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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화 〉7장 - 가스라이팅(3) (38/182)



〈 38화 〉7장 - 가스라이팅(3)
혹시나 해서  안도 둘러봤지만, 별것 없는 창고였다.
아마 문틈 사이로 일기장 종이가 들어갔을 뿐, 별다른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후우...."

고생하고 고생해서 닿은 결말이 이거라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허탈한 것은 이제까지 워낙 과몰입 했던 탓도 있겠지.
방에서 나오자, 다시 시간이 가속하더니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트루엔딩 분기점에 도달했습니다. 자율행동 시스템이 시작됩니다.]

"자율행동 시스템은 또 뭐야. 놀이공원 때처럼, 또 뭔가 특별한 시스템이...."
"얀별아.... 후, 역시 와 있긴 했구나."

갑자기 나를 붙잡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내 뒤에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주혁이가 있었다.
슬쩍 휴대폰을 확인하니, 지금은 2월 14일 당일이었다.

"설마, 안 들어갈 거냐?"
"뭐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무슨 소리냐니.... 안에서 소연이가 기다리고 있어. 마음은 이해하지만, 슬슬 들어가야지."

뭔가 이상했다.
방금 말을 뱉은  컷씬이 아니라 나인데, 어떻게 그 말에 주혁이가 대답을 하지?

"아?"

그러다가 방금 나타났던 메시지가 생각났다.
설마자율행동 시스템이라는 게 이걸 말하는 거야?
등장인물이 사람처럼 움직인다고?

??
 게임 갈고리 수집 잘하네
- 순간 컷씬인 줄 알았네
- 뭐야 AI야?
- 엥??
- 뭐야 캐릭터가 AI로?
- 이런 시스템이라고?

상대가 내 말에 반응한다고 생각했더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물론, 조금 전에 알게 된 소연이가 무조건 죽는다는 사실도 원인  하나였다.

"무서워, 무섭다고."

그래서 솔직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곧 소연이는 죽는다.
이건 이미 여러 번 경험한 것이고, 정해져 있는 결말이기도 했다.
이게 트루엔딩이라면, 이제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소연이랑 만나는  무서워."

심지어 이제는 컷씬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이는 소연이가 내 눈앞에서 죽는다는 뜻이 되겠네.
진짜 지랄맞은 게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야 해. 너, 소연이랑 약속했다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결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지금이라도 시간을 되돌리면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혹시 이런 엔딩 말고 다른 엔딩이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마."

내가 휴대폰을 켜려는데, 주혁이가 내 손목을 잡으면서 막아섰다.

"놔, 놓으라고! 이럴 바엔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나았...!"

 순간 찌릿한 감각과 함께 내 고개가 휙 돌아갔다.
얼얼한 느낌이 뺨에서 올라온다.

- 주혁이 선넘네
- 저새끼가?
- 교주님은 우리만 때릴 수 있다고
- 아 얘들아 조용히 해봐
- 왜캐 진지함
- 과몰입ㄷㄷ

"누군 인정하고 싶은  알아? 알고 싶었는줄 아냐고!"

주혁이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소연이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었을 리가 없다.

"너는 몰라.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지. 소연이가 죽는 것을 몇 번이나 봤는지! 소연이가 죽는  보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이건 AI인 주혁이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이런 스토리를 강요하는 개발진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대체 왜 이런 스토리를 강요하는 거야.

"그럼 소연이는?"

주혁이는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시야가 흔들리면서도 뭐라 반격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질문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내가 진지하게 고민했을 리가 없다. 소연이는 데이터 쪼가리니까.
그저 내가 게임에 과몰입하면서 나 본인의 감정만 생각했을 뿐이지.
소연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 리가 없다.

"소연이는 어땠겠냐고."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려했어야 했다.
그녀가 느낄 무서움을, 그리고 무력함을 이해했어야 했다.
제대로 과몰입할 생각이었다면, 나는 소연이의 감정까지 고려했어야 했다.

"소연이가 가장 힘들었을 거야. 우리가 아무리 이 난리를 떨어도, 그런 우리보다 이 비밀을 안고 있던 소연이가 더 힘들었을 거라고."
"그래서 내가 뭘 어쩌라는 건데.... 소연이는 구할 수 없어. 그렇다고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울분을 담은 나의 말에 주혁이가 담담하게 받아쳤다.

"들어가. 소연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나는 해줄  없는 게, 너에게는 있잖아. 그렇다면 그걸 소연이한테 줘. 그건 너만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만, 할  있는 거라고?"

아연씨가 죽어도, 아연씨가 나에게 방송을 해달라고  부탁이 남았던 적이 있다.
그건 분명 나만 할 수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주혁이가 말하는 것은 비슷한 것이겠지.
소연이가 죽더라도, 나만이 그런 그녀에게 해줄  있는 것이 있다.
게임에서도 나한테 비슷한 소리를 하는구나.

"하하...."

나는 이상하게도 그 말에 설득당해서 몸이 움직였다.
소연이만 괜찮다면, 이런 엔딩을 인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이지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들어가 봐, 그 바보가 원하는 건 너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관을 하는 것에 돈  썼겠다 싶은, 꽤 크기가 있는 홀이었다.
그리고 내가 안에 들어선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트루엔딩: 라스트 발렌타인]

"망할.... 게임."

홀의끝에서 소연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를 보고 싱긋 웃은 소연이가, 피아노 건반에 손을 가져갔다.
피아노 소리가 소연이와 나만 있는 홀에서 울려 퍼진다.
주인공은 몰라도 나는 소연이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처음 본다.

"내가 처음 너를 봤을 땐, 이럴 거라 예상했을까~"

그리고 소연이가 만드는 피아노 선율 위에, 장난스러운 소연이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그 모습이 너무 반짝여서,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문 앞에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지 못했기에, 지금 고생하는 걸까~"

피아노의 한 편에는, 어제 포장했던 발렌타인 초콜릿이 놓여있었다.

"나는 이렇게 널 사랑하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나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도 그녀와의 사이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다.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니 발걸음도 빨라졌다.
지금그녀에게 닿지 못하면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정말, 사랑하는 내 마음을~"
"허억, 허억.... 소연아."

소연이의 바로 앞에 도착해서야,굳어 있던 입을 열  있었다.

"너에게 전할  있을까~"

하지만 소연이는 노래의 하이라이트를 끝낸 후에야, 피아노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피아노 한 편에 있었던 초콜릿을 집었다.

"얀별아.  서투르니까, 직설적으로말할게."
"소연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음 받아주시겠어요?"

소연이는 발렌타인 초콜릿을 나에게 내밀었다.
마치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그 모습에, 감정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도, 나도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옆에 있어줘.... 제발...."

나는 그녀의 초콜릿을 받아서 옆에 내려놓고, 그대로 그녀를 껴안았다.
이 손을 놓으면 그녀가 사라질  같아서,  꽉 껴안았다.
당연하게도,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소연이는 울고 있는 나를 보더니, 내 얼굴을 붙잡고는 그대로 키스했다.

- ㅗㅜㅑ
- 분위기는 슬픈데  말은 해야겠다ㅗㅜㅑ
개찐해
- 혀ㅁㅊ
- 체험모드 켜놓을걸
- ㄹㅇㅋㅋ
- ㅠㅠㅜㅜ

"고마워. 정말로...."

거기까지 말한 소연이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주저앉았다.

"소연아? 소연아! 정신 차려 소연아!"

그 뒤로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어찌할 줄 몰라서 고장 난 인형처럼 소연이만 불렀다.
주혁이가 신고를 했는지, 앰뷸런스가 와서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다.

"얀별아...."

누워있던 소연이가 병원에서 깨어나는 것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소연이가 아까까지는 억지로 강한 척을 했지만, 지금은 이미 그럴 힘조차 잃은 상태였다는 것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고마워. 평생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이루네? 나  이기적이지? 고백해놓고 바로 떠나버린다니."
"알면, 알면 제발 여기 있어 줘. 우리 다시 온천도 가고, 카페에서 디저트도 먹고, 놀이공원도 가고.... 같이 데이트 해야지. 응?"
"하하, 그건 재밌겠네. 정말 아쉽다. 이제야 꿈을 이뤘는데...."
"소연아. 흡, 제발 이딴 결말은 누가...."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아연씨와 소연이가 겹쳐 보였다.
상황이 마치 내가 방송을 그만두던 때와 비슷했으니까.
이게 과몰입이라는 걸 알아도, 소연이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그래도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주는 그녀와 마주하고 있으면 그녀가 죽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아리아'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으려 노력했던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헤헤, 얀별이가 내 여자친구다. 드디어 이소연 모쏠 탈출이네."
"그래, 우리 데이트하게 빨리 건강해지자. 알았지?"
"응, 그러자.... 나, 졸려 얀별아."

소연이의 눈이 감겼고, 이윽고 호흡이 끊어졌음을 알리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이것이, 우리 플레이어들에게 주는 제작진이 준비한 엔딩이었다.

"아...."

소연이는 행복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 또한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온전히 이 결말을 경험하고 나서야, 역시 이런 결말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감각은 조금씩 페이드아웃 되어 변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방금 게임이 보여준, 명백히 닫혀있는 결말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악, 악!"

이것이 고작 게임이더라도, 자꾸 과몰입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연이가 그저 데이터라고 해도, 이미 그녀가 나에게  것들이 있으니까.

- 엔딩ㅜㅜㅜ
- 소연아ㅠㅠ
- 진짜 개발진 악마같은 놈들
- ㅜㅜㅜㅠㅠㅜㅜㅠㅜㅜㅜㅜ
- 이게 트루엔딩이라고?
- 꼭 시간여행 있는 건 엔딩이ㅜㅜ
- 방장님 괜찮아요?

"...안 괜찮습니다."

나는 시야 한 편에 나와 있는 수집률을 확인했다.
81%, 아직 나는 이 게임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라면 방종할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 안 꺼요. 수집률 100%는 채워봐야겠어요."

제작진이 준비한 것이 정말 이것뿐인지 확인할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그때는 순응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 ????
- !업타임
17시간 46분
- 슬슬 방종하고 쉬셔야죠
- 교주님 좀 쉬세요
- 내일 계속합시다

나라는 인간은 만사에 대충이라서, 어지간한 것에는 순응하며 살아왔다.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연씨가 나라면 뭔가 바꿀  있을 것이라 말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겠지.

"다들 죄송합니다. 게임 계속하겠습니다."

이게 누군가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게임이더라도.
내가 노력하는 것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할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보지 않았던 선택지를 모두 확인한다.
내가 모르는 소연이의 모습을 모두 머릿속에 때려 박는다.

[수집률: 89%]

"여기서 밥을 차리지 않고, 계속 같이 자는 것도 다른 내용이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루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로 그것을 발견해낸다.

[수집률: 96%]

"역시 일기장도 열쇠가 있구나."

그리고 이제까지는 찾지 못했던 다른 단서들을 찾는다.
거기에 다른 루트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수집률: 98%]

특정 시기에만 확인 가능한 줄 알았던 일기장도 발렌타인 전날에 확인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집률: 99%]

100%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아직 100%가 아닌 이상은 희망이 있으니까.

"으, 살짝 어지럽네요. 졸린가 보다. 히히"

- 제발 자요ㅜㅜㅜ
- 지금 24시간 넘었어
- 얀별님 좀 자요....
- 뭐야 자고 일어났는데 아직도 계셔;
- 그러다 쓰러진다니까

['시련발아'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제발  주무세요

"싫어요. 이제 1프로 남았는데 여기서 어떻게 포기해."

아직 놓친  있을 텐데. 어디더라....
혹시나 해서 메모한 것이나 찍어둔 사진을 확인하다가, 연구실에 있던 열쇠 구멍이 생각났다.

"...연구실만 마지막으로 볼게요. 정말 찐막이에요."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연구실을 쥐 잡듯이 뒤졌다.
워낙 찾아보는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게임을 처음 할 때랑은 속도 자체가 달랐다.

"딱히 없네, 아, 맞다 선물. 혹시 모르니까 뜯어볼게요."

유일하게 살펴보지 못한 건, 소연이의 아버지가 준비한 생일 선물의 포장 내부였다.
의외로 여기에 열쇠가 있을지도 몰라.

"...빙고"

안에서 작은 열쇠 하나가 나왔다.
선물은 꽤 오래된 휴대폰이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최신이었겠지.

[수집률: 100%]

"드디어  찾았다."

급하게 연구동B로 달려가서 캐비넷을 엎어버리고,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었다.

"뭐야,   맞아...."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직 열쇠를 사용하지 않은 자물쇠 짝이 하나 남아 있었다.

"하, 하하.... 이게 캐비넷 열쇠라고?"

혹시나 해서 넣어봤지만, 캐비넷의 열쇠 구멍에 딱 맞았다.
그럼 대체 왜 수집률이 100%야? 이 캐비넷 아래의 열쇠 구멍은 뭔데? 장식?

"지랄마, 지랄 말라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고?
결국 그 결말뿐이라고?

"아니야...."

열쇠는 분명히 있다.
그냥 숨겨진 요소라서, 이 문과 관련된 것은 수집률에 체크가  될 뿐이겠지. 열쇠는 존재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마법?"

라스트 발렌타인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게임이다.
그건 당연하게도 플레이어에게 마력을 소지할 수 없는 제한을 걸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열쇠 형태로 빛나는 것은, 분명히 마력으로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새로운 단서: 간절함]

"...이거 설마?"

그리고 그 마법으로 만들어진 열쇠는, 바닥에 있던 열쇠 구멍에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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