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빙궁.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죽이지 말고 살려 두라는 진호림의 명령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천룡의 활인기에 의한 치료 덕이었을까.
심각하게 부상을 입은 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부상자들은 천룡에 의해 전부 치료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궁주가 감격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사돈이 아니었다면 신으로 모시겠다며 따라다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모든 사태의 원흉인 진호림은 내공을 금제 당한 채 지하 감옥에 갇혔다.
북해를 침공했던 그의 수하들 역시 금제를 당하고 감금이 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천룡이 뿌린 만뢰를 맞은 무인들이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아무런 감정도 없던 그들이 만뢰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아직도 감정이 없이 있는 자들과 정신을 차린 자들을 비교하던 찰나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고였다.
머릿속에 심어진 고는 사람의 이지를 상실하게 하고 명령에만 복종하게끔 조종을 하게 했다.
그런데 만뢰에 그 고들이 타 죽은 것이다.
정신을 차린 이들은 자신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를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어리둥절해하는 그들.
알아보니 중원 곳곳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던 무인들이었다.
바로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다들 모여 있었다.
“그러니까 벌레를 이용해서 세뇌를 시킨 상태라 이거지?”
“네. 사부의 뇌전에 머릿속에 있던 벌레가 증발한 것 같아요.”
“그럼…… 저들에게 죄가 있는 건가? 없는 건가?”
“기억을 못 하니…… 없다고 해야 하나요?”
말을 하다가 빙궁주를 바라보았다.
이 사건의 피해자니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궁주 역시 그 말을 듣고 엄청 놀랐다.
사람의 이지를 상실케 하고 기억조차 조종하는 벌레가 세상에 있다니.
하지만 눈앞에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어쩐지 불물 안 가리고 덤비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하아, 어렵군요. 범인은 있는데…… 범인이 아니라니…….”
“이게 위험한 이유가 이 고를 이용하면 중원의 모든 무인들을 혈천교의 무인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걸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으니…….”
그 말을 하며 무광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강한 이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서 혈천교를 대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큰 착각이었다.
오히려 강하게 키운 무인들이 자신들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올 판이었다.
다행히 이번 사건으로 인해 발견되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죄 없는 이들을 배신자로 오인하여 전부 죽일 뻔했다.
이건 나중이 돼도 문제였다.
지금처럼 서로 간에 말이 나올 심산이 컸다.
죄가 있냐 없냐고 분란이 일어날 확률이 십 할이었다.
“혈천교 놈들이 이번엔 제대로 준비를 했군요. 강한 무인도 모자라서 중원 침공에 투입되는 무인들도 중원인들이라니.”
“거기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 말로는 자신들의 내공이 어마어마하게 늘어 있다더군요. 혈천교에서 엄청난 공을 들인 모양입니다.”
“그러게. 무인들이 죽는다고 해도 혈천의 무인이 아니니 아쉬울 필요가 없고, 부족하다 싶으면 저 고를 이용해 다시 채우면 되니……. 진정한 무림 말살이 일어날 뻔했군.”
다들 표정이 심각했다.
그러자 천룡이 말했다.
“그래도 원인과 해결책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이 고를 연구해서 뇌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천룡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러기 전에 정보를 얻어야겠죠. 어찌할까요? 진호림이라는 놈이 정보를 말해 줄까요?”
“글쎄다…… 일단 만나야겠다. 사돈. 좀 데려와 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무광이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직접 데려올게요.”
천룡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궁주를 따라 나갔다.
궁주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두운 얼음 동굴이 나왔다.
바로 이곳이 빙궁의 중죄인만 가둔다는 만빙옥이었다.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감옥 끝에 진호림이 앉아 있었다.
진호림을 발견한 무광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감옥에서 만난 진호림은 생각보다 표정이 좋아 보였다.
“감옥이 의외로 체질에 맞나 봐? 표정이 좋네?”
무광의 물음에 진호림이 웃으며 답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군요.”
예상외의 답변이 들려왔다.
“일단 나가자. 너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다.”
“후후후, 알겠습니다.”
너무도 순순히 따라 나오는 진호림을 보며 궁주와 무광은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였다.
그래도 일단은 협조적이니 지켜보기로 한 둘이었다.
***
진호림을 탁자에 앉히고는 무광이 질문을 시작했다.
“혈천교 맞지?”
무광의 질문에 진호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너의 직책은?”
“사대 호법.”
“사대 호법? 네가? 그 전에 애들은?”
“그분들은 원로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런가? 그렇군. 그럴 나이가 되었군.”
어려진 후로 나이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무광이었다.
“널 보니 혈천교에서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겠다.”
“후후, 제가 사대 호법 중에서 가장 약합니다. 그러니 이곳으로 보내졌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
“아, 저도 들은 말인데 우리 교주께서 중원 침공을 당분간 보류하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단 실전 연습 삼아 이쪽으로 보내신 것 같군요.”
“살생을 자제한 이유는?”
“이곳을 지부로 만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라 하셨죠.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진호림의 말에 무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저들이 왜 사상자를 안 내고 이곳을 접수하려 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더 고를 심어 세뇌를 시키려 한 것이다.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고의 정체는 무엇이냐?”
“……?”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무광을 바라보는 진호림이었다.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벌레 말이다.”
“사람 머릿속에 어찌 벌레가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반문하는 진호림이었다.
“정말 몰랐단 말이냐?”
“그걸 어찌 압니까?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지금 대답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진 무광이었다.
심문을 받는 것치곤 너무도 태연하게 답을 하고 있었다.
그때 천룡이 말했다.
“사실이다. 진실을 얘기했어.”
“네?”
“몸에서 나오는 기파가 안정되었어.”
“그런 거로 알 수 있습니까?”
“대략은. 암튼 저자는 거짓을 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룡이 하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그럼 너희 본단은 어디야?”
“죄송합니다. 그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뭐? 아니, 니네 본단을 왜 몰라? 너 사대 호법이라며!”
“최대한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며 각 호법마다 분산시켜 훈련하였습니다.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으시겠다면서요. 저는 북쪽에서 훈련했지요. 다른 호법들 역시 세외 어딘가에서 훈련 중일 겁니다.”
“그럼 너희 교주는?”
“한 번도 못 뵈었습니다.”
“아니, 아까 교주가 중원 무림 어쩌고 했다며!”
“이번에 명을 전하러 온 놈이 말해 준 겁니다.”
다시 천룡을 보니 천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미치겠네.”
“…….”
얘기를 들어 보니 정말로 철두철미했다.
조금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철저하게 방비를 해 놓은 것이다.
그 군사라는 자를 만나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 네가 아는 정보는 뭐야?”
“음, 일단 대막 어딘가에 본단이 있다는 것?”
“야 이씨! 그건 나도 말하겠다!”
“그 본단이 수시로 이동을 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뭐? 그럼 본단이 아니잖아!”
“그 부분은 저도 잘…… 명령을 전달하러 오는 자가 말하길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들도 시일을 잘 못 맞추면 본단을 못 찾는다고요.”
“그런데 너 무슨 의도로 이렇게 술술 대답하냐?”
무광의 마지막 질문에 진호림이 천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분의 능력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습니다. 하하, 모든 게 허무해지더군요.”
진호림의 말에 천룡을 제외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저분에게는 안 될 것 같고, 또 혈천교가 아무리 준비해 봐야 역시 저분에게 안 될 것 같으니…….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으로 하죠.”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도 엄청난 광경을 목격한 뒤라 모든 것이 허무했다.
무엇을 위해 무공을 연마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혈천천하는 물 건너간 거 같으니 남은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어찌할까요? 궁주님?”
일단은 빙궁주에게 의견을 묻는 무광이었다.
“일단은 이곳에 감금해 두겠습니다.”
궁주의 말에 무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에게 양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무광의 말에 궁주는 잠시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보다 더 혈천교와 관련이 있는 자가 바로 무황이었다.
과거에 혈천교로부터 중원을 구한 영웅.
그에게 보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들의 소식이 끊긴 것을 알면 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것이 뻔한데…….”
“……그렇다고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수만의 백성들을 두고 어딜 갑니까?”
그게 문제였다.
천의문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일단 인원수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래서 천의문처럼 운가장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이동시킬 수도 없었다.
그때 천룡이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혹시 그 혈천교의 본단, 진법을 설치한 것이 아닐까?”
“네?”
“내가 살던 곳도 천연진으로 인해 세상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혈천교라고 그런 진을 설치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진법이라…… 그럼 이곳에 진법을 설치하자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최소한 이들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시간을 벌 수 있는 정도는 돼야겠지.”
천룡의 말에 빙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돈의 말이 맞습니다. 진법이라.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넓은 공간을 어찌 감당할지.”
그 말에 천명이 슬그머니 나서서 말했다.
“이 정도 넓이에 진을 펼칠 수 있는 자가 있긴 하지요.”
“정말이오? 그게 누구입니까?”
궁주가 눈빛을 빛내며 묻자 천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도 말로만 들었습니다. 제갈가에 천재가 있다고. 그자는 진법에도 통달했다고 말입니다.”
“뭐? 제갈? 야. 제갈세가는 무림맹이잖아. 거기서 잘도 북해빙궁을 도와주러 오겠다. 거기다가 우리와도 사이가 안 좋잖아!”
“그러니 제가 이러지요. 그 외에는 딱히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무광과 천명의 말에 빙궁주가 물었다.
“저희야 세외라 경계를 한다지만 사돈 쪽은 왜?”
“아, 몇 번 안 좋게 부딪혔습니다.”
“허허, 정말 대단한 집안이군요. 고금 무적인 사돈댁에게 덤볐다니.”
빙궁주의 말에 무광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모르니 그랬지요! 모르니까. 알면 그랬겠습니까? 자기네 집안이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날 텐데?”
“일단 당 가주를 부르자. 우리보다 아는 정보가 많은 것 아니야?”
“아, 그러네요? 일단은 무림맹 소속이니 뭔가 알겠네요.”
그 말에 빙궁주가 화들짝 놀라고 말했다.
“네? 아니, 이곳에 당가의 가주가 있다고요?”
“아! 하하, 네……. 저희 일행 중에 붉은 옷을 입은…….”
“헉! 그 사람이 당가의 가주였단 말입니까?”
“네.”
“나는 사돈의 시종인 줄…….”
그렇게 착각할 만했다.
천룡만 졸졸 따라다니며 천룡의 수발을 들었으니.
‘사천당가라면 중원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가문 아닌가! 그런데 그런 집안의 가주를…….’
새삼 천룡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궁주였다.
그리고 이런 사람과 인연을 맺게 해 준 자신의 딸이 너무도 대견했다.
***
불려 온 당벽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빙궁주에게 물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제가 알기론 북해빙궁에 유명한 절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저희에게요?”
“네!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니 있군요. 한빙만천쇄진(寒氷萬天碎陣)”
“한빙만천쇄진?”
궁주의 입에서 나온 절진 이름에 다들 궁금증이 일었다.
“하아, 그렇군요. 당 가주님 덕에 잊고 있던 빙궁의 진법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진은 저희가 어찌할 수 있는 진법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빙궁이 자랑하는 절진이 있는데 사용을 할 수 없다니요?”
“이 절진을 가동하기 위해선 만년빙정 또는 그에 준하는 냉기를 가진 자가 필요…….”
궁주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그런 자가 있다.
얼마 전에 생겼다.
바로 자기 아들이자 소궁주.
전설의 오행체인 빙령지체(氷靈之體).
세상 모든 음한지기를 담을 수 있는 완성형 신체.
떨리는 동공으로 천룡을 바라보았다.
천룡은 궁주가 눈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그에 준하는 냉기를 가진 자가…….”
“오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고맙소! 정말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