!!!!”
“죽어!!!!!”
“…….”
“아버지!!!!!”
울분이 폭발한 이진태.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손을 뻗는 이정혁.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서 있는 손민석.
그리고, 어딘가에서 이진태를 겨눈 채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어느 이름 모를 저격수까지.
이들의 모습이 빠르게 교차되면서 이정혁과 이진태의 외침이 내레이션처럼 반복되는 와중,
- 탕!
한 발의 총성이 메아리쳤다.
길고 길었던 청와대의 밤을 장식하는 소리이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린 총성이었다.
화면이 점점 희미해지며….
그대로 Fade Out.
* * *
총성이 남긴 여운이 가실 때쯤, 이강식의 얼굴 옆에 떠 있던 희미한 창 역시 사라졌다.
“컷!”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고,
“…….”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 있는 세 명의 배우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들에게 남은 감정을 추슬렀다.
이윽고,
“선배님, 어떠셨어요?!”
“후기! 후기가 시급해!”
모니터실에서 후다닥 뛰쳐나온 우 PD와 김수림, 서민경 작가가 이강식에게 달려와 물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있었다.
“후우, 우진이 고생했다.”
“아닙니다. 선배님들께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항상 우진을 아들이라고 부르던 이강식이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우진의 어깨를 토닥이는 그의 손에서 왠지 모를 후련함이 전해졌다.
“선배님, 우진 씨 대사 어떠셨어요?”
서민경이 이강식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화면으로만 봤어도 어마어마한 감정이 느껴지는 두 사람의 연기였으니, 그 감정을 온전히 정면에서 마주했던 이강식의 후기가 그 무엇보다 궁금했을 터.
이강식의 소감을 바탕으로 결말 씬을 정해야 하니, 대답을 종용하는 것이 작가진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이강식이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아, 뭐라고 해야 하지 이걸?”
그의 입에 두 작가는 물론, 감독의 시선까지 그대로 꽂혀있었다.
“그거 하나는 확실해. 내가 이진태라면….”
“네네!”
- 꿀꺽.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김수림과 서민경의 눈빛.
“못 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 형님이라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이강식 선배가 정재민 선배님에게 물었다.
“나도 강식이 너랑 같은 생각이야. 그 순간에 우진의 눈빛을 직접 봤다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
정재민 선배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직접 그 생생한 상황과 부딪쳐 본 배우들의 의견은 동일했다.
우진 역시 본인이 이정혁이 아니라 이진태라고 한다면, 절대 못 쏠 것 같다는 의견을 더했다.
김수림과 서민경이 동시에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환호했다.
“좋았어! 결말 그림 그려졌어!”
“선생님, 저랑 생각 같으신 것 같지 말입니다?!”
영감을 받은 듯, 그녀들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수고했어요, 마무리는 우리가 짓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진은 미소로 화답했다.
‘다행이다.’
모두의 충분한 납득과 이해가 동반된 상태에서 이정혁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선의 결말로, 그리고….
이진태가 사는 방향으로 끝날 것 같다는 느낌이 안도의 미소를 짓게 해주었다.
- 위이잉.
우진의 품 안에 있는 다이어리가 다시 한번 작은 불빛을 내뿜었다.
이정혁의 화답인 마냥.
* * *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프로덕션 기간만 5개월이나 되었던 대장정.
한 차례 제작이 미뤄졌던 것까지 감안하면, 탄생하기까지 무려 1년이란 시간이 걸렸던 드라마.
우진에게는 생애 첫 해외 촬영,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진 및 배우들과의 작업, 데뷔작 인연들과의 재회 등.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 준, <저스티스>의 화려한 커튼콜이 내려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지막 씬의 촬영지는 서산의 어느 초원.
간이 세트장 주변이 대형 크로마키로 둘러져 있었다.
극 중 배경이 여름의 초원이기에, 포스트 프로덕션 때 CG 처리될 예정.
“액션!”
우 PD의 신호가 떨어졌다.
근접 풀샷 A캠과 두 인물을 각각 바스트로 잡는 B캠, C캠 속에는,
“바람이 선선한 것이, 참 좋구나.”
“저도요. 아버지와 함께 오니까 더 좋아요.”
휠체어에 편히 앉아있는 이진태와 그 뒤에서 손잡이를 붙잡고 서 있는 이정혁.
초원 언덕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부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 쏴아아.
따스한 햇살, 잔잔한 바람.
부자의 행복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아버지, 저쪽으로 한번 가볼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자, 갑니다. 꽉 잡으세요!”
“하하하!”
B캠과 C캠이 자연스럽게 아웃되었다.
근접 풀샷을 잡는 A캠 앵글 속, 부자의 뒷모습이 점점 화면 너머로 멀어졌다.
카메라 화면이 조금씩 멀어지면서 드넓은 초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프레임을 꽉 채웠다.
잠시 후,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크랭크업!!!”
“와아아!”
커튼콜이 펼쳐졌다.
이정혁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진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