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인류의 역사 따위로는 감히 견줄 수 없을 억겁(億劫)의 세월이었을 거다.
서서히 고이기 시작했던 감정이 묵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고, 겹겹으로 쌓였던 골이 종장에는 아주 단단한 화석처럼 굳어버린 탓에.
어찌 손을 댈 수가 없는 상태로 오랜 시간을 흘러왔었다.
그러나,
“…나의 아들아. 왜 진작에 너를 이렇게 안아주지 못하였을까?”
“어, 어머니….”
“나, 헤라는 감히 어머니라 불릴 자격이 일절 없는 어미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단다. 해서, 나는 지금 너를 내 품에 안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데스의 지하 세계 속으로 당장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로구나.”
여신의 진심이 물씬 담겨 나오는 말 한마디가, 모든 종류의 한(恨)을 ‘사르르-’ 녹아내리게 했다.
어느새 헤라의 무릎을 베고 누운 헤파이스토스의 몸이 그녀를 향해 돌아누웠다.
어머니는 아들을 내려다보고, 아들은 어머니를 올려다보는 모양새였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그간에 가히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을 무한한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오는 시선이 서로 교차하는 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헤파이스토스로서는 본인이 태어나자마자 안겼어야 할 어미의 품이었고, 반대로 헤라로서는 갓 태어난 아기가 두 눈을 뜨기도 전에 편히 안돈(安頓)할 수 있도록 기꺼이 내줬어야 할 보금자리였다.
이런 당연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두 신은 너무나도 멀고 험난한 길을 돌고 돌아온 터였으니.
그동안 나누지 못하고 속으로만 쌓여온 모자(母子)의 정이란, 얼마나 애틋할까.
두 인물 간의 별말이 없어도, 뮤지컬이란 장르가 무색할 정도로 음악의 공백이 길게 느껴지고 있어도.
두 캐릭터가 서로를 바라보며 뿜어내는 분위기만으로, 좌중을 압도하기엔 충분했다.
극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까지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던 카타르시스 댐이 드디어 문을 개방하는 시점의 힘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헤라가 품에 안긴 헤파이스토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비록, 지금 너의 얼굴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 하염없이 못난 어미의 품일지라도 말이다. 헤파이스토스야.”
“…예.”
“네가 이곳을 그리워했던 감정이 아직 남아있다면… 이 어미의 품속으로, 그동안 받아왔던 너의 설움을 전부 쏟아내 주지 않겠느냐?”
“…….”
“미안하다는 말을, 앞으로는 입 밖으로 내지 않으마. 대신, 이 말을 꼭 너에게 하고 싶구나.”
“……?”
“고맙다, 아들아.”
“……!”
“참으로, 고마워. 이 못난 어미가 쥐여준 모진 풍파를 혼자 겪어내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여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시선 맡에 놓인 육중한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흡사 ‘미녀와 야수’에 빗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몸집이 차이가 났으나, 그 순간만큼은 영락없는 아기의 느낌을 물씬 드러내는 뒷모습이었다.
헤파이스토스의 눈물샘이 재차 터졌을 때, 객석 또한 그와 함께 울었다.
극장에 흐르는 감정선을 주체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총괄 연출 부스에서 극 전체를 지휘하는 맥 오브라이언과 데렉에게도 불가한 일이었다.
배우의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이, 극장에 있는 모두에게 허락된 유일한 한 가지였으며.
무대에 어김없이 펼쳐진 ‘美친 연기의 향연’이 관객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
한국이라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그래서 기존의 웨스트엔드 공연계에서는 전혀 익숙하지 아니했던 한 명의 배우.
백우진이 3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선보인 역량의 힘이자, 연기 매직쇼의 결말이었다.
* * *
<올림포스 12신>의 엔딩곡.
‘열락(悅樂)’의 반주가 흘렀다.
유한한 욕구를 넘어서서 얻는 거대한 기쁨을 뜻하는 단어가 타이틀로써 붙은 노래.
그야말로 작품의 결말과는 딱 들어맞지 아니할 수가 없는 느낌의 경쾌한 선율이었다.
[♪]
[아, 아아- 아아아-!
올림포스산의 평화를 되찾았다.
죽지는 않았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헤라가 생기를 되찾았으니, 가정의 여신의 축복이 재차 인간의 삶 속으로 돌아왔더라.
헤파이스토스의 보금자리였던 그의 대장간은 에트나 화산에서 올림포스산으로 자리를 옮겼도다-!
좋게 말해서 보금자리였지, 실제로는 상처받은 신을 더 외롭게 만드는 도피처였잖은가.
이제는 그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최고의 여신이 최고의 신에게 간곡히 청원하였기 때문이리라.
그와 더불어, 노기를 다스린 신의 덕목을 치하하려는 목적도 충만하였으리라.]
‘코러스’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내뱉는 가사가, 클라이맥스 장면 이후로 극에는 세세하게 전부 담지 못해 아쉬운 행복한 결말을 간략하게 요약·설명해주었다.
헤파이스토스는 올림포스산의 신전으로 돌아왔고, 못생긴 외모와 신체적 장애로부터 받는 편견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제우스와 헤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네-!
아레스는 진심을 담아 헤파이스토스에게 사과하였으며, 다시는 형수를 넘보지 않았도다.
사랑을 주관하는 여신 아프로디테 또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도다.
비로소 그녀가 남편의 상처에 눈길을 두기 시작하나니, 고대 그리스판 ‘미녀와 야수’의 끝은 ‘순리의 흐름’이었노라-!]
천지를 들썩였던 소동이 끝나고 나서, 신계의 율격은 그제야 순리를 거스르는 역행자들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아프로디테가 헤파이스토스의 곁으로 돌아왔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다 묻어두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서약을 나눈 두 신은 이후로….
깨가 쏟아질 정도로 관계가 좋아졌다고 전해지는 후문을, ‘코러스’가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객석에는 웃음꽃이 만연해졌다.
작품이 끝나기 전에는, 오로지 헤파이스토스의 행복이 곧 그들의 행복과 같았으니까.
[아, 아아- 아아아-!
성난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잔잔한 물결만이 남는 법.
무섭게도 쓸쓸하고 시린 겨울바람이 지나갔으니, 봄의 계절이 찾아오는 게 순리이지 아니한가.
인계에서는 곡식과 재배의 신, 데메테르를 위해 씨앗을 뿌릴 준비가 한창이구나-!
올림포스산 아래 세상이 휘황찬란(輝煌燦爛)한 것처럼, 헤파이스토스여-!
부디 그대의 대장간에서도 이제는 희망이 가득한 망치 소리와 쇳물 소리만이 가득하시기를!]
‘코러스’ 단원 전체가 동시에 천장을 향해 손을 드높이는 것으로 노래가 끝났다.
- 탁.
순간, 암전이 찾아왔고.
- 저벅, 저벅.
칠흑 같은 암전 속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일절 차단된 상태에서 들리는 소리가, 관객들의 청력을 한층 민감하게 했다.
인터미션 포함 3시간 30분의 러닝타임 중, 암전 속에서 들렸던 발소리는 공연 내내 딱 한 명.
오직 헤파이스토스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번의 발소리는 불규칙한 간격으로 들리는 것이 아닌.
정확한 타이밍에 양발이 땅에 닿는 소리가 번갈아 가면서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파이스토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인 거지?
관객들의 궁금증이 점점 커졌다.
이 어둠이 빨리 걷혀서, 마지막까지 흥미를 유발하는 주인공을 얼른 확인하고 싶은 마음들이 객석 이곳저곳에서 피어올랐다.
그렇게, 잠시 후.
- 탁.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그 즉시, 조명이 밝아진 것은 덤.
이윽고, 객석이 들썩였다.
의심이 여지는 살짝 있었으나, 어쨌든 발걸음의 주인공은 대다수의 예상대로 헤파이스토스였다.
여기까진 놀랄 것이 없었거늘.
다만,
“……!”
“헐!”
“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됐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외모를 하고 나타난 것이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이유였다.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표현하기 위해 조금 과하게 꾸몄던 얼굴 분장들, 그리고 꼽추임을 표현하기 위해 옷 안에 넣었던 조그마한 소도구를 모두 제거한 상태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즉, 지금 무대에 서 있는 헤파이스토스 캐릭터의 외형은….
배우 백우진.
그의 본연의 모습이었다.
* * *
러닝타임 내내 보여왔었던 외모와 마지막 장면의 모습이 180도 달라진다 한들.
의상까지 바뀌진 않았다.
분장을 지웠다고 해서, 관객들이 배우와 헤파이스토스 캐릭터를 분리해서 인식할 일은 절대 없다.
아직 작품이 끝난 게 아니니까.
「엔딩 곡은 어차피 ‘코러스’ 배우들이 부를 거니까, 그사이에 저는 무대 뒤에서 분장을 지우고 나타나면 어떨까요?」
「네?! 작품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요?」
「네. 마지막 장면에서만큼은, 헤파이스토스가 못생긴 상태의 외모를 그대로 가져가지 않으면 어떨까 해서요.」
「……!」
「말이 좀 어려운데, 그러니까… 클라이맥스까지 지나고 나면, 그 누구에게도 헤파이스토스의 얼굴이 못생겼다는 인상을 줄 것 같지 않거든요. 물론, 본인 스스로도 콤플렉스로 여겨왔었던 외모와 신체적 장애에 더는 구속받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표현도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요.」
우진의 아이디어였다.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은 ‘코러스’의 엔딩곡 직후에 헤스티아와 헤파이스토스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씬이었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헤파이스토스의 외모가 못생기지도 않고, 허리도 굽어있지 않으며, 다리도 절지 않는 모습.
다른 신들처럼 멀쩡한 외형으로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맥과 데렉은 물론이거니와, 릴리를 비롯한 동료 배우들 모두가 이를 듣자마자 손뼉을 쳤었다.
획기적인 설정이었을뿐더러.
오히려 헤파이스토스라는 캐릭터에 한해서는, 맥과 데렉보다 훨씬 깊이 있게 연구했을 배우가 잡아 온 디테일이었는지라.
두말할 것 없이 채택되었었다.
그 마지막 시퀀스가, 지금 펼쳐지려는 찰나였던 셈이다.
그렇게 무대 위로 걸어 나온 멀쩡한(?) 모습의 헤파이스토스가 올림포스 신전 중앙 화롯가에 놓인 두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머지 하나의 자리는,
- 저벅, 저벅.
뒤이어 등장한 헤스티아의 것이었다.
불이 꺼져있는 탓에, 굉장히 허전해 보이는 화롯가.
자리에 앉은 헤스티아가 말없이 그곳을 응시했다.
그러자, 헤파이스토스는 그녀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고맙습니다, 헤스티아. 덕분에,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티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녀가 말했다.
“모든 이해관계가 바로 섰네요. 딱 하나만 빼고 말이에요.”
“아, 그렇네요.”
“헤파이스토스. 당신이 바로잡아주면 되겠어요.”
“물론입니다.”
이미 헤스티아가 말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 헤파이스토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화롯가에 가까이 밀착했다.
불을 품는 것이 존재 이유인데, 정작 불씨가 없어서 슬픈 화롯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화로의 신을 위해,
- 촤르륵!
대장장이의 신이 손을 뻗었다.
그가 ‘불’의 신이기도 하였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올림포스 신전의 화로에서 드디어 세찬 불이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래도 꺼져있었구나.
화롯가에 불을 피운 헤파이스토스가 돌아섰다.
헤스티아는 어느새 의자가 아닌 화로 맡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헤파이스토스.”
“제가 할 말이죠.”
“다시는 이 불이 꺼지는 일이 없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하겠지요. 그럼….”
남신이 자리를 떠났다.
여신은 늘 그래왔듯.
묵묵하게 화로의 불씨를 섬세하게 들쑤셨다.
그렇게,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Fade, out.
뮤지컬 <올림포스 12신>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