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의 다이어리-196화 (196/333)

196화

오디션 기회를 주느냐, 아니면 배역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느냐.

혹은, 계약금이나 출연료를 얼마까지 보장할 수가 있느냐.

또는!

뮤지컬의 영역이냐, 영화나 드라마의 영역이냐 등등.

이러한 것들은 결국 부수적인 요건에 지나지 않는다.

WMAC를 선택하든 UTA를 선택하든, 해외 진출에 도전하고 싶다는 관점에서는 어느 곳을 택해도 더할 나위 없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셈이니까.

양쪽 다 좋은 시작이라는 의미다.

즉, 앞서 말한 부수적인 요건들의 차이는 각 분야의 특성에 따른 것이지, 에이전시의 규모나 영향력의 차이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UTA의 제안이 딱 그런 셈이다.

자국에서의 활동 경력이 없는 타국의 배우에게 오디션 없이 배역을 주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UTA는 굳이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을 테고.

만약 당신이 어떤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200억을 투자한 투자자라고 가정해보자.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해본 경력이 없는, 그래서 할리우드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타국의 배우를 캐스팅하고자 하는 상황이라면.

오디션 없이 배역을 주는 것에 동의하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다.

자본 스케일부터가 차원이 다른 영화를 만드는 곳인데, 오디션을 통해 연기를 더 잘하는 배우를 발굴하고 싶은 마음은 제작자와 에이전시로서는 당연한 일 아닌가.

‘오디션 기회를 보장할 테니 스스로를 증명해 봐!’라는 UTA의 입장이 기분 나빴던 적,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오디션을 본다는 생각에 설렜으면 설렜지.

그러나,

“결정했습니다.”

“후회 없이, 고민하고 결정한 거 맞지?”

“네, 팀장님. 제 생애 최고로 힘든 결정이었어요.”

“좋아. 어디든, 우리 플라워는 우진이 네 선택을 따를 거야. 어디로 정했어?”

오랜 고민 끝에 우진의 마음이 향한 곳은,

“WMAC입니다.”

맥 오브라이언이 내민 손이었다.

우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김태곤 팀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회의실에 함께 모인 매니지먼트팀의 반응은 다양하게 갈렸다.

‘역시! 우진 배우라면 새로운 도전을 할 줄 알았어.’

라는 반응도 있었고,

‘그래도 할리우드 영화가 낫지 않나… UTA면 가장 큰 에이전시인데 거절했다가 찍히면 어떡해.’

라며 약간의 우려가 섞인 반응들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WMAC가 워낙 뮤지컬로‘만’ 잘 알려진 회사여서 그렇다.

대다수의 대중이 뮤지컬보다 영상 매체에 친숙할 수밖에 없으므로, 할리우드보다 웨스트엔드를 택한 우진의 결정은 되려 기회비용이 훨씬 크다고 생각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뿌리가 웨스트엔드 뮤지컬인 건 맞으나, 현재에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에이전시로 확장한 지 오래였다.

WMAC 소속 아티스트 중에는 영상 매체에서만 활동하는 배우들이나 대중음악 활동에만 전념하는 가수들도 많았으니까.

맥의 연락을 받은 직후부터 2주 넘게 퇴근도 미뤄가며 WMAC와 UTA의 최근 동향까지 하나하나 직접 분석한 김태곤으로서는,

‘할리우드 진출까지 목표로 한다는 전제라면 겉으로는 UTA가 좋아 보이지만, WMAC가 훨씬 나은 선택임이 분명하다.’

우진의 결정에 이의가 전혀 없었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플라워는 소속 아티스트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그렇죠?”

“맞습니다.”

“정해졌으니, 바로 움직입시다. 일단, 저는 WMAC와 계약 진행하겠습니다. 이민성 차장은 UTA 쪽에 최대한 정중한 표현으로 거절 의사 밝혀주시고.”

“알겠습니다.”

“베니스에서 우진 배우랑 맥 감독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다들 봤는지, 벌써 냄새 맡고 문의해오는 기자들이 많습니다. 신속하게 대응해야 하니까, 홍영주 사원이 홍보팀하고 회의 바로 잡아주세요.”

“네!”

“우진 배우 건만이 아니라, 다른 배우들 일정들도 밀려있는 게 많습니다. 이제부터 더 바빠질 테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립시다. 이상!”

김태곤이 능숙하게 회의를 종료했다.

직원들이 각자 업무로 흩어졌다.

금세 조용해진 회의실.

“우진아.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그럼요.”

“네가 WMAC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가 뭐야?”

마지막까지 우진과 함께 남아 있던 김태곤이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팀장님 눈은 못 속이겠네요.”

“네가 돈이나 역할 크기에 연연하지 않는 배우라는 거,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또 있겠어?”

그랬다.

우진의 마음이 움직여진 수많은 이유 중에, 분명 가장 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김태곤은 그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은 뮤지컬이 배우로서 욕심이 난다… 그 이유 때문인 건 알겠어. 그런데, 뭔가 그 이상의 이유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말이야.”

“확신이 있었어요.”

“확신?”

“네, 저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말씀하실 때의 맥 감독님의 표정과 말투에서 느껴진 확신이요.”

우진이 입가에 밝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다른 배우 말고, 딱 ‘저’를 원한다는 믿음이요.”

WMAC의 제안이 UTA의 것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던 부분.

바로, 태도였다.

UTA는 한국, 일본, 중국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연기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은 스타들을 닥치는 대로 영입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그중 하나가 우진이었으며, 그들의 관점에서 외국 출신 배우라면 누구나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게 꿈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즉, 우진은 UTA가 원하는 수많은 배우 중 한 명이었을 뿐일 여지가 높았다.

반면, WMAC는 ‘콕-’ 집어서 말했다.

백우진‘도’ 원한다가 아니라.

백우진‘만’ 원한다고 말이다.

이건 마치….

“라호찬 감독 처음 만났을 때가 갑자기 떠오르는데, 나만 그런 거 아니지?”

“네, 아닙니다. 저랑 같은 생각을 하셨어요.”

우진의 대답은 김태곤에게 일종의 데자뷰와 같았다.

흥행이 어느 정도 보장된 시나리오들을 다 거절하고, 우진이 라호찬이라는 무명 감독의 작품을 선택했던 이유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 배우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간절함.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게 한 방향키였구나!

김태곤이 환하게 웃었다.

백우진, 얘는 어쩜 이렇게….

사람이 변함없이 일관된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을까.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한 지 20년이 넘었다.

무명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겸손했던 스타들이 어느 정도 성공 가도를 달리면 확 변하는 모습이야 그동안 수백 번도 넘게 봤었다.

그런 류의 배우들은 지금 당장은 잘 되고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분명 말이 나오는 법이다.

그 작은 불씨가 하나의 사건으로 번지면, 결과는 뭐… 간단하다.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기 십상.

연예인 한 명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수십 명의 업계 관계자들이 달라붙는 현상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플라워엔터테인먼트라고 해서 소속 연예인 중에 이런 배우가 없겠는가.

안 그래도 소속 배우 중 하나가 최근에 촬영 중인 영화 스태프에게 갑질을 했다는 논란에 휩싸여 비상이 걸린 참이었다.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자숙의 의미로 하차를 선언하는 것으로 모양새 좋게 잘 넘어갔지만.

배우의 만들어진 이미지와 실제 성격의 갭이 크면 클수록,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김태곤의 손을 거쳤든 안 거쳤든 간에 그가 지켜본 연예인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나, 여태껏 오랜 세월 종사해오면서 뛰어난 능력과 노력으로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연예인 중에서 정말 한결같다고 느낀 배우는 딱 두 명이 있었다.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라 타고난 성격 자체가 배려와 겸손으로 가득하며, 작품의 성공 여부나 자신의 위치와 관계없이 늘 친절한 사람.

동시에, 늘 변함없는 본인만의 확고한 신념으로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

박수현, 그리고….

백우진이었다.

아직 20대에 불과한데도, 나이와 경력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배우들.

매니지먼트 팀장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의 의견은 꼭 군말 없이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친구들이었다.

“WMAC랑 논의하는 족족 일정 알려줄게. 아직 이른 얘기지만, 계약 성사되면 영국으로 미리 갈 생각이지?”

“네, 그럴 생각이에요. 최대한 빨리 넘어가서 준비해야겠죠. 연기만 하는 게 아니라서, 준비할 게 평소보다 더 많을 듯싶네요.”

“난 벌써 걱정이 된다.”

“뭐가요?”

“넌 지독한 연습벌레잖아. 얼마나 또 혹독하게 스스로를 갉아먹을지…. 무대에 서기도 전에 성대결절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등등 별별 생각이 든다니까?”

“하하, 팀장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연습하는 것만큼, 몸 관리도 철저하게 하는 배우입니다!”

“아이고, 그렇다는 녀석이 <그을리다> 촬영 때 실신을 해? 난 그 뒤로 네 말 안 믿는다!”

“그거는….”

“하여튼! 영국 가게 되면, 건강에 무리 안 가는 선에서만 연습하도록 내가 준안이한테 신신당부를 할 거야. 철저하게 감시해야 돼!”

김태곤이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서로를 신뢰하는 마음이 가득 피어올랐다.

“그리고 우진아. 간단한 촬영 하나 들어왔어.”

“아, 네. 뭔데요?”

WMAC건과는 별개의 내용에 관해 김태곤이 설명을 덧붙였다.

“작년에 YTV에서 제작·방영했었던 류창민 감독님에 관한 다큐멘터리 3부작 기억하지?”

“그럼요. 제가 3부 내레이션 했었잖아요.”

“다큐국에서 그때 재미 좀 쏠쏠하게 봤었는지, 이번에도 다큐멘터리 하나 만든다고 하네?”

“그런데요?”

“구성이… 좀 특이해. 네가 직접 보는 게 낫겠다. 한 번 봐봐.”

김태곤이 서류철을 건넸다.

YTV에서 이번에 제작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단 한 컷의 프레임을 위해>였다.

“올해 말까지 촬영하고, 내년 신년 특집에 방송할 예정이라는데… 단역 배우들의 삶을 조명하는 내용이야.”

“아….”

“네가 내레이션 했었던 류 감독님 다큐멘터리 3부 내용 기억나지?”

“네.”

“그때 <붉은 꽃잎> 단역 배우들의 인터뷰가 엄청 화제 됐었잖아. 안 그래도 감정 소모를 극한으로 쏟아내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단역 배우 얼굴 한 컷이라도 더 나오게 해주려고 동선까지 신경 써줬다고. 우리 백우진 배우가. 단역을 하나하나 매번 신경 써주는 주연배우가 어딨느냐고 막.”

“…쑥스럽네요, 갑자기.”

“방송국 놈들이 여간 눈치가 빠른 게 아니에요. 그거랑 이번 베니스 영화제 수상을 엮어버렸어.”

“음?”

“뒷장 봐봐.”

우진은 서류철을 넘겼다.

이내 김태곤의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앞장은 1부, 뒷장은 2부의 내용과 기획 의도 설명이었던 것.

“한 번 시청률 재미 본 소재를 또 놓칠 수야 있나. 그런데, 얘네가 작년에 만든 다큐에서 가장 중점을 뒀던 게 어디였을까?

“류 감독님 은퇴작 기념으로 만든 거잖아요.”

“그것도 그런데, 그거 말고 더 중요한 거.”

우진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아, 뭔지 알겠다. 설마….”

우진의 표정을 읽은 김태곤이 말을 치고 들어왔다.

“그렇지. ‘최초’, ‘최고’라는 키워드잖아.”

역시, 생각이 맞았다.

<붉은 꽃잎>이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최단 기간에 역대 최고 관객 수를 달성했다는 사실만큼이나 화제가 된 게 없었으니까.

“무명·단역 배우들이 가장 닮고 싶은 배우인데, 마침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초로 수상까지 했어. 이 정도면 백우진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들이 시청자 게시판에 잔뜩이야. YTV로서는 뭐, 판이 만들어졌는데 굳이 안 만들 리가.”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이 문서 두어 장에 담겨 있구나.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곤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주 내용은 단역 배우들의 삶이야. 거기에 네가 더해진 거고. 대충 얘기 들어봤는데, 이렇게 꿈을 향해 달려가는 단역 배우들이 언젠가는! 본인들이 닮고 싶은 백우진이라는 꿈에 닿길 응원한다. 이렇게 결말 내려는 거야. 베니스 장면이 거기서 인서트 되는 거고.”

“좋네요.”

“아무래도 작년 다큐와 접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다희도 출연하기로 했어. 둘이 스케줄 맞춰서 같이 가는 게 어떨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전 좋아요. 할게요.”

“촬영은 계속하는 중이라는데, 현재까지 가편집본 받은 거 있거든. 보내줄 테니까 한 번 봐봐. 일정은 나오는 대로 알려줄게.”

“알겠습니다. 인터뷰 촬영만 하는 건가요?”

“어, 내레이션하고.”

“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베니스에 다녀온 후, 해외 에이전시 문제와 더불어 곧바로 <가려진 자국> 개봉까지 맞이하면서 조금은 정신없었던 나날들.

고민이 많았던 결정을 내려 후련한데, 마침 또 훈훈한 감정이 들게 하는 프로젝트성 스케줄이 생겼다.

점점 하나씩 또 정리되어가는 기분이다.

우진은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눈부신 오전의 햇살이, 참으로 따뜻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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