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눈 깜짝할 사이.
우진은 가상 세계로 이끌렸다.
그의 두 발이 곧장 닿은 곳은, 백색의 방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미션 완료. (8/10)】
【미션 진행도 : 80프로】
【보상 : 용량 추가 (+10)】가상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만난 캐릭터 ‘매튜’와의 안녕을 말하는 문구가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우진은 허공에 뜬 메시지 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
말없이 다가서는 그의 표정에서,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2편 후반 작업에 걸리는 기간과 개봉 후 전 세계 극장에서 상영될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우진은 무려 2년이 넘도록 ‘매튜’로서 살아온 셈이었다.
그동안 만나왔던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캐릭터였기에.
문구를 보았을 때, 어느 때보다 큰 아쉬움이 몰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바로 ‘미션 완료’ 처리로 지나갔다는 점에서 더더욱, 시원섭섭한 감정이 컸고.
그러나, 우진은 그러한 감정들에 굳이 매몰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감정을 떨쳐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으로 되뇔 따름이었다.
이건 아쉬움이 큰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회자정리’의 순간에서 비롯되는 감정은 결국 지나가는 감정에 불과하고, 배우는 이미 지나간 순간들에 얽매여선 안 되는 존재다.
해서, ‘매튜’는 이제 가슴 속에 묻어야 하는 아름다운 기억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
그러니까, 다이어리에서 미션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의 순간에 펼쳐지는 그림이 평소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예상을 계속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는 거다.
왜냐하면.
‘매튜’는 자신이 맡아온 캐릭터 중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었으니까.
저런 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만남을 마치고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 우진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왔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니까, 그나마 무덤덤하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시길.”
우진은 혼잣말을 작게 읊조리며, 허공에 떠 있는 메시지 창 하단의 ‘OK’ 버튼을 눌렀다.
문구가 사라짐과 동시에,
- 위이잉.
그의 눈앞에서 다시 한번 환한 불빛이 일었다.
이윽고,
“……!”
우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진아!”
“할머… 아니, 아주머니?!”
점점 사그라든 불빛 사이로, 한 여인이 등장한 탓이었다.
“어? 방금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려다가 급하게 말을 바꾼 느낌이었는데? 기분 탓이지?”
“하하….”
“거짓말 못 하는 건, 여전하네?!”
이전보다 훨씬 젊어진 노파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50대 초중반으로 보였던 그녀의 현재 외모는, 누가 보더라도 4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아직도 ‘할머니’라는 호칭이 익숙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왔을 뿐.
이제는 솔직히, 누나라고 불러도 전혀 괴리감이 없는 수준.
기껏해야 열 살 안쪽으로 차이가 날 법한 모습이었다.
“제가 미션을 하나씩 완수할 때마다, 세월을 한 10년씩 ‘훌쩍-’ 건너뛰시는 모양이군요.”
“호호, 신기하지?”
“네, 이젠 누나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어머, 어머! 못 본 사이에 매우 잔망해졌구나!”
노파가 ‘깔깔-’ 크게 웃었다.
다이어리를 통해 그녀와 굉장히 자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남과 만남 사이의 텀은 무척 긴 편이고, 실제로 특별 가상 세계에서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7번째 미션을 완수한 이후였었으니까.
그 날이 마침 또 자신이 과거로 회귀한 지 딱 5년째 되는 날이었기에, 우진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비록 할… 아니, 아주머니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나이를 점점 먹고 있고요.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저도 모르게 조금씩 여유로워지나 봐요.”
“호호, 나도 그래. 신체적으로 젊어지니까, 말투부터 행동이 자연스럽게 바뀌더라고.”
“그래 보여요. 저번까지는 약간 뭐랄까… 인생 선배님과 대화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푸근하고 여유로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활력이 넘치는 누나를 뵙고 있는 것 같네요.”
“누나라는 표현, 아주 마음에 든다. 이제 할머니나 아주머니라는 말 대신, 그렇게 불러줄래?”
“네, 누나.”
우진이 미소지었고, 노파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우진이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원래 제가 누나를 뵐 때는 ‘특별 가상 세계’로 가는 것 아니었나요?”
“어, 그렇지?”
“그런데, 이번에는 왜?”
현실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때, 다이어리의 문구에는 분명 ‘가상 세계’로 이동한다고 쓰여 있었다.
다이어리 문구 창은 ‘특별 가상 세계’와 일반적인 ‘가상 세계’를 구별해서 나타내주었기 때문에, 실수도 아니었을 터.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소하게 넘길 만한 것들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네. 관찰력이 대단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맞아, 내가 널 일부러 여기로 부른 거야.”
“일부러요?”
“그래. 원래대로 너를 불렀다면, 이곳은 ‘특별 가상 세계’여야 하겠지. 하지만, 그곳에는 지금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해둔 선물이 있어서 말이야. 어쩌겠어? 내가 이쪽으로 와야지.”
“선물이요?”
“어, 그것도 네가 아주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는 선물이야.”
노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뭔데요?”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노파가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 위이잉.
노파가 나타나기 직전의 상황처럼, 눈앞에 빛이 일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이 지나간 허공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허공에는 또 다른 메시지 창이 떠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닿은 문구는,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그에게 아주 익숙한 질문을 해오고 있었다.
“우진이 네가 수락을 해줘야만 줄 수 있는 선물이야.”
노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명한 문구 밑으로 ‘예’와 ‘아니오’ 버튼이 생겨났다.
“계속 고민 중이었지? 이번 작품도 다이어리를 쓸지, 말지.”
“네, 맞아요. 알고 계셨군요.”
“나는 언제, 어디서든 너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말했잖아. 빈말이 아니었어.”
우진이 ‘피식-’ 웃음 지었다.
노파가 말을 덧붙였다.
“벌써 7년이구나, 우리가 서로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지가.”
“그렇네요. 시간 빨라요.”
“그동안 수 차례 말해왔듯, 나는 죽은 령(靈)에 불과해. 그리고, 령(靈)은 ‘계약자’가 계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내리는 판단과 결정에 절대 관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고.”
노파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네가 때때로 가상 세계를 열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도, 나는 그 결정을 지지하고 묵묵히 기다렸어. 너의 권리니까.”
“잘 알고 있어요. 저도 누나가 그만큼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시는 부분에 감사하면서도 죄송하고요.”
“그래, 우린 서로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두 가지 감정을 품는 관계인 거지. 물론, 내가 너한테 고마운 마음이 더 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너를 만나기 이전에 지나갔던 아홉의 ‘선행 계약자’들을 문득 되돌아보면, 너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거든.”
“무슨 말씀이세요. 연기를 포기하려고 했었던 제가 배우로서의 삶을 지금처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누나 덕분인걸요. 제가 더 감사하죠.”
“에잇, 갑자기 오그라드네. 뭐, 아무튼….”
잠시 말끝을 흐린 노파가 이내 입을 뗐다.
“너의 연기관과 신념에 내가 관여하겠다는 게 절대 아니야.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요. 누나가 그런 의도가 없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뭐든, 말씀하세요.”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네가 이 미션을 수락했으면 좋겠어. 아홉 번째 가상 세계가 최대한 빨리, 열렸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노파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음…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곧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내가 욕심이 생겨서 그래.”
노파가
“참 고맙게도 네가 나와 맺은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해주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는 점점 젊음을 얻고 있잖니. 늙은 몸에 갇혀있을 때는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점점 젊어지는 게 내 눈에도 보이니까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 같네.”
“…….”
우진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를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의미가 담긴 제스처였다.
하긴….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작 80프로밖에 미션을 완수하지 못한 데다가, 하나의 가상 세계를 마무리하는 데까지는 무려 2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스스로 ‘인과율의 대가’라고 표현한 족쇄에서 벗어나고픈 노파의 삶은, 7년 내내 계약자가 하루라도 빨리 미션 100프로를 달성하는 순간이 오기만을 염원하는 심정의 연속이었을 터.
답답했을 거다.
‘내’가 역지사지의 포지션이었다면, ‘나’ 또한 그랬을 만큼.
“했던 말 또 해서 미안한데, 한 가지만 확실히 할게. 네가 절대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내가 우진이 너한테 미안해할 일이지.”
“아니에요, 누나.”
“어쨌든, 나는 절대 너에게 선택을 종용할 수 없어. 오로지 네 몫이야.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노파의 목소리 톤이 다시 해맑은 톤으로 바뀌었다.
“거래를 제안할 수는 있지. 네가 아주 구미가 당기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거야.”
“그 조건이라는 게, 아까 말씀하신 선물인 거고요?”
“그렇지! 네가 지금 아홉 번째 가상 세계를 열지, 말지를 고민하는 이유도 이미 잘 알고 있어. 그 고민들을 말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으로 가상 세계를 체험하게 해줄게. 어때?”
“음, 좋은데요?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은….”
“아, 그건 안 돼. 미리 알려줄 순 없어.”
“왜긴? 깜짝 선물이니까!”
노파는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궁금증을 폭발시키는 저 선물의 존재가 무엇인지, 우진은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좋습니다.”
우진은 가상 세계를 열겠다고 노파와 약속했다.
‘계약자’와 ‘령(靈)’의 관계 속에서 그녀와 쌓아온 신뢰도 신뢰거니와, 애초에 연기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기도 했다.
설령 노파가 준비한 방식의 가상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가상 세계를 여는 소중한 기회 한 번쯤이야 버려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지난 7년 동안 몇몇 작품들에 대해서 다이어리를 열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실망보다 계약자의 신념과 철학을 존중한다, 기다리겠다고 했었던 노파의 생생한 모습이 뇌리를 지나가는 찰나였다.
“우진아, 정말 고마워!”
그녀가 우진의 두 손을 꼭 잡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누가 더 고마운가로 내기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주고받았다.
“누를게요, 수락 버튼.”
“응.”
우진이 망설임 없이 ‘Yes’ 버튼을 눌렀다.
다이어리가 허공에 ‘촤르르-’ 펼쳐지는 멋있는 광경 대신,
【‘특별 가상 세계’를 구현합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문구가 ‘촤르르-’ 소리를 내며 바뀌었다.
우진이 ‘예’ 버튼을 눌렀고,
【‘특별 가상 세계’로 이동합니다.】- 위이잉!
메시지 창에서 빛이 번졌다.
우진이 빛에 휩싸였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거야. 잘 다녀오렴!’
움직이는 노파의 입 모양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찰나.
【이 만남이 귀하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5, 4, 3, 2, 1】불빛이 우진을 삼켰다.
우진은 그렇게, ‘특별 가상 세계’로 이동했다.
그렇게, 잠시 후.
노파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던 선물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확인한 우진은,
‘……!’
그대로 넋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