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의 다이어리-330화 (330/333)

330화

크리스 워싱턴의 입에서 본인의 이름이 호명된 직후,

“…….”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남들에게는 5초도 안 되는 짧은 찰나였겠으나, 그의 뇌리에는 <웹캠 쇼 더 라이브>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감격이 복받쳤다.

뚜껑을 열기도 전부터 모두가 안 될 거라고 단정했었고, 심지어 제작진조차도 캐스팅 미팅에서 자기들이 먼저 평균 시청률 2.5프로 이상이라는 목표를 제안해놓고는 정작 성공에 대해서 반신반의했었던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을, 이 자리까지 혼자서 이끌어온 부담감이란….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했는데도 불구하고, 말끔하게 가시지 않았던 감정이 비로소 깨끗하게 씻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안도감이 밀물처럼 몰려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터진 거였고.

- 툭툭.

“우진, 축하해요.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울더라도, 무대 위에 나가서 울어줘. 당신의 눈물은 무대 아래에서 쏟기 아깝다고. 무대 위에서 빛날 가치가 있어, 친구!”

“우진, 당신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얼른 무대 위로 오르세요. 지금 이 순간, 스테이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랍니다.”

도미닉 감독이 여전히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우진을 천천히 일으켰다.

같이 후보에 올랐던 배우들도 어느새 곁에 다가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눈시울이 벌게진 우진은 그제야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당당히 무대에 올랐다.

“감탄을 자아내는 연기였어요. 이 에미 트로피를 시작으로, 내년 오스카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크리스. 저 또한 당신의 순발력과 재치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꼭 배우고 싶군요.”

크리스와 가볍게 포옹하며 서로 격려의 말을 주고받은 우진은, 그에게서 건네받은 트로피를 높게 치켜들었다.

박수와 환호가 한층 더해졌다.

이윽고, 마이크 앞에 선 우진이 입을 뗐다.

“늦게 올라와서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네요. 숀 ‘블랙’과 무대 위에서 마주한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었나 봐요.”

- 푸하하하!

우진의 능청스러운 표정과 말투가 청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감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들의 명단을 그저 줄줄이 읊는 식의 뻔한 수상소감이 정형화된 국내 시상식과 달리, 수상자가 어떤 말을 해도 귀를 기울이고 풍족한 리액션을 해주는 자리여서 그런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할리우드에서 시상식을 처음 경험하는데, 상당한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제라는 표현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분위기예요. 수상소감을 빨리 끊으라는 무언의 압박도 없고, 여러분의 반응도 굉장히 좋아요.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우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감을 이었다.

“저는 한국에서 활동할 때도 ‘최초’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최초’라는 단어에 매우 익숙합니다.”

우진의 수상소감을 경청하는 참석자들의 모습이 스크린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모두 진지하면서도 흡족한 얼굴로 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뉘앙스의 차이는 조금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최초’는 성공했다는 의미가 강했던 반면, 할리우드에서의 ‘최초’는 늘… 뭐랄까, 놀랍다는 의미가 더 진했거든요. 미묘한 차이죠. 그래서일까요? 내가 만약 백인 배우였다면, 무언가를 해냈을 때 사람들은 ‘해냈다는 것’에 놀라워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아시아인 배우라서 사람들은 ‘해냈다는 것’에 놀라워하는 게 아니라 ‘아시아인’이라서 놀랐던 것일지도… 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던 것 같아요.”

우진은 한창 인종차별 이슈가 떠들썩했을 때도, 그리고 레지널드 쇼에 출연해 ‘숀 라이트 사건’과 관련된 질문을 대놓고 받았을 때조차도 ‘본인이 아시아계 배우여서 어떻다’라는 식의 직접적인 표현을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아시아계 배우’라는 표현을, 수상소감에서 부각하고 있었다.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가 시상식장에 맴돌았다.

우진이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생각들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백인이 어떻고, 흑인이 어떻고, 아시아인이 어떻고… 결국 허울뿐인 핑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태생부터 타고나는 외적인 차이에 묶여 제자리걸음 하기보다, 배우의 본질에 더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오늘 이렇게 아시아 배우 최초로 에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네요.”

장내가 고요해졌다.

“저는 연기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저 자신에게 잘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무조건 해낸다는 마음가짐으로 묵묵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원하는 바를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증명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에미상 트로피를 쥔 오늘의 제 모습이 인종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배우분들뿐만 아니라 인종과 상관없이 오로지 꿈을 향해 나아가는 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진이 정면의 카메라를 향해 트로피를 보이며 말했다.

“천사가 하늘을 향해 지구본을 들고 있는 이 트로피의 모양처럼, 우리 모두 꿈과 희망으로 하나가 되길 간절히 염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미래의 저는 언제나 오늘 이 순간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도와주시겠습니까?”

우진이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장내에는 가장 큰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진심이 묻어나는 젊은 배우의 수상소감이 청중의 심금을 울렸다.

“마지막으로 ‘웹쇼라’를 함께 한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저와 함께 후보에 올랐던 위대한 배우분들과 같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시상식 후에 있을 파티에는 조금 늦게 참석할 것 같아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영광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는, 이 조그마한 트로피를 한… 70조각 정도로 나눠야 할 것 같군요.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니, 빨리 무대 뒤로 들어가야겠습니다.”

- 푸하하하!

“참, 까먹을 뻔했네요. 집에서 보고 있을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플라워와 ‘팀 우진’ 식구들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상소감을 맺은 우진이 트로피에 입을 맞추었다.

그와 동시에, 수상자를 축하하는 반주가 흘러나온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우진의 모습이 무대 뒤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그 소리를 뒤로하고 백스테이지로 들어선 후에야, 우진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상에 섰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을 때의 기분이란, 이런 거구나.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인지라, 우진의 가슴이 절로 뭉클해졌다.

오늘 또 한 번 ‘증명’했구나.

그리고, 인정을 받았구나.

오늘만큼 기쁜 날이 또 있을까.

분명 또 있을 거다.

머지않은 미래에 말이다.

- 꽈악.

우진은 트로피를 쥔 손에 힘을 ‘꽉-’ 쥐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웹캠 쇼 더 라이브>는 에미 시상식에서 우진의 ‘TV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포함해 총 8관왕을 달성했는데, 여기서 이룬 쾌거는 그야말로 신호탄에 불과했다.

4개월 후에 찾아온 또 다른 시상식에서마저, 우진은 눈부시게 빛나는 커리어를 쌓게 되었으니.

때는, 1월 첫째 주 일요일.

매년 1월에 개최되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이었다.

골든글로브는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동시에 아우르는 시상식이기 때문에, 우진은 영화 <죽음의 도시 2>와 드라마 <웹캠 쇼 더 라이브>를 통해 두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

물론 살짝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죽음의 도시 2>로 후보에 오른 부문이 바로 남우주연상이 아닌 남우조연상이었던 것.

제작사 ‘원더브라더스 필름’ 측에서 그가 주연임을 몇 번이나 고지했지만, 후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끝내 조연으로 구분됐던 거다.

후보가 발표되자마자 ‘원더브라더스’와 에릭 크리스토퍼 혼 감독은 즉시 주최 측에게 강력히 항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괜찮습니다. 한국 속담 중에 ‘밥을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영화를 통해 언젠가는 남우주연상을 꼭 받겠다는 목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좋아요. 저 스스로 안주하지 않고 채찍질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니까요.”

우진이 극구 만류함으로써,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던 일은 작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배우 백우진, 韓 배우 최초 골든글로브 수상… TV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영화 부문 남우조연상 쾌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백우진, 꿈의 무대 ‘오스카’에 한 발짝 가까워지다!]

[‘This is the very first Golden Glove to South Korea’, 백우진의 수상소감 화제]

우진은 2관왕을 차지했다.

2018년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이 아닌 배우 수상자로서는, 우진이 유일한 다관왕 수상자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두 개의 트로피가 추가되었다.

엔진이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파죽지세로 뻗어나가는 우진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다.

겨우 4일 후… 그러니까, 골든글로브에서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1월 둘째 주 목요일.

우진은 골든글로브와 마찬가지의 성격을 띤 제23회 크리틱스초이스 시상식에서 두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그중 하나인 영화부문 남우조연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시상식 참석 준비를 하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2주 뒤인 1월 셋째 주 일요일에는 미국배우조합상(SAG Awards) 시상식이 열렸고, 여기서도 우진은 <죽음의 도시 2>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새벽 시간대에 케이블에서 방송된 시상식 장면을 라이브로 지켜본 한국 영화계는, 점점 최초의 오스카를 향한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골든글로브, 크리틱스초이스, 그리고 미국배우조합상에서의 수상은 매년 2월 마지막 또는 3월 첫째 주 일요일에 개최되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미리 보기’ 버전이라는 인식이 강하니까.

오스카를 향한 첫 단추였던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조연상’ 부문으로 굳어져서 그런지, 이후의 시상식들에서도 주연상이 아닌 조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점은 아쉽다는 평이 다수 따랐으나.

상관없었다.

팩트는 총 네 번의 시상식에서 다섯 개의 트로피를 손에 넣는 기염을 토한 데다가, 특히나 영화부문에서 남우조연상을 싹쓸이하는 행보를 보여줬다는 것뿐.

초대만 받아도 무한한 영광인 자리에서 받는 상이라면, 부문의 구별이 없기도 했고.

‘오스카’라는 그 이름 자체가 의미 있는 거니까 말이다.

“와, 하루가 멀다고 시상식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네. 드디어 쉬는 건가….”

“언니, 오늘도 고생했어요….”

“…그래, 혜정아. 우린 해냈다.”

미국배우조합상 애프터 파티 일정까지 소화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

화려한 드레스가 은근 불편했던 모양인지, 고이와 혜정은 차에 들어서자마자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뒷좌석에서 그대로 뻗었다.

하나,

“허허, 눈을 감기에는 아직 이를 텐데… 여보세요, 언니들! 혹시 그거 아실랑가?”

“뭔데요?”

“오스카 후보 발표 말이야. 내일모레라고 하던데?”

“……!”

“……?!”

그녀들은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는 준안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꺼낸 말에 곧바로 뜬눈이 되었다.

“누나들, 정말 고생 많으세요. 상반기 마지막 시상식입니다. 아직 후보 발표가 나오기 전이라서 김칫국 마시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가게 된다면… 이번에도 잘 부탁드릴게요!”

우진의 해맑은 미소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고이와 혜정은 ‘피식-’ 웃었다.

하긴, 몸이 힘든 게 대수랴.

‘내’ 배우가 빛나는 게 중요하지.

고이와 혜정의 초점 없던 눈빛이 이따금 ‘번뜩-’였다.

고개를 돌린 우진이 의자에 등을 편하게 기댔다.

그렇게, 잠시 후.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준안에게 말했다.

“준안이 형.”

“어, 우진아.”

“만약, 내일모레 오스카에서 발표하는 후보 명단에 제 이름이 있으면요.”

“야, 무조건 있지. 네가 1월에만 남우조연상 3관왕인데, 없을 리가 있나!”

“확정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아무튼, 만약에 있으면요.”

“어, 말해.”

준안이 백미러로 우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우진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진이 말을 이었다.

“그 즉시, 우리 다 같이 한국에 잠시 다녀오면 어떨까 해서요. 일주일 정도?”

“엥? 한국?”

“네, ‘원더브라더스’ 프로듀서님들과 에릭 감독님께는 내일 제가 말씀드릴게요.”

“갑자기 왜?”

우진의 말에, ‘팀 우진’ 멤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이내 대답했다.

“그냥… 그리고 싶어서요. 비현실적인 일들이 숨 쉴 틈 없이 벌어지니까, 잠깐이나마 숨 좀 돌리고 싶어졌어요.”

말을 맺은 우진은 창밖의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겼다.

그런 우진의 모습에, ‘팀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리 기쁜 일이 몰아친다고 할지라도, 하루가 지날수록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변하는 환경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거구나.

짧게라도 좋으니, ‘내’ 배우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분위기 전환임을 준안은 단번에 깨달았다.

“먼저 올라가. 나 차 좀 정리하고 갈게.”

“같이 해요, 형.”

“아니야, 아니야. 빨리 올라가서 쉬어. 고이야, 혜정아. 쟤 데리고 빨리 올라가라. 우진이 요새 잠을 거의 못 잤잖냐. 건강 해칠라.”

“알았어요, 형. 먼저 갈게요.”

숙소에 도착한 준안은 자연스럽게 우진을 올려보냈다.

우진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그는 주머니에서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뚜르르.

신호 연결음이 한 번을 채 넘기도 전에,

- 꽃돼지!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어?!

우희의 해맑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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