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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의 다이어리-269화 (269/333)

269화

목이 잘린 채로 땅에 고꾸라진 ‘디벨로퍼’의 몸통이 축 늘어졌다.

그 옆에 고스란히 떨어져 있는 그것의 머리통은, 당장에라도 ‘키익-’ 소리를 낼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목이 잘리는 줄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괜찮소?”

“아, 네….”

“다행이오.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군요.”

“감, 감사합니다.”

“통성명은 나중에 합시다. 얼른 일어나시오, 곧 있으면, 다른 녀석들이 피 냄새를 맡고 순식간에 몰려들 거요.”

- 슥슥슥슥.

매튜가 대검에 묻은 피를 ‘디벨로퍼’의 몸통에 닦으면서 말했다.

실로 덤덤한 목소리였다.

우진이 곧장 몸을 일으켰고,

“이쪽으로.”

매튜가 그를 안내했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이동한 지, 대략 15분 정도 흘렀을까.

“여깁니다.”

매튜가 손짓했다.

그는 무너진 건물 잔해들 사이의 좁은 틈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전등 불빛으로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끝에는 큰 철제문 하나가 있었다.

우진이 틈 사이로 들어오자, 먼저 들어섰던 매튜가 문을 열었다.

- 끼익, 덜커덩!

문이 꽁꽁 얼어있는 탓에, 엶과 동시에 큰 소음이 발생했다.

동시에,

- 키이이익!

- 그워어어어….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놀랄 것 없소. 매번 열고 나올 때마다 저렇게 울어대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놈들이요. 겹겹이 쌓인 이 콘크리트 너머에 득실거리고 있을 겁니다. 방파제인 셈이지요.”

“한두 마리가 아닌 것 같네요.”

“못해도 수백 마리는 넘을 거요.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더군. 나도 이젠 모르겠소. 이 지옥의 끝이 어떨지 말이오.”

“…….”

“아, 손님을 모셔놓고 쓸데없는 말이 길었군요. 자, 들어오시오.”

- 치익.

매튜가 손전등을 끄더니, 이내 십여 개의 양초에 불을 붙였다.

주변이 금세 환해졌고, 자연스레 그의 보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머물러있었음을 단번에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무너진 건물 틈의 공간이 마치 원룸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침대, 책상, 옷걸이 등의 웬만한 가구와 생활용품은 전부 갖추고 있었으며, 전기 없이 극한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운데 공간에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로까지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불을 금방 피우겠소.”

“아, 저도 도울게요.”

“그냥 편하게 앉아계시오.”

매튜가 손을 휘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내 화로에 불을 붙인 뒤, 성에가 잔뜩 낀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표면의 얼음이 빠르게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문득 캠프파이어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잠시 후.

- 쪼르르르.

매튜가 인스턴트 용기에 뜨거운 물을 붓자, 먹음직스러운 쇠고기 수프의 향이 퍼져 나왔다.

“대접할 만한 것이 이것밖에 없군. 미안하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좋소, 듭시다.”

후루룩-

두 남자가 뜨거운 수프를 마시는 소리가 교차했다.

이윽고,

“정말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솔직히 적응되지 않는군.”

“네?”

“비감염자와 겸상하는 것 말이오.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말을 섞어본 게, 벌써 3년 전이외다.”

매튜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당신 이름이 백우진, 맞지요?”

“그렇습니다.”

“내 이름이 매튜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겠고.”

“네, 맞습니다.”

“반갑소. 그쪽이 나를 알고 있듯, 나도 오늘 배우님과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소.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알게 되었다고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군.”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그랬으니까.

가상 세계에서 배역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순간마다, 서로가 이미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만나왔지 않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기에, 우진은 딱히 되묻지 않았다.

매튜가 말을 이었다.

“내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다 물어보시오. 뭐든지 대답해주겠소.”

우진의 두 눈이 ‘번뜩-’였다.

“좀 많은데, 괜찮습니까?”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3년 만이라 그런가. 입이 근질거리는군. 말을 많이 하게 해주면, 고맙겠소.”

“그러면, 저야 고맙죠.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뭐든 알고 싶거든요. 내게 주어진 시나리오에서는, 당신에 대한 정보가 워낙 한정적이라서요. 무슨 얘기든, 내게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매튜가 고개를 주억였다.

우진이 천천히 입을 뗐다.

* * *

“…아까 ‘디벨로퍼’의 머리를 쓰다듬은 행위는 정말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소. 하필 ‘머디’에서 ‘디벨로퍼’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괴생명체였거든.”

“머리를 쓰다듬은 게, 영향을 미치는 건가요?”

“그렇지요. ‘머디’는 신체 전 부위가 끈적한 점액질로 이루어져 있소이다. 불에 가장 취약한 괴생명체요. 피부가 굳기를 반복해 단단해진 ‘디벨로퍼’가 된다면, 태우는 것보다는 자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요. 아까 정수리를 쓰다듬었을 때 말이외다. 점액질이 조금 묻어나오지 않았소?”

“네, 맞아요.”

“‘머디’의 피부에서 가장 늦게 굳는 부분이 바로 정수리요. 점액질이 조금 남아있는 머리를 쓰다듬어달라 요청한 행위는 두 가지의 의미였소. 첫째로는, 배가 부른 짐승들이 눈앞의 사냥감을 가지고 놀다 죽이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요. 두 번째는, 정수리에 남은 점액질이 조금이라도 빨리 마를 수 있도록 치워달라는 뜻이었을 거요. 한 마디로, 아직 불완전한 ‘디벨로퍼’가 완전한 ‘디벨로퍼’가 되도록 도와준 셈인 것이지.”

“바보짓이었네요.”

“몰랐으니, 그럴 수밖에요. 나도 3년 동안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알아 온 지식이니, 자책할 것은 없습니다.”

우진이 묻고, 매튜가 설명하는 대화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괴생명체에 대한 질문은 우진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대목이었다.

완성된 스크린에는 CG 처리가 된 크리처들이 등장하겠지만, 촬영 현장에서는 무술팀 배우들이 크로마키 옷을 입은 상태로 크리처 연기를 해줄 것이다.

즉 크리처들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으니, 연기하는 배우부터가 이질감을 느끼기 쉬운 환경일 터.

그러나, 이렇게 직접 보는 것과 더불어 특성과 성질을 자세하게 알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확한 그림이 머릿속에 있는 상태와 그렇지 아니한 상태에서의 연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미묘한 차이, 혹은 종이 한 장의 두께보다도 더 얇은 차이 하나로 평이 갈리는 게 연기예술의 세계.

관객들의 시선을 일절 놓치지 않는 배우가 되려면, 사소한 것 하나도 자세히 파고들어야만 한다.

오죽하면 남들이,

‘뭘 그런 것까지 조사하냐?’

‘솔직히 이런 부분까지 연기할 때 필요한가 싶어.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니야?’

라고 물어볼 정도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배우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우진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튜의 입에 고정한 시선을 단 한 번도 떼지 않고 있었다.

“개체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감염 후 1년 이내까지를 ‘머디’, 1년 이후부터를 ‘디벨로퍼’라 보는 게 맞소. 처음에는 이렇게 두 가지 유형만 있는 줄 알았소. 그런데, 얼마 전부터 새로운 모습의 괴생명체가 나타났소.”

“혹시, ‘탱커’인가요?”

“역시 알고 있었군. 그렇소. ‘머디’에서 ‘디벨로퍼’가 되면서 녀석들의 몸집이 한 번 커지잖소. 이 경우도 마찬가지요. 키는 ‘디벨로퍼’일 때와 비슷한데, 몸집이 훨씬 커진다고 보면 되오.”

“약점은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알아낸 건 없소. 아까 말했다시피,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진 것이지요.”

“감염된 지 1년 이후부터 3년 이내까지를 ‘디벨로퍼’로 보고, 그 이후로 ‘탱커’라 본다는 거군요.”

“그렇소. 이젠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 3년 이후부터 또 어느 시점까지 지나고 나면, 새로운 형태의 괴생명체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일 테고.”

매튜는 여전히 덤덤했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미래가 어찌 되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진이 재차 질문했다.

“인류가 싸워야 할 상대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얼추 풀렸습니다. 이번에는, 당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군요.”

“허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만. 갑작스럽군.”

매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가 곧장 말을 덧붙였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묻겠소.”

“네, 말씀하세요.”

“백우진 배우가 먼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한번 말해보시구려.”

“음….”

빠르게 생각을 되짚은 우진이 말했다.

“현재까지의 대본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게 무엇이오?”

“당신이 어떠한 이유로 인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홀로 저 위험한 것들과 싸우면서까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진이 잠시 뜸을 들였다.

매튜가 괜찮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서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낡은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보는 장면들이 자주 나왔습니다. 가족사진이지요?”

“…맞소.”

매튜가 나지막한 음성이 대답했다.

말끝이 약간 흐려진 것은 덤이었다.

“이번에는 얘기가 좀 더 길어지겠군. 괜찮겠소?”

“네, 저는 당신의 얘기를 듣기 위해서 이곳에 온 사람이거든요.”

“…고맙군. 나는 말이오.”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화악-’ 퍼짐과 동시에,

“난민 출신 용병이오.”

매튜가 본인의 전사(前史)를 스스럼없이 밝히기 시작했다.

* * *

매튜의 조국은 동아시아에 속한 작은 나라, ‘유르케(Urke)’.

현실에서 존재하는 나라는 아니고, 영화 <죽음의 도시>의 세계관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국가다.

시나리오 설정상으로 유르케의 위치는 현실의 티베트 지역이라 보면 이해가 빠른데, 영화 내용과는 별로 상관없는 정보다.

어쨌든, 유르케 난민 출신 용병들이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사례는 빈번했다.

세계에서 가장 용맹한 외인부대라는 명성이 자자한데, 그야말로 전투에 특화된 전사들인 셈.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7년 전, 한창 용병으로 맹활약하던 매튜는 이슬람 테러리스트 단체에 의해 납치된 동양계 미국인 아내를 구출하는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매튜는 더는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유르케의 복잡한 내전 상황 때문에, 부득이하게 난민 신분으로 미국 땅을 밟게 된 매튜는 아내의 도움으로 미국인 신분을 획득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정착한 지 7년 차.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숨이 다할 때까지 오로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서만 살겠다며 했던 다짐이 어땠는지.

자세히 말을 늘어놓는 매튜의 표정을, 우진은 그 어떠한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었다.

울고 있는데, 웃고 있고.

미치도록 슬픈데, 미치도록 행복하고.

눈물은 떨어지지 않는데, 와락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이 아이러니한 표현들을 어떻게 한마디의 말로 정의할 수 있으랴.

매튜의 표정이 그러했다.

차마 어떠한 리액션을 하지도 못하겠는, 그런 감정의 발현이었다.

“…아내와 딸을 찾을 때까지, 절대 이곳을 떠날 수 없소.”

“…….”

“솔직히 나도 바보가 아니지 않소. 설령 감염되지 않았다 한들, 이 날씨에 저 위험한 것들이 널린 천치에서 여린 여성의 몸들로 살아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소. 살아있다면, 내가 진작에 발견했겠지. 3년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는데 말이오.”

저렇게 덤덤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을까.

사실 덤덤하게 말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울부짖으며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겠지만, 감정의 소용돌이가 이미 수십 차례 휩쓸고 간 뒤라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뿐.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다.

여러 감정을 연기해본 배우이기에, 매튜의 현 상태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만약 아내와 딸이 감염되었다면, 지금쯤 아마 ‘디벨로퍼’가 됐겠구려. 허허.”

마지막까지 애써 유쾌한 웃음을 지은 매튜가 말을 맺었다.

“난 누구도 믿지 않소. 내가 직접 본 것만 믿지. 죽었다면, 그 시신을… 죽지 않고 감염되었다면, 내 손으로 끝내고 싶군. 그뿐이오.”

배역이 갈구하는 간절한 염원.

그것이, 우진의 심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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