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누구보다 정성을 들여 무림맹을 키워 왔을 것인데, 조카의 입에서 그것을 부정당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에 이끌려 입에 발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하아, 숙부님. 현실을 모르셔서 그러는 겁니다.”
“무슨 현실 말이냐!”
제갈군은 제갈현에게서 눈을 뗀 후 주위를 둘러봤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제갈군과 제갈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제갈군이 헛기침을 한 번 한 후에 입을 열었다.
“혈천교에는 오마신대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다섯 개의 대대로 이루어진 조직이죠. 그 한 대대가 삼황급 무인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주역들 역시 아직 살아 있으며, 그곳의 군사는 두뇌뿐 아니라 무공도 강합니다.”
“너는 그것을 어찌하는 것이냐!”
“직접 상대를 했으니까요. 저희 장원에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뭐라고? 그것을 어찌 알리지 않은 것이냐!”
제갈군이 호통을 치자, 제갈현이 두 손을 들며 으쓱거렸다.
“숙부님, 저는 무림맹 사람이 아니거든요. 운가장 사람이지.”
제갈군의 말에 제갈현이 뒤쪽에 앉아 있는 천룡에게 시선을 돌렸다.
앉아는 있지만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있기 싫은데 억지로 있는 느낌.
그 옆에서 무황, 검황, 사황이 눈을 부리부리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제갈군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오판으로 인해 가문의 보물을 다른 이에게 넘겨준 꼴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교주! 그의 이름은 은마성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혈천교에서 가장 강하겠지요. 이런 이들을 상대하신다고요? 그 전에 이 내용을 아셨던 분이 단 한 분이라도 계셨습니까?”
제갈군의 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럼 이곳에 계신 분 중에 저기에 앉아 계신 삼황을 상대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다들 고개를 숙이며 삼황의 시선을 회피하기 바빴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비무라도 하자고 덤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 무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군의 옆으로 걸어가 섰다.
그리고 좌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쯧쯧, 한심한 것들. 다들 욕심에 눈이 멀어서 제 앞도 못 보는 것들이 잘도 혈천교를 이기겠구나. 정신들 차려라. 너희들로는 안 된다.”
무광의 말에 무림맹주 팽강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형님! 말이 지나치십니다!”
팽강의 말에 무광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지나치다고? 하하, 좋아. 내 기세를 버티는 놈이 한 놈이라도 나온다면 내가 사과하지.”
“무, 무슨? 크, 크윽!”
팽강이 무슨 소리냐고 다시 따져 물으려 할 때, 무광의 몸에서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뿜어졌다.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죽어 갔다.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지만, 그 누구도 무광의 기세를 견뎌 내지 못했다.
“그, 그만하십시오!”
“제, 제발, 그만…….”
팽강 역시 무릎을 꿇은 채 고통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혀, 형님…… 소, 소제가 자, 잘못…….”
팽강의 입에서 잘못이라는 말이 나오자 사람들을 짓누르던 기운이 사라졌다.
“커헉! 헉, 헉!”
“하악! 하악!”
저마다 참았던 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숨을 고르는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였다.
경악.
삼황이라 해도 인간인데, 차이가 나 봐야 얼마나 나겠냐고 생각을 한 사람들.
이제 확실하게 알았다.
황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을.
무황이라는 존재감을 말이다.
그런 무황이 경고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안 된다고.
단 한 명의 기세에 무림맹의 모든 이들이 인정한 것이다.
그런 무공을 지닌 사람이 아직 둘이나 더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검황과 사황을 향했다.
검황은 그저 미소 짓고 있었고, 사황은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운에 앉아 있는 천룡.
그곳의 모든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무광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왜, 궁금하냐? 누구신지?”
무광의 말에 재빨리 눈을 돌리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나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하신 분이다. 귀를 활짝 열고 들어라. 에헴! 저분에 대해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제부터 장황하게 찬양을 시작하려는데 천룡이 나서서 말렸다.
경험상 저렇게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낯 뜨거운 말을 내뱉겠다는 소리였다.
천룡이 다급하게 말렸다.
“그, 그만. 하지 마라.”
“네, 왜요?”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에이, 아버지도 참. 얘들도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죠.”
무광의 입에서 나온 단어.
아. 버. 지.
다들 이게 무슨 뜻인지 해석하기 위해 동공이 바쁘게 움직였다.
“진심이다. 하지 마라.”
천룡의 악다문 입 사이로 말이 흘러나왔다.
무광이 시무룩해지려고 할 때 지원군들이 나타났다.
“사부! 왜 하지 말라고 하세요! 저들도 알아야 앞으로 알아서 고개를 숙이죠!”
“맞습니다! 사부님! 이제 세상에 사부님의 위대함을 알려야 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대사형이 사부님에 대해 저들에게 말하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들 말이 맞습니다! 이제 운가장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니 아버지에 대한 명성도 널리 알려져야죠!”
천명과 태성까지 가세하자 무광 역시 덩달아 기세가 올랐다.
사. 부. 님.
또 이해가 안 되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무당 장문인과 당가의 가주가 미소를 지으며 감상하고 있었다.
‘저 심정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크크큭.’
‘저 표정들 봐라. 침 흘리겠네. 흐흐흐. 재밌다. 재밌어!’
“주군!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제갈군이 손을 들었다.
눈빛으로 제자들을 말리던 천룡은 제갈군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그래도 군사고 머리도 뛰어나니 자신의 제자들보단 낫겠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이 말하는 것보다 낫겠지.’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하하하, 우리 주군께서는 말입니다…… 신(神)이십니다! 신! 신 아시죠? 무신! 천신! 하하하하!”
무광보다 더했다.
신나서 떠들어 대는 제갈군.
“저희 주군께선 하늘의 신보다 위대하시고, 대자대비한 부처님보다 자비로우시며…….”
후회가 됐다.
요즘 진중한 모습만 봐서 잠시 착각했다.
원래 저런 놈이었는데.
옆을 보니 천명과 태성이 손뼉까지 치며 잘한다고 외치며 경청하고 있었다.
무광은 연신 그렇지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다는 말이 새삼 이해되는 천룡이었다.
자신이 허락했으니 말리지도 못하겠고,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저 낯 뜨거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천룡에게 있어서 지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제갈군의 입에서 찬양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랬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주군의 위대함을?”
이제는 거의 강압적으로 주입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끝나 가고 있으니 한숨을 돌렸다.
기나긴 굴욕과 치욕의 순간이 지나갔다.
천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다.
“자! 그럼 이제 주군께서 마교에서 활약하신 활약상을 들려 드리지요.”
방심했다.
이런 천룡의 반응과 달리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연신 놀라워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는 저 이야기의 관객이 되어 경청하고 있었다.
호응까지 하면서 말이다.
“오오! 그것이 정말이오?”
“세상에 정녕 대단하시군요!”
과연 머리로는 상대가 없다는 제갈가에서도 인정한 천재였다.
그런 천재가 작심하고 찬양하고 있었다.
그에게 새로운 별호를 달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설전황!
말로 사람들을 후리고 있으니 말이다.
“마교! 마교도 세상에 나왔었단 말이오?”
“하하하, 놀라셨죠? 저도 그 얘길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정녕 대단하신 분이군요!”
“그러니 삼황을 키워 내셨겠지요.”
“하하하, 저분이 계셨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댔으니……. 정말로 창피합니다.”
“부끄럽습니다. 하아, 거지 놈이 꼬드길 때 말렸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저분을 믿고 저희는 중원 내부의 치안 단속이나 맡는 게 어떻겠습니까?”
“옳습니다! 그렇게 합니다!”
“나도 찬성이오! 우리가 가 봐야 방해만 되지 그러니 우리는 중원에 남아 후방을 지원합시다.”
오랜 시간 동안 제갈군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미 천룡의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제갈군은 천룡을 보며 잘하지 않았느냐, 어서 칭찬해 달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를 짚는 천룡이었다.
어찌 됐든 간에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평화적으로 말이다.
***
혈천교 군사 방염이 다급하게 교주를 찾았다.
“교, 교주님! 비, 비상입니다!”
군사는 당연히 교주가 누워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수련하고 있었다.
“교, 교주님? 맞습니까?”
긴급한 상황도 잊은 채 놀라서 묻는 군사였다.
그 말에 교주 은마성의 이마에서 혈관이 솟았다.
“지금 그 말 엄청나게 기분이 나쁜데?”
“죄, 죄송합니다. 소신이 너무 놀라서…….”
“그게 더 기분 나쁜데? 요즘 젊어졌다고 아주 힘이 남아도나 봐? 나에게 이렇게 시비를 다 걸고?”
그러면서 천천히 군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교주였다.
거대한 마기를 풀풀 풍기면서.
“헉! 그, 그게 아니옵고!”
“응. 그렇지. 그래. 일단 좀 맞고 시작할까?”
교주가 주먹을 들어 올리려 할 때, 군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주, 중원에서 이곳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곳을 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군사의 말에 교주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이곳이 중원인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저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먼저 치심이 어떤지요. 모든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교주가 분노하며 당장 쳐들어가자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은마성의 반응은 달랐다.
심하게 떨리는 동공과 함께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아, 안 돼. 그, 그냥 저들이 오게 두어라. 여기서 처리하자.”
“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재차 확인하는 군사였다.
“중원은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 오게 두어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 된다고 하셨다니? 교주님 뒤에 다른 분이 계십니까?”
그동안 심증은 가지만 확실하지 않았기에 속으로만 끙끙거렸던 궁금증.
지금이 기회였다.
군사의 질문에 교주가 당황했다.
“교주님! 중요한 문제입니다!”
군사가 압박을 해 왔다.
결국, 한숨을 쉬며 입을 여는 교주였다.
“하아…… 그래……. 이제 알 때도 되었지. 말해 주겠다.”
교주의 말에 군사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혈천교는 위대하신 분께서 다스리는 조직 중 하나일 뿐이다.”
“네? 그, 그게 무, 무슨 말입니까?”
군사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경악했다.
무림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었고, 지금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곳이 바로 이곳 혈천교였다.
그런데 그런 혈천교가 일개 조직 중 하나였다니.
“나 역시 그분의 수하일 뿐. 그분께서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다.”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 그렇다면 중원 침공을 멈추신 것도.”
군사의 말에 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분께서 보류하라 하셨다. 나는 거역할 수 없었지. 그분께서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으니…. 그러니 중원으로 갈 수 없다.”
교주가 두려운 눈빛을 보이며 완강하게 대답했다.
군사는 교주의 눈빛을 보고 전에 교주가 보였던 두려움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때였구나. 그분이라는 사람을 만나러 간 것이.’
“그럼…… 저희 말고도 다른 조직이 있단 말씀입니까?”
군사의 말에 교주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 우리 말고도 다른 조직이 있다.”
충격이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비밀 세력들이 있다니.
“무엇인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 왜냐고? 내가 제일 약하기 때문이지……. 서열상으로도 제일 아래고. 하나, 그건 알지. 그자들이 나서면 중원 따위는 순식간에 그분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을.”
교주의 말에 군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천마대제의 힘을 얻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교주를 제외하고는 자신을 상대할 자가 세상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망한 꿈이었다.
교주보다 강한 자들이 있단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자들은 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까? 그런 힘을 가지고도 말입니다.”
군사가 억울한 듯이 외치자, 교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니까. 세상의 주인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세상의 주인이라고 한다.
“그분은 나의 주군이며, 세상 모든 악의 정점이시다.”
군사의 동공이 떨려 왔다.
교주의 입에서 주군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분은 마의 정점! 진정한 마황(魔皇)이시다!”
은마성의 입에서 나온 말에 군사는 아찔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일단 알았다. 어찌 되었든 대응은 해야 하니……. 그분에게 다녀오겠다.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지.”
은마성은 그리 말하고 섬광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은마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허망한 눈빛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는 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