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00)

190화

천룡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각 하나를 치우기 시작했다.

청소를 하고 먼지를 제거하고 부산을 떨었다.

태성은 먹을 것을 잡아 오겠다며 나갔다.

그런 제자들을 잠시 바라보며 웃다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선유동을 걷기 시작했다.

왜 이곳에서 자신이 깨어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걷다 보니 자신이 처음 눈을 뜬 장소에 도착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사방에 넝쿨들이 얼기설기 엉켜 그 장소를 가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 눈을 뜬 후로 이곳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 곳인데…… 이제야 와 보다니.”

생각해 보니 이곳을 자세히 살펴본 적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넝쿨 사이로 문 비슷한 것이 보였다.

“어? 이곳에 문이 있었나?”

천룡은 넝쿨들을 뜯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제 일반인이 된 천룡의 힘으로 역부족이었다.

뜯어내기엔 넝쿨들의 굵기가 너무도 굵고 양이 많았다.

결국, 천명을 불러 도움을 청했다.

“이것들을 전부 잘라 버리면 되는 거죠?”

“그래. 이 뒤에 문이 있는 것 같은데 그곳에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

천룡의 말에 천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몇 번 휘둘렀다.

파파팍-!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사람 몸통만 한 굵기의 넝쿨들이 두부 잘리듯이 잘려 나갔다.

천명은 천룡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잔해들을 모두 날려 버렸다.

“사부님! 다 되었습니다.”

정말로 그곳에 돌문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문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다.

천명이 조심스럽게 돌문을 열었다.

안에서 오랫동안 묵혀 있던 먼지가 뿜어 나왔다.

천명이 재빨리 천룡의 주변으로 기막을 펼쳐 그 안에서 뿜어 나오는 먼지로부터 보호했다.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천명을 한 번 바라보고는 천룡은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공간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천룡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수북이 쌓여 있던 먼지가 쏟아져 내렸지만, 천룡은 무시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양피지로 만들어진 서신이 하나 들어 있었다.

천룡은 조심스럽게 그 양피지를 펼쳤다.

안의 내용을 본 천룡의 동공은 세차게 흔들렸다.

천명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천룡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잠시 혼자 있고 싶다 말했다.

천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광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천룡은 조용히 심호흡하고는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서신은 바로 자신의 사부가 남긴 것이었다.

사부는 오래전에 이미 이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내 새끼 천룡은 보아라. 사부다. 잘 지냈느냐? 천룡아, 이 글을 네가 읽고 있다면 무사하다는 소리겠구나. 어찌 이 사부가 이런 서신을 남겼는지 궁금하더냐?

천룡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궁금하겠지. 먼저 이곳에 대해 말을 해 주어야겠지. 사실 이곳 선유동은 우리 영웅문이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진정한 영웅문의 본파란다. 또한, 세상에 위기가 닥치고 그 위기로 인해 당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세상에 있는 필요한 물품과 진귀한 물품들을 모아 둔 곳이다.

선유동을 만든 이의 정체가 밝혀지고 있었다.

-이제 너도 알아야겠지. 우리 영웅문의 존재 이유를……. 사실 영웅문의 존재 이유는 바로 너다.

‘나라고? 이게 무슨 소리지?’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영웅문의 존재 이유가 자신이라니.

천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신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왜? 놀랐느냐? 하긴 놀란 만도 하겠지. 사실 너의 정체는 하늘의 신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석천(帝釋天)의 환생이지. 제석천이 지상에 환생하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세상의 정화(淨火). 말이 정화지 사실 세상의 인간 대부분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지. 그런 재앙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해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 영웅문이다.

충격이었다.

자신이 세상의 멸망을 불러오는 존재였다니.

그렇다면 오행체가 세상에 나온 이유는 마진강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하고 자신의 주변으로 몰려온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니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내, 내가 세상을 멸하는 존재였다고? 내가?”

서신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까지 자신은 중원을 보호하기 위해 살아왔고 오행체와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이유가 마진강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함이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천룡은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신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래도 너무 놀라지 말거라. 네놈이 이곳에서 서신을 읽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 무언가가 시작되지 않았거나 소멸했다는 소리일 테니. 너에게 내가 조치를 해 두었었다. 죽음의 위기에 빠지거나, 아니면 신병(神病)이 내려오거나 했을 때 이곳으로 소환되도록 술법을 걸어 놓았었지.

자신이 왜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사부가 이곳으로 오게끔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병이라니?

그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네놈을 죽음의 위기에 빠뜨릴 인간은 세상에 없을 것이고, 여기에 왔다는 소리는 신병이 발병했다는 소리겠지. 그것은 바로 제석천의 힘이 네 몸을 차지하기 위해 접신(接神)을 시작했다는 소리다. 아마도 고통스럽겠지. 그 고통은 죽음에 가까울 정도였을 것이다. 이곳에 왔다는 소리는 그 힘이 발동했다는 소리겠지. 그래도 이 서신을 읽고 있다면 정신은 온전하다는 소릴 테니 희망을 걸어 본다. 부디 읽을 수 있기를. 혹시라도 이겨 내지 못해서 접신이 되었을 경우, 네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곳에 온갖 결계를 펼쳐 놓았다.

처음에 이곳에서 눈을 뜨고 오랜 시간 동안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또한,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이 바로 저것이었다.

신이 내리는 과정에서 오는 과부하가 몸에 지장을 준 것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으니 알 수 없는 불치병이라 생각을 한 것이다.

자신의 힘을 모조리 회수해 간 것도 바로 그 제석천의 힘일 것이다.

-제자야, 우연히 너를 만났을 때는 정말로 놀랐었다. 많은 고민도 했지. 그때는 네가 아직 힘을 각성하지 않았을 때니까. 하지만 어린 네 눈을 보며 나는 차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널 키우기로 한 것이지. 부디 내 선택이 옳은 길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제자야, 너는 내 하나뿐인 제자이자 자식이다. 제석천이고 나발이고 너는 너다. 그러니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주변을 둘러보거라. 그리고 느끼거라. 세상은 매우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이겨 내거라. 나는 너를 믿는다. 내 새끼에게 이렇게 큰 고난을 주게 해서 미안하구나. 부디 모든 원망은 이 사부에게 돌리고 세상을 지켜 주려무나.

“사부님…….”

그랬다.

자신의 사부는 자신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고 사랑으로 키워 온 것이다.

눈물이 흘렀다.

서신에서 느껴졌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부의 진심이 말이다.

‘나는 나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사랑하는 제자들.’

조용히 떠올렸다.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수많은 사람과 풍경이 천룡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천룡의 심상 속에 자리하던 힘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정신 차려라. 너의 목적을 상기해라. 인간은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신하는 종족이란 말이다! 그들을 청소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깨끗해진다.

끊임없이 외치는 마음속 자아.

-죽여라! 세상의 모든 것을 멸해라! 그들은 세상을 좀 먹는 역병 같은 존재다. 그것을 치우는 것이 네가 태어난 이유다! 네가 죽이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를 죽이고 죽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더러운 것을 보지 말고 모조리 치워라. 세상에서 지워라.

끊임없이 천룡에게 말을 걸어오는 자아를 무시하면서 천룡은 생각했다.

‘저것 또한 나의 몸의 일부다. 받아들이자. 포용하자. 나는 나다.’

천룡의 마음이 또 다른 자아를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몰아일체(沒我一體).

따뜻함으로 무장한 힘이 자신을 향해 오자 격렬하게 저항하는 또 다른 자아.

-그, 그만! 히, 힘을 다시 돌려주겠다. 그만둬라!

천룡은 그런 자아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더 깊은 심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 돼! 저리 가! 이,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어! 으아악!

또 다른 자아, 제석천의 힘이 천룡의 몸으로 점차 잠식되어 가기 시작했다.

점점 더 빠르게.

그와 동시에 천룡의 몸에서 서서히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대부분을 잠식당한 또 다른 자아가 한탄을 하며 소멸했다.

-거의 다 되었었는데……. 그, 그때 그 마진강이란 놈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부, 분하다…….

고오오오-!

또 다른 자아가 사라지자 천룡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사방에 엄청난 기운들이 천룡의 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아-!

이윽고 그 힘들은 거대한 폭풍이 되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천룡의 몸이 공중으로 높이 떠오르고,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기운들이 사방으로 뿌려지기 시작했다.

쿠콰콰쾅-!

선유동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이에 놀란 제자들이 달려 들어왔다.

“저, 저게 뭐야! 아버지께서 힘을 되찾으신 건가?”

“사부님의 기운이 엄청납니다!”

“사부가 저리 강했다고요? 이건 전보다 더 엄청난데요? 마,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새로운 경지로 들어서신 것 같다!”

“일단 피하죠! 자칫 저기에 휘말렸다간 저희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천명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그곳에서 거리를 벌리기 위해 밖으로 떠났다.

제자들이 밖으로 나간 것도 모른 채 끊임없이 기운을 받아들이는 천룡.

순간 천룡의 심상에 거대한 세상이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평지.

그곳에 한 명이 뒷짐을 진 채로 서 있었다.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환한 미소로 천룡을 맞이했다.

“오랜만이구나.”

천룡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넓은 평지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사부였다.

“사, 사부님?”

“오냐! 녀석.”

“사, 사부님! 사부님!”

천룡은 재빨리 달려가 사부의 품에 안겼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리워했던가.

이 따뜻한 품이 너무도 그리웠었다.

“녀석이. 나이를 그리 먹고도 어리광을 부린단 말이냐.”

“흑흑흑! 사부님! 보고 싶었었습니다! 너무…… 너무너무 뵙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품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천룡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보이는 사부였다.

“고맙구나. 이 사부의 믿음에 응해 주어서.”

사부의 말에 천룡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사부님! 오히려 제가 사부님께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부님! 모자란 제자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흑흑!”

천룡이 눈물로 사부의 품을 적시고 있었다.

두 사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천룡이 몸에서 떨어졌다.

“녀석, 이제 좀 진정이 되었느냐?”

사부의 말에 천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인자한 모습의 사부였다.

“길게는 말을 못 하느니라. 우리 제자가 대견해서 내 잠시 너에게 온 것이다.”

“사부님…….”

“너의 힘이 제대로 각성하였으니 이제 하늘에서도 널 쉽게 대하지 못한다. 널 구속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된 것이다. 천룡아, 부디 그 힘을 항상 올바른 곳에 써 주려무나. 이 사부와 약속할 수 있겠느냐?”

사부의 말에 천룡은 끊임없이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사부님! 저의 제자들에게도 항시 그리 말해 주고 있는 걸요.”

“허허허허! 내 새끼가 다 커서 제자도 들이고. 허허허. 좋구나! 정말 좋아! 허허허허!”

세상 행복한 모습으로 연신 웃더니 서서히 몸이 희미해지는 사부였다.

“이런.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구나. 천룡아, 내 하나뿐인 자식을 간만에 봐서 좋았다. 이제 정말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구나. 부디 이 사부의 마지막 소원을 꼭 지켜 주거라.”

“사부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세요! 사부님! 제자 뭐든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희미해진 손이 다시 천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구나. 이제 너도 너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야지. 이제 정말 갈 시간이다. 잘 있거라.”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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