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궁주는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진이 발동하는 조건이 뭡니까?”
“일단 빙궁의 지하 깊숙한 곳에 수정구가 있소. 그곳에 소궁주가 빙한지기를 가득 채워 주면 되오. 원래 만년빙정을 그 안에 넣어야 하는데 소궁주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니 된 거요.”
“진이 발동하면 어찌 됩니까?”
“그 진이 발동하면 우리가 진을 해체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눈보라가 칠 것이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리고 성 주변으로 극한의 냉기가 끊임없이 맴돌아 접근하는 자는 순식간에 얼음으로 만들 것이오.”
궁주는 잃어버린 절진과 자기 아들이 빙령지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기뻐했다.
그런 궁주 옆으로 와 함께 기뻐해 주는 천룡이었다.
궁주는 신이 나서 천룡에게 말했다.
“거기에 소궁주의 체질이라면 불가능이라 불리던 빙백신공을 극성까지 익힐 수 있소! 극성까지 익히기만 한다면 저들이 아무리 몰려와서 겁나지 않소이다!”
“그래도 항시 경계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고맙소이다, 사돈! 사돈이 아니었으면 이 빙궁이 어찌 되었을는지…….”
그러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궁주였다.
그런 궁주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는 천룡이었다.
“하하, 우리는 가족 아닙니까? 앞으로도 빙궁에 어려움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모든 것을 제쳐 두고 달려오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빙궁주와 천룡은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
호북성(湖北省) 무당산(武當山).
무당산에 자리하고 있는 무당파(武當派).
장문인이 있는 전각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장문인! 제 말을 믿어 주셔야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느냐! 연유나 좀 알려 주고 믿으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어디로 듣고 또 그 소리이십니까?”
“너의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이들은 무당의 장문인 현허진인(玄虛眞人)과 그의 사제인 무당검수의 수장 현진이었다.
현진은 천룡과 헤어진 후에 서둘러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무당으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장문인이 기거하는 이곳으로 달려와 지금 이렇게 간청을 하고 있었다.
“허무맹랑하다니요! 저는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본 그곳에 삼황이 계시고, 칠왕십제 중에 세 명이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화룡지체가 있었다?”
“네!”
“거기다가 그 모든 사람이 쩔쩔매는 고수가 또 따로 있고?”
“그렇다니까요!”
“허허허.”
빡-!
“컥!”
“이놈이! 하라는 임무는 하지 않고 농만 배워왔느냐!”
“사형!”
“이놈이 그래도?”
다시 한번 손을 들어 때리려고 시늉하는 장문인이었다.
“아, 진짜 저 진지하다고요!”
“하아.”
그런 현진을 보며 이마를 짚는 장문인이었다.
‘재능으로 따지면 무당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놈이건만……. 아직 어려서 그런지 진지함이 없는 것이 큰 흠이야. 막내라 오냐오냐 했더니 이놈의 장난기를 어이할꼬. 원신천존이시여.’
“그래. 이 사형을 믿게 할 증거는? 있느냐?”
“네?”
“이놈아!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고 왔으면 그것을 믿게 할 증거가 있어야 할 게 아니더냐.”
현진이야말로 답답했다.
증거를 어찌 가져온단 말인가?
맘 같아선 자신의 머릿속을 보여 주고 싶었다.
“우리 애들이 모두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경험 말고 증거.”
그놈의 증거.
미칠 노릇이었다.
답답한 가슴을 치고 있을 때 밖에서 누군가가 현진을 찾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리에 현진이 문을 열고 나가 물었다.
“나를?”
“네! 현진 사숙께서 초대하셨다고.”
“내가? 아니…… 나는 누구를 초대한 적이 없는데?”
그 말에 뒤에서 장문인이 버럭버럭했다.
“이놈이 이제 하다 하다 무당에, 친구까지 초대하였느냐? 여기가 네놈 친목 도모하는 곳이더냐?”
“아, 아닌데요. 저 정말로 누굴 초대한 적이 없…….”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사색이 된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헉! 마, 맙소사!”
얼굴 전체에 식은땀이 순식간에 방울방울 맺히는 현진이었다.
그 모습이 심상치 않은 것처럼 보이자 장문인이 다급하게 뛰어와 상태를 살폈다.
“왜, 왜 그러는 것이냐? 어디 아픈 게냐? 어이쿠, 이 식은땀 좀 봐.”
그러면서 현진의 얼굴의 땀들을 자신의 소매로 닦아 주는 장문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진은 바들바들 떨며 장문인에게 간신히 말했다.
“자, 장문인…….”
“오냐. 왜 그러느냐? 이 사형이 너무 몰아붙여서 그러느냐?”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장문인이었다.
“장문 사형…… 저, 저 어떡합니까? 크, 큰 사고를 친 것 같습니다…….”
“뭐? 무슨 사고? 강호에서 사고를 쳤느냐?”
“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사고? 큰 사고더냐? 그래서 저들이 널 찾아온 것이고?”
장문인의 말에 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단 가 보자꾸나. 만나서 해결을 해야지.”
“사, 사형. 아, 안 됩니다. 제, 제가 가겠습니다. 사형, 아니 장문인은 여기 계십시오.”
그러더니 미친 듯이 뛰어가는 현진이었다.
“아니, 쟤가 오늘따라 왜 저러는 것이냐?”
혀를 차며 말을 전달하러 온 사질에게 물었다.
“저놈이 저리 놀랄 만한 인물이더냐?”
“아닙니다. 장문인. 이번 신룡지회를 참관하러 각 문파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현진 사숙께서 친히 초대하신 모양입니다.”
“쯧쯧쯧. 그럼 그렇지. 저놈이 날 놀린 게로군. 저놈의 장난기는 언제쯤 고칠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장문인이었다.
한편 문 내에서는 절대 경공을 쓰면 안 된다는 규율까지 어겨 가며 다급하게 문 앞으로 달려온 현진이었다.
도착을 해 보니 자신의 지기들이었다.
숨까지 헐떡거리며 달려온 현진을 보며 친구들은 감동하고 있었다.
“하하하! 이보게, 현진! 우리가 그리도 반가운 것인가?”
“저 땀 좀 보게나. 이것 참! 하하하.”
“이렇게 반겨 주니 멀리까지 온 보람이 있구먼그래. 하하하.”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었지만, 딱히 정정해 줄 마음은 없었다.
‘다, 다행이다. 정말로 친구들이었구나.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친구들에게 환한 미소를 보이는 현진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이렇게 와 줘서 고맙네.”
“하하하, 이 친구. 못 본 사이에 접대 실력이 늘었구먼그래? 하하하.”
“그러게 말일세. 뭘 해도 절대 뛰지 않던 사람이 땀까지 흘리며 달려오고 말이야.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 한 것이면 성공일세.”
그러면서 현진의 등을 팡팡 두들기는 친구들이었다.
현진의 속마음도 모른 채 즐거워하는 그들이었다.
‘그나저나 그분들을 깜박하고 있었구나. 정말로 찾아오시면 어쩌지?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질렀구나.’
웃는 겉과 다르게 속은 썩어들어 가는 현진이었다.
***
더 있다가 가라고 만류하는 빙궁주를 달래고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온 천룡 일행이었다.
그리고 운가장에 들어서서 또 한 명을 달래고 있었다.
“저, 정말 갑니까?”
“응. 이제 애들 데리고 집에 가.”
“너무하십니다.”
“어? 뭐, 뭐가?”
“절 그렇게 보내고 싶어 하실 줄은…….”
울먹이는 당 가주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하시는 말씀이 그거 아닙니까? 빨리 가라고.”
“아니…….”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저는 그래도 장주님과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 얘는 또 왜 이래…….’ 제자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게요. 왠지…… 조천생이 보이는 건 착각일까요?
무광의 말에 소름이 돋는 천룡이었다.
-아닐 거야. 일단 달래서 보내자.
“하하, 무슨 소리야. 우리 가까워진 거 맞지. 네가 반성도 잘했고, 또 날 잘 따라 줘서 고맙기도 하고 말이지. 언제든지 부담 없이 내 집이라 생각하고 놀러 와도 돼.”
“저, 정말입니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천룡을 바라보는 당벽이었다.
“으, 응. 그, 그렇지.”
“하하,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 당가는 이제 운가장의 혈맹입니다. 운가장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꼭 불러 주십시오.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오겠습니다!”
천룡의 말에 기분이 풀렸는지 웃으며 말하는 당벽이었다.
“자, 자. 이러다가 또 하루 지나겠다. 어서 가서 집안일도 보고 그래야지.”
“알겠습니다. 장주님께서 그리하라 하시니 가겠습니다. 조만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응. 그래그래.”
그런 당벽을 보며 당문의 무사들은 경악하고 있었다.
저들은 당벽이 북해를 다녀오는 내내 운가장에 머물러 있었다.
언젠가는 집에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 믿음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
천룡이 돌아오자마자 당가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한 후에 집에 가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정작 가문의 가주가 울먹이며 천룡에게 서운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인물.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물.
가문을 위해서라면 직계가족도 버릴 수 있는 인물.
바로 그가 현 당 가주인 당벽이었다.
그런 당 가주가 천룡에게 저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당문의 사람들이 놀란 것이다.
특히나 천룡을 대하는 것이 주군이라고만 안 했지 거의 주종관계나 다름이 없었다.
‘정말 우리 가주가 맞는가? 다른 사람 아냐?’
‘뭐지? 저 풍부한 감정은? 가주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북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벽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사막에서 자신을 보살펴 준 것과 적임에도 불구하고 영단을 먹인 것에 크게 감명을 받은 당벽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날을 되새겨 보며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았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점차 성격이 변해 가고 있던 때에 천룡의 어마어마한 신위를 본 것이다.
당벽은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천룡이 하늘로 솟구쳐서 구름을 부르고 번개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당벽은 전율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천룡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무림맹이고 나발이고 천룡 앞에선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해탈한 것이다.
거기에 저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도 겸손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무엇보다 천룡과 제자들, 그리고 수하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에 감화되었다.
저런 절대자도 저리 지내는데 자신이 뭐라고 그동안 그토록 권위적으로 보냈는지 후회했다.
그리고 운가장으로 오는 동안에 열렬한 천룡의 추종자가 되었다.
당벽은 떠나는 와중에서 수십 번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당벽이 사라지자 그제야 한숨을 쉬며 입을 여는 천룡이었다.
“하아, 힘들다. 힘들어. 다들 왜 저렇게 변하는 거지?”
제자들은 미소 지었다.
자신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을 감화시키고 끌어들이는 하늘이 내린 인덕을 말이다.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
운가장 장주의 서재.
천룡과 제자들이 제갈군을 만나고 있었다.
제갈군은 우선(羽扇)을 들고 있었다.
천룡이 물었다.
“그러니까 군사 면접을 보러 왔다?”
“그렇지요.”
“그리고 너는 제갈세가에서 왔고?”
“머리하면 저희 가문 아닙니까? 그중에서 저는 최고 중에서 최고죠.”
“…….”
“무슨 문제라도?”
“너 무림맹에 있는 제갈현이 보내서 온 거 아냐?”
“맞습니다.”
“우리 감시하라고?”
“뭐 겸사겸사?”
특이했다.
특이해도 너무 특이했다.
천재들은 사고방식이 다르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나 보다.
“그걸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
“하하, 어차피 지내다 보면 알려질 거 미리 말해 주고 당당하게 군사로 들어가겠다는 거죠.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뜻입니다.”
“상부상조?”
“네. 저는 숙부님의 부탁을 들어줘서 좋고, 운가장은 머리 쓰는 사람을 얻으니 좋고. 서로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머리가 아파져 왔다.
어째 주변에 멀쩡한 놈이 없었다.
이쯤 되면 자신에게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애들만 꼬일 리가 없었다.
머리를 짚고 있는 천룡을 대신해서 무광이 물었다.
“네 주특기는 뭔데?”
“하하, 이거 제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됩니다. 진법이면 진법, 상식이면 상식.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습니다. 제갈세가에서 나온 천재 중의 천재거든요. 공명 선조님의 환생이라고들 하더군요. 하하하. 그리고 저는 무공도 강합니다.”
자화자찬도 심하다.
아무래도 제갈세가에서 작정을 하고 폭탄을 던진 것 같았다.
-이거 이쯤 되면 제갈세가에서 선전포고 한 거 아닙니까? 어디서 저런 생 미친놈을…….
무광의 전음에 천룡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신선한 공격이었다.
-그게 아니라 지들 감당 안 되는 미친놈을 우리 쪽에 넘긴 것 같은데요?
-저거 어쩌죠?
천룡은 일단 시험이라도 보자고 했다.
그 말에 무광이 사악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크크크. 저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응? 무슨 생각?
-일단 저놈의 높은 콧대를 먼저 꺾어 놓아야 대화가 편하겠죠?
-그렇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