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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의 다이어리-166화 (166/333)

166화

봉사활동 차원에서 보육원을 방문한 것인데, 우진과 우희가 할 만한 일들이 딱히 없었다.

그나마 남매가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열댓 명의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쌓기.

그거 하나뿐이었다.

“선생님!”

“소꿉놀이!”

“아니야, 블럭놀이 하자!”

“난 숨바꼭질!”

“우희 언니, 뭐 하고 놀 거예요?”

보육원 아이들은 무척 해맑았고, 다들 붙임성이 좋았다.

체력들도 얼마나 좋은지,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도 얼굴에 지친 기색 하나 없었으며.

한 명이 뭔가를 시작하면 우르르 따라 하는 모습을 보이는 터라, 무슨 놀이든 단체활동이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자자, 그러면 공평하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자!”

그 선두에 서 있는 백우희가 제일 신나서 날뛴다는 것이었다.

“우진 선생님이 술래 해주떼여!”

뜬금없이 애교를 부리며 몸을 흔들기에 이르렀으니,

“우웅, 선생님?!”

“…….”

…드디어 누나가 미쳐버린 건가?

왜 애들도 아니고 네가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건데.

우진은 표정 관리에 실패하였다.

우희의 애교를 보자마자 찡그려진 얼굴이 아주 적나라했다.

그녀가 슬쩍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장단 맞춰라. 동생아?”

이를 악물고서 내는 누나의 나지막한 음성.

안 그래도 조금 전, 몸을 깔아뭉개버린 업보를 쌓았었기에 우진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하하하… 우희 어린이 말대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해볼까요, 여러분?!”

“네!”

“좋아요!”

생존을 위해서, 누나의 애교에 억지 장단을 맞춰줘야 했다.

아, 몰려오는 자괴감.

배우가 직업이라 참 다행이라 느껴진 순간이었다.

못 볼 꼴(?)을 봤음에도, 그나마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가 있어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우진은 계속 술래를 해야 했다.

* * *

감정의 폭이란 게, 정확히 뭘까?

대충 그은 일직선을 분해하면 무한개의 점으로 나눌 수 있다는 수학적인 개념과 같다고 생각한다.

흔히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큰 틀에서 ‘희로애락’이라고 구분하지만, 그 범주 안에는 가히 무한개에 가까운 감정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기쁨이라는 감정만 보더라도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

아주 큰 기쁨이 있으면, 반대로 아주 사소한 기쁨도 있을 테니까.

동일한 선상 위에 놓여있는 감정이라 한들, 상황별로 표출되는 바와 정도가 전부 다르다.

그것을 정확한 수치로 나타낼 수가 없기에, 인간이 표출할 수 있는 감정의 개수는 결국 무한개로 뻗어나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배우들은 보통 작품 외적인 공간에서의 삶, 즉 현실의 일상에서 드는 오만가지 감정들을 최대한 기억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있다.

연기의 본질은 ‘허구를 구현하는 것’이고, 대부분 ‘내’가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실제로 겪는 것처럼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기에.

카메라 앞에서 어떠한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 그 상황에서 캐릭터가 느꼈을 감정과 최대한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려 한다.

무한개의 감정 중에서 딱 하나를 꼽으려면, 단순히 상상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 경험에 빗대어내는 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지금 어떤 상태지?’

‘내 표정이나 몸짓이 어떻지?’

어떠한 대상을 지켜보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

무언가를 관찰하려는 태도가 곧 습관이 된다는 말이다.

관찰의 대상은 당연히 ‘나’ 자신이 될 수도, 타인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지금… 이게 맞나?’

때로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서까지 무언가를 관찰하려는 습관이 튀어나오기도 한다는 게 문제.

극단적으로 말해보자면, 가족이나 친지 혹은 지인의 장례식장에 간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조차 문득,

‘아, 잠깐만. 나 지금….’

현재 ‘나’의 감정 상태가 어떠한지를 자각하게 된다.

이어서, 지금의 ‘내’ 감정과 상태를 기억하려는 욕구가 차오른다.

망자(亡者)를 향한 슬픔과 애도가 1순위가 되어야 하는 곳에서, 훗날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연기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 이 상태를 떠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1순위로 두게 되는 것이다.

꽤 자주 있는 일이다.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싶으면서도, ‘내’가 배우라서 어쩔 수가 없구나 싶어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하러 왔고, 아이들을 만나러 왔다.

이게 1순위가 되어야 하고, 그 자체에만 온 신경을 쏟고 싶은 것이 우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의지와는 별개로 솟아오르는 다른 욕구가 슬금슬금 튀어나온다.

바로, 승훈이라는 아이를 옆에서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박승훈, 일곱 살 남자아이.’

보육원에서 돌보고 있는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폐증을 앓고 있다.

승훈이는 평소에 주사위를 가지고 노는 걸 제일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즐긴다고.

보육원장님께서 아이들에 대해 설명하실 때 알려주신 내용이었다.

‘어, 잠시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었다.

승훈이에 대한 정보들이 귀로 들어옴과 동시에 작품이 떠올랐고, 젊은이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내’가 연기할 캐릭터와 약간의 공통점을 가진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옆에서 관찰할 수 있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으니까.

배우라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무거워졌던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공과 사는 완벽히 구별하는 게 좋은데, 배우라서 감정의 폭만큼은 그러지 못한다는 핑계가 참 웃기지 않는가.

「네가 미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어. 애들이 오히려 우리가 간다는 거에 좋아한다잖아.」

「오늘 하루, 아이들한테 최선을 다해서 진심으로 다가가면 돼. 어차피 한 번만 가고 안 갈 거 아니잖아? 앞으로 꾸준히 방문해서 선물도 주고, 추억도 쌓고 그러면 되는 거야.」

「봉사활동이란 게, 가서 할 수 있는 거 열심히 하면서 나도 뭔가를 배우는 거 아니냐고? 괜히 마음 무거워져서 그렇게 어두운 얼굴 할 거면 차라리 가지 마. 그거 아니라면,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말고.」

네가 승훈이에게서 뭔가를 뽑아먹으려는 목적으로 가는 게 전혀 아니잖냐.

거기서 오지 말라는데 억지로 우겨서 가는 것도 전혀 아니고.

그러니까, 애초에 걱정할 필요도 없는 걸 가지고 마음 쓰지 말고.

차라리 승훈이와 어떻게 하면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라.

이러한 우희의 일침 덕에, 우진은 어설픈 죄책감 따위를 던져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으아아아악!”

“헤헤헤!”

“잡아랏!”

우진은 아주 필사적으로 술래 역할을 도맡았고, 아이들을 두 팔과 등에 매달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마치 평소에 연기를 대하는 자세처럼, 최선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로서도 이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본인도, 이 상황을 즐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맘껏 뛰노는 남매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보육원장의 입가엔 미소가 몇 번이고 지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얘들아, 점심 먹자.”

“네!”

“오늘은, 선생님들께서 우리 꼬마 천사님들을 위해 맛있는 피자를 사 오셨어요!”

“와!”

“다들 인사합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신없이 아이들과 한데 섞여 놀다 보니, 벌써 뒤늦은 점심때가 찾아왔다.

우진과 우희는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나이스.”

음식을 세팅하고 있었던 반가운 얼굴이 우진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저음의 목소리로 읊조렸다.

준안이 형이었다.

오늘 누나와 보육원에 간다니까, 점심에 피자를 사서 오겠다고 했었다.

아이들을 정말 좋아해서 본인도 가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었는데,

“우희 씨, 안녕하세요!”

“준안이 오빠! 언제 왔어요?”

“하하, 10분 전에 왔습니다. 우진이가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저저, 저놈 저거. 하여튼!”

“아무튼, 이쪽으로 앉으시죠!”

“같이 앉아요!”

“그럴까요?”

뭐야?

도와달라고 한 적이 전혀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내’ 핑계를 대는 준안이 형이었다.

…아이들이 좋아서 온 거 맞아?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온 것 같기도.

우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우희의 옆에 앉으려 다가갔다가, 이내 방향을 틀었다.

왜냐하면,

“아, 우진 선생님! 잠시만요.”

“네?”

“승훈이가 좀 전에 깼거든요. 승훈이랑 같이 드시겠어요?”

보육원장이 그에게 다가와 한 말 때문이었다.

우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그럴게요.”

“알겠습니다. 지금 데려올게요.”

보육원장이 식당을 나섰다.

우진은 설레는 마음으로, 식당 한편의 빈 자리에 앉았다.

승훈이가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아 한다고 들어서다.

- 끄덕.

눈이 마주친 우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고, 아이에게 집중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우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희는 곧장 시선을 돌려 양옆에 앉은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음식을 먹였다.

준안이 형과 웃으며 대화도 이어나갔다.

…집에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본 적이 없는 미소의 연속이었다.

얼씨구?

정분나겠다, 아주.

그러고 보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나와 준안이 형이 급속도로 친해진 것 같단 말이지?

영국에 가 있던 두 달 사이에 뭐가 있었나….

“흐음.”

우진이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 툭툭.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보육원장님의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아이가 보였다.

얘가 승훈이구나.

우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승훈아. 이쪽은 백우진 선생님이야. 오늘, 승훈이 보고 싶어서 오셨대요!”

“승훈아, 안녕!”

“…….”

아이는 쑥스러운 듯, 보육원장님의 다리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히 내보였다.

원장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승훈아, 인사해야지.”

“…안녕, 하세요.”

아이의 조그마한 입술이 우물쭈물하며 움직였다.

으아, 너무 귀엽잖아!

우진이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진심으로 나온 액션이었다.

“승훈이, 선생님하고 같이 밥 먹을까요?”

끄덕끄덕.

승훈이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우진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윽고 무릎 위에 앉히자, 승훈이는 피자에 급 눈독을 들였다.

우진이 승훈의 그릇에 피자를 올려주었다.

먹기 좋게 잘게 잘게 썰어놓은 피자를 보고, 아이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릇에서 입으로 움직이는 포크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식사 내내, 우진은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 * *

“가자!”

우희가 준안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르르르-’ 민족 대이동이었다.

잠깐 흘겨봤을 때, 준안이 형이 선두에 서 있었고 나머지가 뒤따라가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는 준안이 형이 아무래도 ‘괴물’ 역할을 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만나길.

“승훈이도 같이 가서 놀까?”

도리도리.

우진의 제안을, 아이는 거절했다.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짜였다.

대신, 우진의 팔을 붙든 승훈은 2층으로 올라가자고 보챘다.

우진은 아이를 안아 들었고, 2층으로 올라섰다.

‘그림방’이라는 팻말이 달린 문 앞에 서자 아이가 만족스러워했다.

“그림 그리고 싶어요?”

“…네.”

아이가 짧게 말했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그림방에 들어섰고, 스케치북을 펼쳐 아이의 앞에 놓았다.

크레파스, 물감, 붓 등등.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료들은 전부 펼친 뒤, 승훈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자, 그림을 다 그리면 선생님한테 보여줘!”

기다렸다.

아이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혹은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다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

아이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고,

“승훈이 왜요? 혹시, 선생님이 안 가져온 거나 필요한 게 더 있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뭐지, 갑자기?

‘내’가 혹시라도 실수한 걸까?

우진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때였다.

승훈의 입이 들썩였다.

“…려.”

“응? 다시 한번만 말해줄래요?”

우진이 머리를 숙여 승훈의 입가에 귀를 좀 더 가까이했다.

“…그려요.”

그러자 아이의 귀엽고도 선명한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같이, 그려요. 혼자… 아니야.”

우진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는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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