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의 다이어리-190화 (190/333)

190화

세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영화의 타이틀이 화면 중앙에 소개된다.

[The Vanishing Smear]

검은 바탕에 뜨는 하얀 글씨가 강렬한 위압감을 선사한다.

스크린이 서서히 밝아지며,

- 뚜벅뚜벅.

바닥과 걸음이 맞닿으면서 생기는 부드러운 구두 소리.

마치 ASMR을 듣는 것처럼, 귀를 연신 자극한다.

화면이 살짝살짝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슬금슬금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한다.

“오호, 처음부터….”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안톤 앱티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켄 로브 역시 무언가를 읊조리려다가 말았는지, 그의 입은 살짝 움찔거릴 뿐이었다.

맥 오브라이언만이 별다른 반응 없이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의 한쪽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스크린에서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는 기분이 그를 감싸고 있었으니까.

비단 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첫 장면에 들어서는 순간에서부터 몰입과 집중을 단번에 끌어올리는 영화의 시작은,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에게서 고요한 호흡이 흐르게끔 했다.

보통의 경우와 매우 다른 출발, 즉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앵글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

금세 잦아든 구두 소리와 함께 아래로 내려지는 앵글.

주인공이 고개를 숙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러자, 그의 멈춘 두 발에 신겨져 있는 검은색 구두가 화면에 나타났다.

다시금 그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다.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이전까지는 살짝살짝 보였었던 주변의 전경이 그제야 확실하게 나타난다.

무성하게 자란 푸른 잔디가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의해 흔들린다.

잔잔한 화면 속 색감이 주인공의 차분한 숨소리에 한층 평안한 느낌을 더해준다.

휘날리는 잔디 사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여러 개의 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다.

- 스윽.

그중, 주인공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돌에 양손을 올렸다,

하얀 장갑으로 덮인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돌을 쓰다듬는다.

“저 왔습니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묵직하게 내뱉는 한 마디가,

[매 순간 명예롭고, 신뢰가 두터웠으며, 시민의 안전을 위해 평생 헌신해온 그대여. 이곳에 편히 잠드소서. 당신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문구를 비추는 화면과 어우러지며, 그 의미가 자막으로 떠오른다.

이윽고,

- 뚝, 뚝.

날씨는 여전히 화창하거늘.

갑자기 묘비 위로 알 수 없는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뭐지?’ 싶은 찰나.

묘비를 비추던 시퀀스가 전환되면서, 주인공 백성호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여태껏 1인칭 시점이었던 앵글이 드디어 3인칭으로 바뀐 것이다.

“아버지….”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서 있는 백성호가 묘비 앞에서 소리 없이 흐느낀다.

눈물이 자욱한 얼굴, 그리고 슬픔과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이 관객들의 가슴을 적신다.

그러나,

“배우의 표정이… 뭔가 낯이 익은데?”

“나도. 분명히 처음 보는 표정인데,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야.”

동시에, 관객들은 의아해졌다.

처음 보는 영화, 처음 보는 배우.

그러나, 지금 스크린 속에서 울고 있는 백성호의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강한 기시감이 몰려온다.

로브와 앱티드에 반해 감정의 변화가 비교적 적었던 맥조차,

“……!”

영화 시작 5분 만에 처음 등장한 주인공의 표정을 본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내 관객들은 깨달았다.

백성호의 저 표정은….

‘아, 포스터!’

그랬다.

영화제 거리에 대문짝만한 크기로 붙어 있었던 것은 물론, ‘버라이어티지’를 포함한 여러 영화 전문지에서 꼽은 ‘임팩트 넘치는 포스터 Top 5’ 중 하나였었던 <가려진 자국> 포스터.

그 속에 담긴 백성호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던 표정이, 지금 영화에서 나타난 표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맥이 헛웃음을 지었다.

영화음악 작업을 간간이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아니다.

본업은 뮤지컬이니까.

그래도 업계 현직에 몸을 담고 있는 만큼, 영화에 대한 식견이라면 당연히 일반인들보다야 훨씬 낫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런 자신조차도, 시작부터 1인칭 시점으로 흘러가는 영화의 전개에 놀랐다.

참신했고, 신선했으며, 의외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모습을 무려 5분이나 지난 시점에서 보여주더니.

이제는 첫 등장에서 보이는 모습이 포스터를 장식했었던 표정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양옆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놈들(?)과는 달리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면서 영화를 관람하려던 맥은 끝내,

“…안 봐도 알 수 있겠어.”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러자, 그 말을 귀신같이 들은 앱티드가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뭐가?”

“감독과 배우가 공을 얼마나 들였을지 말이야.”

“자네가 영화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할 줄도 알다니. 이거야말로 놀라운 현상 아닌가.”

“입 닥치고 고개 돌려, 앱티드.”

“자네, 지금껏 내가 만든 영화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단 말일세. 혹시 알고는 있나?”

“제발… 닥쳐. 보는 데 방해되잖아. 자꾸 그러면, 그냥 나가겠어.”

“하하하, 까칠하기는. 하긴, 그게 맥이지!”

앱티드가 고개를 돌렸다.

영화 관람이고 뭐고 한 대 쥐어박을까 잠시 고민하며 찌푸려진 미간을 들썩이던 맥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짧고 굵은 임팩트를 선사한 씬이 지나간 뒤였다.

잔잔하고 평화로웠던 씬 뒤에, 곧바로 찾아온 씬은 한없이 치열하고도 뜨거웠다.

주인공이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는 샷과 그런 주인공을 비추는 3인칭 시점의 샷이 번갈아 나오면서 스크린을 빈틈없이 채웠다.

1초도 되지 않을 아주 짧은 시간에도 생사를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하는 사선.

그곳에서 화마(火魔)와 치열하게 싸우는 백성호의 땀과 눈물의 무게가 극장 전체를 숙연케 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물이 닿으면, 순식간에 수증기로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아무리 방화복이라 할지언정, 높은 온도의 수증기가 닿으면 화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어느 씬에서는 그렇게 생성된 뜨거운 수증기가 그야말로 쏟아지는 수준에 이르러 백성호를 덮칠 때도 있었다.

호스를 놓친 그가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치자 관객들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진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 관객도 있었고, 양팔로 어깨를 감싸며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관객도 있었다.

또 어떤 씬에서는,

“제가 오늘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제발! 신께서는 부디 아이들이 무사히 부모님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울분을 토하듯 간절한 외침의 내레이션이 더해진 화면 속에서, 일그러진 얼굴의 백성호가 동료들과 함께 화마로 뒤덮인 철문을 부수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연기를 뚫고 지나간 그가 의식이 없는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관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신은 없어. 그딴 건 없다고, X발!!!”

으아아악-!

아이의 심장이 끝내 뛰지 않음을 자각한 백성호가 땅에 드러누워 울부짖을 때, 관객들은 절망감에 빠졌다.

순식간에 희비가 갈리는 현장.

생생한 참혹함이 백성호의 대성통곡을 따라 배가 되어 관객들의 가슴에 꽂힌다.

“연기가 미쳤군….”

로브의 말에, 힐끔 시선을 돌린 맥이 고개를 끄덕였다.

웨스트엔드에서 <노트르담 드 파리> 뒤풀이 때마다 릴리가 지인이랍시고 데려온 동양인.

코리아에서 온 액터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딱히 관심 가진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체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을뿐더러, 영화나 드라마를 했다고 들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뮤지컬하고는 너무 다르니까.

활동 영역부터 지역과 국가까지 전부 다르기에, 그와 같이 비즈니스를 할 일도 없고.

하나,

‘저 친구….’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어디든 상관없이, 배우로서 갖춰야 할 덕목 1순위는 연기력이다.

맥의 머릿속에,

‘마치 릴리를 보는 것 같군.’

자신의 스승이자 웨스트엔드의 터줏대감이라 불리우는 뮤지컬 제작자인 새뮤얼 위긴스가 오래 전에 개최했었던 오디션이 떠올랐다.

릴리라는 이름의 참가자가 단숨에 심사위원단을 매료시켰던 그때, 맥은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노래 첫 소절을 시작하자마자 충격을 주었었던 임팩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릴리를 처음 봤을 때와 버금가는 충격이 백성호에 완벽하게 빙의한 우진의 연기력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저 친구, 혹시….”

맥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뮤지컬도 가능할까?”

그때였다.

영화는 어느새 또 다른 씬으로 넘어갔다.

- 짠!

수줍은 미소를 지은 백성호가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17개의 초에서 나오는 불빛이 그가 머리에 쓴 분홍색의 고깔모자를 비추었다.

“…누나, 생일 축하해.”

대사를 들은 직후.

맥은 소름이 돋았다.

* * *

라호찬 감독부터가 단연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꼽은 ‘눈물의 생일파티’ 씬이 지나갔다.

관객 대부분이 비로소 영화의 구성이 기쁨과 슬픔이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기쁨이나 즐거운 감정이 나타나는 화면의 색감은 대체로 밝은 편이며, 설령 눈물을 흘린다 한들 그것은 절대 슬픔이나 절규의 발현이 아니다.

하지만, 슬픔과 분노가 드리우는 씬은 정반대다.

한없이 어두우며, 절절한 고통이 밀물처럼 스크린을 타고 나와 객석을 적신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소방관의 절망스러운 감정으로 짙게 물든다.

감정의 소모가 한 씬에서조차도 여러 번씩 왔다 갔다 하는데, 배우의 연기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다.

있는 대로, 실제 그 상황에서 나타나는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

양과 음을 넘나드는 격한 감정 변화로 관객들을 정신없이 빠져들게 했던 영화는, 이제 엔딩을 향해 치달았다.

오프닝을 잠식했었던 감정이 먹먹한 슬픔이었으니, 엔딩은 소소한 행복으로 끝나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러닝 타임 내내 영화 속에 존재했었던 공식이니.

31번 씬이 화면에 나타났다.

화이트 우드, 피아노, 아름다운 선율,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고 예쁜 아내, 맛있는 저녁, 은은한 달빛….

“오늘이 멈췄으면, 좋겠다.”

백성호가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떠 있는 동그란 보름달을 비추며 앵글이 전환된다.

[평균 수명 58.8세]

[우울증 10.4%, 일반인 유병률 대비 4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3명 중 1명, 유병 비율 전체 33%]

[자살 수 > 순직 수]

[건강 이상 판정 비율, 전체 대비 68.1%, 그러나….]

[전담 의사 수, 0명]

<그을리다> 오프닝에서 나왔었던 자막이 <가려진 자국>의 엔딩을 채운다.

두 작품의 오프닝과 엔딩이 이어지게끔 설계한 감독의 의도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실제 소방관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배경을 채우며,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소방관 여러분, 감사합니다.]

두 편의 영화에 감독이 담고 싶었던 수백, 수천 가지의 말들을 단 한 줄로 요약한 메시지가 페이드 아웃이 되면서 깜깜해진 화면을 꽉 채웠다.

- 짝짝짝짝짝!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전문 분야인 켄 로드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영국에서 장편 상업영화로는 명성이 높은 안톤 앱티드는 진지한 얼굴로 상념에 잠긴 듯 보였다.

맥에게 계속해서 장난을 건네던 천연덕스러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조금의 구멍도 없었다고 생각되는 한 편의 예술영화였다.

앵글과 구성이 매우 참신했으며, 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이끌었던 주연 배우는 ‘美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예술성은 물론이거니와, 대중적으로도 충분히 먹힐 수 있는 소방관이라는 소재와 주제까지.

탁월한 선택의 집약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영화였다.

맥은,

“꼭 오늘 만나야겠어.”

스크린에 한창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눈에 담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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