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의 다이어리-271화 (271/333)

271화

우진의 첫 번째 씬.

전체 그림에서 보면 열두 번째 쇼트(Shot)에 속하는 부분으로, 극 중에서 매튜라는 인물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바닥에 마킹된 동선대로만 움직여주시면 됩니다. 우진 배우님, 준비되셨나요?”

“네, 바로 들어가시죠!”

우진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조감독 알렉스 레이먼이 우렁차게 스탠바이 신호를 내렸다.

‘크리처’ 역할을 위해 크로마키 복장을 차려입은 무술팀 소속 스턴트 배우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액팅 디렉터(Acting Director, 무술 감독)가 최종적인 동선 점검을 마친 뒤,

“레디, 액션!”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받은 에릭 크리스토퍼 혼 감독이 촬영 지시를 내렸다.

우진의 모습만을 잡는 메인 카메라(A캠)와 세트장 바깥쪽에서부터 쭉 깔린 레일을 따라가면서 그가 마주 보게 될 ‘크리처’들을 담을 서브 카메라(B캠).

두 대의 카메라에서 붉은 표시등이 켜지더니, B캠이 레일을 타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르르르….”

“키이이익!”

사전에 협의한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스턴트 배우들이 괴상한 울음소리를 발산하였다.

두 마리의 ‘머디’와 세 마리의 ‘디벨로퍼’ 등 총 다섯 마리의 괴생명체로 분한 그들이 서서히 금발의 한 남자.

매튜를 에워쌌다.

그러나,

“…….”

괴생명체들이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는 일말의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뿐.

금방이라도 시한폭탄이 터질 것만 같은 극도의 긴장감이 세트장에 만연한다.

“…후우.”

매튜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찰나,

“키아아아-!”

“으어어어!”

성대를 긁는 듯한 사운드의 작은 침음만을 내뱉던 괴생명체들이 성난 비명을 내질렀다.

매튜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은 덤이었다.

“…여기에도.”

행동력이 훨씬 빠른 두 마리의 ‘디벨로퍼’들이 순서대로 달려들었고, 그 뒤를 ‘머디’들이 따랐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디벨로퍼’의 서슬 퍼런 손톱이 얼굴 직전까지 다가왔을 때,

“없군.”

비소가 섞인 목소리로 짧게 혼잣말을 읊조린 매튜가,

- 스르륵!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첫 번째 ‘디벨로퍼’의 공격을 몸을 돌려 가볍게 피한 그는 곧장 허리춤에 달린 칼집에서 대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선두에 선 괴생명체의 후미로 이동함은 물론이요.

이내 칼을 꺼내 드는 매튜의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지켜보는 스태프들의 시선을 단번에 이끄는, 아주 신속하고 정확한 액션이었다.

이윽고,

- 처억!

‘디벨로퍼’가 자신의 손톱이 먹이의 몸을 찢기는커녕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무섭게,

“키룩?!”

“잘 가라.”

- 푸슈슉!

괴생명체의 목을 감싼 매튜의 대검이 인정사정없이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키아아아-!

망설임 없는 그의 일격 앞에, ‘디벨로퍼’가 내뿜는 처절한 울부짖음은 고작 3초도 유지되지 못했다.

녀석은 그렇게 비명횡사했다.

- 털썩.

크로마키 복장의 스턴트맨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컷, 오케이!”

흡족한 표정으로 ‘오케이’ 사인을 내린 에릭 감독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연신 ‘Perfect’라 외쳤다.

곧바로, 다음 커트가 이어졌다.

추후 CG 작업을 통해, 첫 커트에서 매튜의 일격을 온몸으로 받은 ‘디벨로퍼’의 몸은 두 동강이 나는 것으로 표현될 예정,

다만, 촬영 현장에서는 이를 구현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커트 바이 커트’ 형식으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두 번째 커트 촬영이 시작되고,

- 털썩.

첫 테이크에서는 오른쪽으로 넘어졌던 스턴트맨이 이번에는 왼쪽으로 넘어졌다.

이는 본래는 하나였던 몸뚱이가 두 개로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매튜의 굳은 표정이 드러나는 연출의 편집 지점을 잡기 위함이었다.

재차 REC 확인등이 켜졌을 때,

“자, 다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완벽한 매튜의 표정과 눈빛으로 분한 우진의 연기가 촬영장을 순식간에 정적에 잠기게 했다.

- 타다다닥.

빠른 발재간을 뽐내는 매튜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과하다 싶은 느낌의 액션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딱딱 맞아떨어지는 동작들은 물 흐르듯이 유연했다.

어느새,

- 푸슈슉!

마지막 남은 ‘디벨로퍼’의 숨통마저 그의 냉혈한 칼끝에 의해 끊겨버리고 말았다.

“아주 좋아!”

“그렇지!”

메인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에릭 감독과 액팅 디렉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킹 동선에서 하나도 어긋나지 않으면서,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배우의 액션.

컷마다 원테이크만에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최대한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배우가 도대체 개인 연습을 얼마나 했으면, 감독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매튜보다 더 매튜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것일까.

액션 전담팀 스태프인 찰스에게서 매일매일 개인 훈련을 한다는 얘기는 대충 들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처음 미팅했을 때도, 분석력과 준비성이 심상치 않은 배우라고는 느꼈었지만….”

“정말, 상상 이상이었군.”

“무술 감독으로서 배우에게 어떤 동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 디렉션을 준다고 생각해서인지… 은근 기분 나쁜 티를 내는 경우가 많아서 좀 어려운데, 우진 배우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제 말을 온전히 받아들였어요. 제가 말씀드린 부분들을 전부 지키면서, 본인의 연기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네요!”

에릭 감독과 조감독 알렉스, 그리고 엑팅 디렉터 고든을 비롯해 촬영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스태프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크랭크인의 첫 포문을 연 우진은,

‘스태프들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

어느새 국내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에게 항상 받았던 신뢰의 눈빛을 할리우드에서 그대로 받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이 현상은,

“오케이!”

“컷입니다. 이어서 ‘머디’들한테 불붙이는 씬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방금 ‘디벨로퍼’ 처리하는 씬들 고프로로 한 번 더 가겠습니다.”

불과 두 개밖에 안 되는 커트를 촬영하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 * *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촬영은, 이른 오후까지 쉴 틈 없이 진행되었다.

전부 우진의 개인 촬영이었으며, 12번 씬을 세세하게 커트별로 나누어서 찍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전체 풀샷과 배우 개인의 바스트샷 시점에서 반복되는 액션과 더불어 매튜가 괴생명체를 하나씩 처리할 때마다 고프로 시점의 촬영을 반복하는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액션 장면에서의 고프로 촬영은 보통 캐릭터의 1인칭 시점에서 흘러가는 장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풀샷이나 배우의 바스트 샷, 또는 OTS(Over The Shoulder, 인물의 어깨를 전경에 걸쳐서 찍는 앵글)샷을 통해 펼쳐지는 그림들은 관객들에게는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다가오는 반면.

1인칭 시점의 고프로 촬영 기법은 비교가 안 될 만큼의 생동감과 긴장감을 주기 때문에, 관객으로서는 직접 주인공이 되어 괴생명체들과 싸우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커트별로 고프로 촬영에 들어갈 때마다,

“제가 직접 해도 될까요?”

“아이고, 우진 배우님. 아침부터 고생하셨는데, 대역분께 맡기시고 트레일러에서 좀 쉬셔도 돼요.”

“아니에요, 한번 해보고 싶네요. 고프로 촬영은 처음이거든요.”

“네, 배우가 원한다면… 저희는 좋지요!”

“오늘 매튜 대역은 할 일이 없겠는걸? 완전 꿀이네!”

“매튜 대역, 얼른 크로마키 의상으로 갈아입혀라~ 배우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하시려는 모양이야!”

“하하하하!”

우진은 직접 액션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신기한 일이었다.

액션 씬에서 고프로 촬영은 한국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거늘.

가만 생각해보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역 배우분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처음 해보는 경험을 절대 양보할 수는 없다.

그것이 배우라면 응당 가져야 할 욕심 아닐까?

화기애애한 농담이 오고 가는 현장에서, 우진은 미소를 머금었다.

액팅 디렉터와 함께 간단하게 리허설을 진행한 뒤, 고프로 액션 촬영에 돌입했다.

“레디, 액션!”

가장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고프로 액션 촬영 기법은, 배우(혹은 대역)가 입에 캠을 물고 찍는 방법이다.

간단하게 보여주고 마는 장면이면 모르겠으나, 에릭 감독은 매튜의 1인칭 시점에서도 정확한 액션 동작과 동선은 물론이거니와.

세세하게 떨리는 호흡과 디테일한 연기가 나타나길 원했다.

이는 우진이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자마자, 감독의 욕심이 솟구쳤기 때문이었으며.

단 한 프레임이라도 더 좋은 퀄리티의 영상미를 보여주고 싶다는 감독의 욕심을, 다른 사람도 아닌 배우 본인이 끌어낸 결과였다.

한 마디로,

“영상도 영상이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합니다. 절대로 다치지 말아요, 우진 배우. 알겠죠?!”

“걱정 붙들어 매세요, 감독님. 오직 이날을 위해서, 그동안 액션 아카데미에 출석 도장을 찍어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아주 좋습니다! 자, 스탠바이 하겠습니다.”

“다들, 조용!”

배우와 감독의 케미가 그 어느 때보다 잘 맞아떨어지는 현장임을 방증하는 광경이었다.

우진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에릭 감독이 고개를 주억였다.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듯.

첫 회차 현장에서 ‘내’가 과연 어떤 유형의 배우인지를 스태프들에게 낱낱이 보여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법이다.

우진이 배우로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매력이 철철 넘쳤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매튜 배역의 이미지로 옮겨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컷, 오케이!”

복잡한 액션들이 섞인 연기를 계속해서 1~2테이크만에 끝내는 우진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커트가 끝날 때마다, 스태프들의 침묵이 점점 길어졌다.

그만큼, 현장 전체가 갈수록 더 깊은 몰입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짜… 미쳤네.’

‘반나절 내내 개인 액션 촬영을 하는데, 분장이나 의상도 고칠 게 없어서 너무 편해요!’

‘야, 스토리보드 봐봐. 앵글에 하나도 오차가 없어!’

놀라움을 넘어선 감탄이 촬영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씬#12 촬영 종료입니다. 수고 많으셨고, 식사 후에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케이터링(Catering, 현장 밥차) 위치는 건물 2층 식당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네-!”

시간이 총알처럼 흘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그제야 귀에 들림을 눈치챈 우진이었다.

“크으! 고생했다, 우진아.”

“오~ 백 배우! 할리우드 앞에서도 쫄지않고, 한국에서 하던 대로 잘하던데? 스태프들이 네 연기에 푹 빠진 것 같더라.”

“완전, 완전! 원샷, 원킬로 끝내주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다들 네 얘기만 하더라고.”

오전 촬영이 끝나고서야, 개인 트레일러에 처음 들어섰다.

우진이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팀 우진’ 멤버들이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내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돌아왔다는 것에, 세상 뿌듯하고 의기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냉혈했던 매튜는 어디 가고, 금세 쑥스러운 얼굴로 돌아온 우진이 밝게 웃었다.

“밥 먹으러 가자!”

“네, 좋아요.”

“할리우드 밥차는 어떤지, 구경하러 가보자고!”

“나 지금 군침 흐르는 거 보여, 언니? 완전 기대 중! 허리띠 풀고 다 먹어 치우겠어!”

신이 난 고이와 혜정이 서로 팔짱을 낀 채, 달려 나갔다.

배 많이 고팠나 보네.

우진과 준안이 뒤를 따르며 ‘피식-’ 웃었다.

못 말린다, 정말.

“그나저나, 아쉽네. 고사 같은 게 없어서 말이야.”

“그러게요, 그럼 내기는 무승부인 걸로?”

“그런 셈이지.”

잡담을 나누다 보니, 금방 도착한 밥차 현장.

그런데,

“……?!”

“와우.”

우진과 준안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우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이 이긴 것 같네요.”

“그런… 거 같네.”

준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을 놀라게 한 크랭크인 첫날의 케이터링 메뉴는 바로, 대형 칠면조 고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