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의 다이어리-200화 (200/333)

200화

무대인사, 인터뷰, 광고·화보 촬영 등등의 바쁜 일정들 속에서 어느덧 10월 마지막 주를 맞이했다.

<가려진 자국>이 개봉한 지도 벌써 한 달이나 흐른 시점인데, 영화는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7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둔 지금, 당연히 천만 영화 반열에 오르고도 남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인 가운데.

출연작 세 편의 누적 관객 수가 3천만이 넘은 우진에게는,

‘매일 신기록을 달성하는 배우’

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가려진 자국>이 극장가에서 최소 2~3주는 더 상영될 예정이므로, 누적 관객 수 기록은 그야말로 현재진행형.

그에게는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 드르륵.

“오빠, 출발요!”

이른 아침.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고이의 활기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전날에 늦은 밤까지 소속사 식구이자 절친한 사이인 수현과 화보 촬영 일정을 소화한 우진은, 차에 오르자마자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읊조렸다.

“으아… 진짜 졸리다.”

“어제 몇 시에 들어온 거야?”

“새벽 4시 좀 넘어서 끝났던 것 같아요.”

“아이고, 세 시간도 못 자고 나온 거야?”

“우진이도 그렇지만, 태준이 형이랑 해리도 고생 많이 했겠네.”

준안과 고이가 백미러로 우진을 보며 말했다.

김태준과 김해리.

각각 수현의 매니저와 코디네이터인데, 어제처럼 소속 배우들의 일정이 겹칠 때는 대체로 한쪽 스태프들만 출동하는 것이 플라워엔터테인먼트의 시스템이었다.

배우의 이름이나 이니셜을 따서 흔히 ‘팀 OO’이라고 부르는데, 어제의 화보 촬영은 ‘팀 수현’에서 담당한 스케줄이었던 셈.

준안과 고이도 우진의 일정이 없는 날에는 수현을 비롯해 소속사 배우들의 스케줄 지원을 종종 나가곤 했는데.

매니저들과 코디네이터들 사이에서는 이렇듯 서로의 스케줄을 지원해주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생성되어있었다.

‘팀 수현’ 덕에 하루를 푹 쉬고 나온 준안과 고이는 우진과 반대로 컨디션이 쌩쌩했다.

“우진아, 의자 쭉 펴서 눈 좀 붙이고 있어.”

“아니에요. 어차피 금방 도착할 텐데요.”

“10분이라도 자. TV에서 봤는데, 틈틈이 쪽잠을 자주는 게 정신 맑아지는 데는 최고래.”

“맞아, 맞아. 어차피 의상 셀렉할 게 좀 있어서 샵 가기 전에 들르기로 했으니까 차에서 좀 자고 있어.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릴 거야.”

“고마워요. 그럼 염치를 무릅쓰고 조금만….”

“염치는 무슨! 얼른 의자 당기고 누울지어다.”

“출발합니다~”

우진이 차량 후미 쪽에 누워 안대를 쓰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준안이 시동을 걸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고, 고이는 토스트를 오물거리며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잠시 후.

차량이 강남의 한 고급 브랜드 매장 앞에 정차했다.

연예인 협찬 전문으로 가장 유명한 곳인데, 플라워엔터테인먼트와는 오랫동안 협업을 하는 사이였다.

코디네이터들이 매주 돌아가면서 의상을 체크하며 협찬 목록을 수정하는데, 이번에는 고이의 순번이었던 것이다.

점점 시상식의 계절인 연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래저래 확인할 것들이 많았다.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린 덕분에 우진은 조금 더 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준안과 고이가 일을 마치고 차에 돌아온 순간에도 우진은 미동이 없었다.

“우진이, 죽은 건 아니겠죠?”

“그러게. 차에서 저렇게 깊게 잠든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네. 웬만하면 차에서는 잘 안 자려고 하는 앤데.”

“얼마나 피곤했으면….”

“안 되겠다. 샵까지 조금 천천히 운전해서 가자.”

“아, 그건 좀….”

“왜?”

“서행하면 오빠랑 둘이서 드라이브하는 기분을 더 길게 만끽해야 하잖아요.”

“…….”

“난 거절.”

“…어이가 없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냅다 드링킹하는 이고이 보소?”

“됐고, 얼른 출발! 후딱 끝내야 우진이가 조금이라도 더 쉬지.”

“싫은데? 아~주 천천히 갈 거다.”

“아, 서행하지 말고 얼른 가요!”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

“…야!”

날이 갈수록 어째… 투덕거리는 내용이 점점 유치해지는 두 사람이었다.

차량이 강남에서 다시 청담동으로 넘어왔다.

샵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깨우는 손길에 눈을 뜬 우진은 한층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일어난 직후라 눈이 약간 충혈되어있는 우진의 헝클어진 머리를 고이가 다듬어주었다.

이내 우진이 샵에 들어서자,

“우진! 이게 얼마 만이니?!”

메이크업 실장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우진이 호쾌하게 웃었다.

바로 어제도 왔었거늘.

매번 올 때마다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신다니까.

“싯다운!”

“잘 부탁드려요, 누님.”

“누님 아니고 누나라니까!”

“하하하!”

웃고 떠드는 사이, 메이크업 A팀 스태프들이 자연스레 우진에게 붙었다.

분장과 헤어를 마친 뒤, 우진은 고이가 건넨 세미 캐쥬얼 정장을 입었다.

샵을 나선 우진 일행은 곧장 회사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이렇게 정성스레 꾸민 이유는 하나.

오늘이 바로,

“방금 공항에서 픽업했대. 숙소 들려서 짐 놓고 회사로 온다네.”

“알겠습니다.”

WMAC의 에이전트가 플라워엔터테인먼트를 방문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회사 내부는 분주한 분위기였다.

해외 에이전트와의 계약은 보통 내한 일정과 맞물리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플라워엔터테인먼트에서 가는 쪽이었지.

귀한 손님이 다른 부수적인 일정 없이 오직 소속 배우와의 계약만을 위해 직접 회사를 방문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이든, 회사든.

비즈니스에서 첫 이미지는 불과 1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나.

매니지먼트팀 팀장 김태곤과 더불어 기획팀장, 홍보팀장, 경영팀장, 콘텐츠기획팀장 등등.

각 팀에서 장들의 주도 아래 사무실 정리가 한창이었다.

“PTSD 오는 것 같아.”

준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왜요?”

“군대 생각나지 않냐, 우진아?”

“…….”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와 닿는 준안의 혼잣말.

우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다 된 거 같으니, 팀장님들은 전부 응접실로 갑시다.”

“언제 도착하신답니까?”

“한 15분 정도?”

“준비해야겠네요. 가죠.”

“어, 마침 우진이도 왔네. 같이 가자.”

김태곤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우진에게 어깨동무했다.

WMAC 에이전트를 맞이할 응접실로 사용될 곳은 플라워엔터테인먼트 사내에서 크기가 가장 큰 미팅 룸으로, 대표실 바로 아래층에 있었다.

종류별 음료는 기본이고 직함과 이름이 영어로 적힌 팻말까지 자리마다 놓여있었는데, 이번 미팅을 대하는 사내 분위기가 어떤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우진 배우, 잠시만요.”

“네.”

“김태곤 팀장한테서 자세하게 들었겠지만, 우리 기획실에서 서면으로 미리 통보받은 사항들은 이래요. 한 번 봐봐요.”

기획팀장 김미소가 건넨 서류철에는 김태곤에게서 대략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내용이 적힌 청사진이 있었다.

이어서,

“이번에 회사 홈페이지 리뉴얼 들어가거든요. 오늘 계약이 성사되면, 우진 배우의 일상을 브이로그 형식으로 담아서 게재하면 어떨까 해요. 이따 에이전트하고도 상의하겠지만, 일단 내용 먼저 한번 볼래요?”

콘텐츠팀장이 건넨 계약 관련 사항들.

그리고,

“우진 씨 성향이랑 그쪽에서 제시하는 공연 일정표를 다 고려해보면, 늦어도 연말에는 출국해야 할 거 같아요. 반년 이상 체류하면서 드는 생활 경비나 트레이닝 금액은 전부 WMAC 측에서 부담하겠다고 구두로 합의가 이미 됐습니다. 배우의 수익 구조는 오늘 구체적으로 얘기해야겠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최소 비율은 이래요.”

경영팀장이 미팅 때 세부적으로 제시할 내용까지.

여러 팀의 업무가 뒤섞여있는 구조이니, 사전에 확인해야 할 내용이 꽤 있었다.

그 와중에 눈빛이 마치 굶주린 맹수의 느낌이 들 정도로, 우진은 건네받은 서류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 대본에 몰입했을 때 볼 수 있는 표정과 시선이었다.

“역시…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난 우진 배우 눈빛 볼 때마다 섬뜩하다니까. 완전 이글아이야.”

“저 눈빛을 에이전트가 본다면, 거두절미하고 도장부터 찍고 보지 않을까.”

매니지먼트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마주칠 일이 적은 다른 팀장들은 우진의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김태곤의 표정이 괜스레 우쭐해졌다.

‘저 배우를 플라워에 데려온 사람이 접니다!’

라고 연신 외치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외부가 소란스러워지는 소리가 미팅 룸에까지 들렸다.

김태곤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도착하셨나 봅니다. 다들 일어서있죠.”

우진을 비롯해서 모여있는 사람들이 전부 김태곤을 따라 일어섰다.

각자 옷매무새를 다듬거나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긴장을 떨쳤다.

이윽고,

- 달칵.

문이 열렸다.

영어에 능통한 매니지먼트 1팀 홍영주 사원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섰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이은철 대표가 문밖에서 정중하게 팔을 뻗었다.

WMAC에서 온 에이전트 두 명이 이어서 사무실로 들어섰고, 이은철 대표가 마지막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저는 WMAC 에이전트인 해외사업본부장 루카스 헤더입니다. 이쪽은 우리 본부 1팀장, 스칼렛이고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어라?

우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는 곧장 우진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우진. 그동안 잘 지냈어요?”

손을 맞잡은 루카스가 가벼운 포옹을 청했다.

그의 말마따나 우진과는 초면이 아닌 사이여서 더욱 반가움을 느껴지는 인사였다.

그랬다.

루카스 ‘헤더’.

그는 바로 릴리 헤더의 친오빠이자 윌리엄의 삼촌이었으며.

우진이 영국에서 우연찮은 기회로 맺게 된 인연들 중에서 가장 처음이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 * *

“…이런 연유로, 우진 배우와는 이미 안면을 튼 사이랍니다. 맥에게는 제가 에이전트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진에게 미리 알리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깜짝 놀래켜주고 싶었거든요, 하하하!”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루카스의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토크가 이목을 끌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우진 씨는 우리 회사 해외사업본부나 매니지먼트팀에서 먼저 컨택을 한 배우가 아닙니다. 총괄 감독이 직접 선별한 배우죠. 그것만으로도, 오늘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도장을 찍고 가야만 한답니다.”

루카스의 목소리 톤이 진지와 유머를 적절하게 넘나들면서 계속해서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솔직함으로 접근해오는 루카스에게 이은철 대표도 똑같은 화법으로 맞장구쳤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뭔가요?”

“우진 배우의 연기를 맥 감독이 직접 보고 캐스팅 제안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귀사의 ‘앤 롤린’이라는 배우의 유튜브 계정에 올라온 동영상과 베니스 영화제에서 오리종티 작품상을 수상한 <가려진 자국>이란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긴 하지만요.”

“다가 아니라고요?”

“네, 그것들 외에도 우리가 본 게 더 있죠!”

루카스가 이은철 대표의 얼굴에 두었던 시선을 우진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우진은 뭔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기억나나요?”

루카스의 물음에, 우진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할리우드 지인이라고 했던 UTA 관계자에게만 보여준 게 아니었군요.”

- 딱!

루카스가 손을 튕기며 말했다.

“빙고!”

출연작을 보고 싶다는 릴리를 위해 3일 내내 숙소 안에서 자막을 직접 씌웠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1프레임이라도 어긋나지 않게 시간을 재면서 했었던 작업.

선의와 친절을 베풀어준 친구가 고마워서 똑같은 마음으로 돌려주려고 했었던 행동이었지,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거름진 땅에 씨를 뿌린 것과 같았고, 그렇게 뿌린 씨가 풍성한 곡식이 되어 오히려 자신에게 돌아온 셈이었다.

“우리 WMAC는 우진 배우의 출연작을 빠짐없이 봤습니다. 노래와 관련해서 걱정을 살짝 내비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유튜브 영상도 영상이지만, 같이 나오는 앤과 피터라는 배우도 우리 회사 소속이거든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맥과 함께 두 사람에게서 우진에 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앤과 피터가 좋은 얘기만 털어놓는데,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해 좋은 말만 하는데 이렇게 진정성이 느껴지나 했습니다.”

릴리와 루카스처럼 우연히 만나 함께 프로필 영상을 찍으며 서로를 응원했었던 앤과 피터.

그들과도 순수한 우정의 표시로 나눴던 행동들이 이제는 긍정적인 결과가 되어 우진에게 돌아왔다.

“거기에 제가 영국에서 직접 본 것까지 있지요.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진은 실력을 갖춘 좋은 배우라는 걸요.”

루카스는 마침내 ‘아이스 브레이킹’을 마치는 말을 내뱉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실력과 인성을 갖춘 배우와 같이 작업하고 싶은 게 당연하지요. 그래서 WMAC는 우진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되도록 수락하려고 합니다. 그럼, 계약 얘기로 넘어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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