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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의 다이어리-249화 (249/333)

249화

오성철 선배가 별안간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대화 주제로 떠오른 할리우드 영화는, 아무래도 <죽음의 도시(가제)>가 확실한 듯했다.

우진은 약간의 뜸을 들였다.

모른 척하고 들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오 선배한테는 넌지시 귀띔해드리는 게 맞는 것인지.

짧은 찰나에 지나간 고민.

그러나, 흔적은 예상외로 짙었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진짜요? 몰랐습니다.”

- 모르는 게 정상이긴 하지. 나도 바다 건너서 들은 정보거든!

한껏 들뜬 오성철 선배의 음성.

죄송합니다, 선배님.

부디 존경하는 선배님께 거짓말하는 게 아닌, 후배 배우로서 연기를 펼친 것으로 생각해주셨으면….

혹여나 좋은 결과를 손에 쥐게 된다면, 그때는 기사가 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기타, 등등.

우진은 목구멍에 차오르는 말을 간신히 속으로 삼켰다.

처음 들은 얘기 마냥, 말을 아끼는 게 맞는 선택이긴 했다.

미쉘을 통해 제안을 받게 된 미국행과 관련해서는, ‘미팅 제안서’를 받은 시점에서부터 이미 내부적으로 확고한 판단을 내린 상태였으니까.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그 누구에게도 섣불리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 말이다.

뭐든 시작이 어렵지, 둘째 번부터는 쉬워지는 법.

마찬가지로, 한 번 얘기하기 시작하면 언제든 은연중에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우진은 미쉘과 직접 ‘오프 더 레코드’라 약속하고 대화를 나눈 장본인이고.

모두가 비밀에 부치려고 애를 쓰는 판국에, 당사자인 ‘나’부터가 입조심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오 선배는 이 정보를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우진이 되물었다.

“바다 건너서라니요?”

- 아, 나랑 친한 일본 배우가 있거든. 스즈키 마코토(鈴木 誠)라고, 아마 너랑 동갑일 거야. 혹시, 누군지 알아?

“아니요, 잘….”

- 음, 일본에서는 너랑 위치가 비슷한 친구야. 걔도 연기파 배우라고 평가받는 배우거든. 알고 보면, 너랑 접점이 꽤 많더라고.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 하더라.

“접점이요? 저랑?”

- 어, 너도 알다시피 <원티드>가 일본에서 리메이크됐었잖아. 그 친구가 원작에서의 네 역할을 일본판에서 맡았던 배우야. 최규보.

“아하…!”

이야기는 잠시 작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웨스트엔드행을 확정 지은 우진이 국내에서의 남은 일정들을 빠르게 정리하는 데에 여념이 없던 그 당시.

일본 도쿄가 중심이 되는 간토 지방을 가청 권역으로 하는 민영 방송사 ‘후지TV’가 tvKR과 접촉했었다.

드라마 <원티드> 리메이크와 관련해서 판권 계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

그러니까, 우진이 영국에서 활동하느라 국내 공백기를 가진 사이.

오성철은 일본으로 떠났다.

여담이지만, 이는 절친한 선후배 관계인 두 사람이 유독 2014년에는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둘 다, 국내에 없었으니까.

오성철이 일본에 머무르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원작 <원티드>에서 이종부 역을 맡았던 그가 리메이크 버전에서 같은 역할에 캐스팅되었었기 때문.

일본판 <원티드>의 정식 타이틀은, <永遠な秘密はない!>였다.

에이엔나 히미츠와 나이!

번역하면, ‘영원한 비밀은 없다!’.

판권 계약이 끝나자마자 곧장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간 드라마 촬영이 3월부터 시작되었었다고.

사전 제작이라서 여름 내내 찍었고, 가을이 돼서야 전파를 탔었다고 했다.

리메이크 버전도 원작에서 우진이 맡았었던 최규보와 오성철이 맡았었던 이종부에 해당하는 두 캐릭터가 붙는 씬들이 많았다.

자연스레 스즈키 마코토와 오성철의 친분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그렇게 오성철 선배와 인연이 쌓인 일본 배우가 ‘원더브라더스’의 연락을 받고 미국으로 향했다는 얘기를 듣게 될 줄이야.

경쟁자에 관한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된 셈이었다.

- 얘랑 지난주에 연락했었는데, 이번에 할리우드 영화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고 먼저 얘기를 꺼내더라고. 듣자마자 우진이 네 생각부터 나더라는 거 아니냐.

“그렇군요.”

- 스즈키 그 친구도 일본에서는 연기파 배우로 손꼽히는 젊은 배우이기는 해. 같이 촬영하면서 느꼈는데, 연기를 꽤 잘하더라고. 물론, 네 연기에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말이야. 내 눈에는 여전히 네가 최고다!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 어쨌든, 일본산 최규보가 연락을 받았다는데, 원작 최규보는 몰랐다고 하니까 내 기분이 좀 그렇긴 하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다. 너한테도 뭐 좋은 소식 간 건 없나 해서.

“…괜찮습니다. 뭐, 저한테도 좋은 기회가 올지도 모르죠.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 하하, 그건 그렇지!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선배님.

좋은 소식이 생기면, 가족한테 보다도 더 빨리 전해드릴게요….

우진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는데도 예전과 다름없이 서로를 응원하는 선배의 따뜻한 마음이 온전히 와닿아서 감사한 터였다.

- 아이고, 벌써 1시간 넘게 통화를 했네? 이야기가 길어졌구먼. 내가 지금 나가봐야 해서, 나중에 또 통화하든지 하자.

“알겠습니다, 조만간 봬요!”

- 그래, 전화 줘서 고맙다.

“파이팅입니다, 선배님!”

오성철 선배와의 즐거웠던 통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우진은 곧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켰다.

원래는 전화가 끝나는 대로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 했었다만, 생각이 바뀐 탓이었다.

“스즈키 마코토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오디션일 가능성이 크지만, 정말로 단순한 미팅 선에서 마무리될지도 모르는 자리.

그곳에서 함께 경쟁하게 될 상대방이 누군지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우진이 아니었다.

“아~ 이 배우였구나! 아역 때부터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었네.”

아역 시절 사진을 보니,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흥행 돌풍을 일으켰었던, 일본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오는 로맨스 영화에서 아들 역할로 종종 출연했던 적 있는 배우.

이름만 몰랐을 뿐, 낯이 굉장히 익었다.

이윽고, 엔터 키를 누르자마자 검색창을 가득 메우는 스츠키 마코토의 커리어.

상당히 화려했다.

‘나’보다 훨씬 많은 작품에 출연해 경험이 풍부하며, 자국 시상식에서 웬만한 연기상은 죄다 받아본 배우임을 확인했다.

이런 실력파 배우와 할리우드에서 경쟁이라니….

김태곤 팀장님이 우스갯소리로 ‘한일전’이라 표현했을 때만 해도, 그냥 웃어넘겼었는데.

막상 누군지 확인하고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재밌겠네.”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열정은 물론이거니와, 승부욕이 절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에이엔나… 히미츠와, 나이.”

저 배우가 분석하고 연구한 최규보는 ‘나’의 최규보와 어떻게 다를지가 막상 궁금해졌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인터넷에서 일본판 <원티드>를 전부 구매한 우진이 미니바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냈다.

호텔 1층 편의점에서 산 주전부리들도 테이블에 ‘싹-’ 펼쳤다.

- 탁.

의자에 앉은 우진의 손이 키보드의 스페이스 바를 사뿐히 눌렀다.

화면에 고정된 시선.

우진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 * *

그 뒤로, 이틀 내내.

우진은 방을 나서지 않았다.

그동안, 스즈키 마코토의 출연작 중에서 당장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전부 정주행했다.

오성철 선배의 말대로, 우진은 직감했다.

그가 연기파 배우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기의 결들이 매번 다르다는 게 한눈에 보였으니까.

우진으로서는, 자신의 연기와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한 레퍼런스가 있었다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스츠키 마코토가 보여준 최규보는 자신의 최규보와 비슷한 듯, 확연하게 달랐다.

최규보는 일명 ‘너드 美’라 불리는 연기의 결이 그 무엇보다 생명인 캐릭터.

세기의 천재이면서 괴짜라는 기본적인 설정이 부여된 캐릭터이므로, 순간순간의 감정과 표정의 변화와 세세한 디테일이 곧 그의 아이덴티티다.

평소에는 능글맞고 유쾌하지만, 한 번 뭔가에 집중하면 세상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집요함이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냐가 우진이 <원티드>를 촬영할 때 중점으로 뒀었던 연기 방향이었는데, 스즈키가 보여주는 연기에는 한 가지가 더 느껴졌다.

무엇이냐면….

원작의 배우와 어떻게 다르게 연기할까에 대한 깊은 고찰.

딱 봐도 보인다.

손톱만큼이라도 따라 하는 연기가 되지 않도록, 얼마나 고민하고 연구했는지가.

모든 배우는 노력한다.

노력을 안 하는 배우는 없다.

물론 노력의 정도와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기에, 단순히 노력에 들인 ‘시간’만을 하나의 척도로 둘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성실성’의 측면에서 논해보자면.

우진에 대한 평가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는 여태껏 함께 작업해온 모두에게서, ‘노력의 끝판왕’이라는 찬사를 들어온 배우였으니까.

그보다 연구와 분석을 열심히 하는 배우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는 평가도 줄을 이어왔고.

시간과 깊이에 있어서만큼은, 우진도 스스로 열심히 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품곤 하였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뭐랄까.

그런 ‘나’보다도 연구와 분석에 더 많이 매진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연기라는 생각이 뇌리를 몇 번이나 스쳤다.

리메이크작이라는 게 그렇다.

이야기의 설정과 구조가 원작을 완전히 벗어나진 않는다.

그 말인즉슨, 아무리 각색을 해도 리메이크 작품이란 사실에서부터 원작을 떠올리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중간중간 내용이나 결말은 180도 달라질 수 있겠으나,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원작과의 차이점을 뚜렷하게 줄 수 있는 요소들은 크게 두 가지뿐이다.

연출, 그리고 배우의 연기.

철저히 시청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리메이크작의 연출은 원작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들을 전부 빈틈없이 채워주는 것이 바로 스즈키 마코토의 연기.

그야말로, ‘하드 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질 수 없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최규보를 연기했다는 간접적인 인연으로 묶인 경쟁자 외에도.

또 다른 경쟁자가 있는지.

아니면, 일대일 진검승부일지는 아직 모른다.

오성철 선배 덕분에 정체를 확실하게 알게 된 한 명의 경쟁자의 연기력이 이 정도라면….

우진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부터 얼른 해야겠다는 등의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을 잠시나마 반성하게 되었다.

그가 대본을 집어 들었다.

읽고, 또 읽으며 한참을 집중한 나머지.

창밖의 석양이 지고 있는 줄도 모르는 우진이었다.

* * *

“푹 쉬었어?”

“네, 그냥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하면서 잘 쉬었어요.”

“대본은?”

“당연히 봤죠.”

“사실은 대본만 봤는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하하, 아니에요.”

저녁.

김태곤 팀장을 비롯한 ‘팀 우진’ 스태프들은 미쉘을 따라 UTA를 방문하고 돌아온 찰나였다.

호텔에 들어온 뒤로는 룸서비스만으로 하루 세끼를 해결했었다.

이틀이 지나서야 다 같이 레스토랑으로 모이게 되었다.

“미쉘하고 얘기 잘하셨어요?”

“어, 내일모레라고 하네.”

미팅 날짜가 잡혔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마저 얘기들 하자고.”

“네.”

타이밍 좋게 메뉴가 나왔다.

버섯 스프와 소고기 스테이크.

열심히 일했으니, 기분 좋게 화이트 와인 한 잔씩도 곁들어주었다.

일상적인 대화가 주를 이루는 식사가 끝나갈 무렵.

누군가가 멀리서 우진을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

“백우진 배우님 아니신가요?”

“네, 맞습니… 어?!”

우진이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붙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이 절로 휘둥그레지는 얼굴.

그는,

“역시 맞군요. 반갑습니다. 스즈키 마코토라고 합니다.”

지난 이틀간 우진의 관심이 쏠렸던 배우.

스즈키 마코토가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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