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7장 - 가스라이팅(5)
"어, 수증기님? 왜 여기에...."
"기억 안 나세요? 어제 방송하던 상태로 기절해서, 제 방송에 구출 요청 왔어요. 어제 스위치에서 난리가 났거든요?"
내 기억은 게임의 히든엔딩을 보고, 채팅에서 나를 부르는 것에 답하려고 생각했던 즈음에서 멈춰 있었다.
"아, 혹시 수증기님이 신고해주셨나요?"
"제가 하얀별님 주소를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죠. 너무 잠이랑 휴식이 부족해서 기절하셨던 모양이에요."
"감사합니다. 아, 어제는 진짜 너무 게임에 집중해서 그런 상태인 줄도 몰랐어요."
일단 소연이를 구하는 엔딩에 도달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쁜 일이었다.
약간 찜찜한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그 내용은 아마 DLC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겠지.
"저 멀쩡한 것 같은데. 퇴원해도 괜찮을까요?"
"별문제는 없지만, 일단 오늘까지는 경과를 보자고 하네요. 원래 몸이 안 좋으셨던 적이 있으셨다면서요. 지금은 완치되었다곤 해도 조심해야 한다고...."
마치 자기가 의사인 것처럼,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하는 수증기님의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의 수증기님과 처음 만날 때도 길에서 쓰러진 걸 수증기님이 도와준 거였네.
예전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참 사람이 좋았다.
"멀쩡하신 것 같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 오늘 방송 일정이 있어서 집에 가서 준비해야 하거든요."
"네, 나중에 사례할게요. 수증기님에게는 계속 도움만 받네요."
수증기님이 병실을 나선 이후에는 미묘하게 끝난 라스트 발렌타인의 결말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잉.
그때 갑자기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 깜짝이야."
설화님이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한 감정을 최대한 추스르면서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으려나?
"아, 하얀별님."
"네, 말씀하세요."
"몸은 괜찮으세요?"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쉬면 될 것 같네요."
"혹시 이번 주 정기방송 게스트 정하셨어요?"
아직 누군가에게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청자들의 타로를 봐줄까 생각했는데....
"아니요? 설화님이 게스트 해주시려고요?"
"음, 고민하고 있어요."
"저야 좋아요. 설화님이랑 같이 방송하면 재밌기도 하고."
설화님이 약간 매운맛이긴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느낌이었다.
"음, 그럼 한번 해봐야겠다. 토요일이죠?"
"네."
그 뒤로 내가 정지당했던 것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했다.
뭐, 이건 몸 관리를 제대로 못 한 내 잘못이지.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네, 그때 봐요."
전화가 끊어지자,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워낙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조금만 더 쉬자.'
조금만 더 쉬고 퇴원해도 괜찮겠지.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 ☆ ☆ ☆ ☆ ☆ ☆
"방송을 못 켜니까 심심하네."
퇴원한 이후에는 지난 방송을 편집해서 큐브온에 올렸다.
문제는 그 이후로는 딱히 할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지루해지려던 찰나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DLC가 있었지."
아까 확인했을 때, 라스트 발렌타인의 DLC 내용은 방송하지 못한다는 제한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혼자일 때 해도 상관이 없겠네.
"오케이 해보자."
나는 큐브에 들어가서 라스트 발렌타인을 켰다.
여러 가지로 걸리는 점이 많았던 것을 고려하면, DLC가 분량이 꽤 클 것 같은데?
"어, 이거 진짜 다운받아야 하네."
아까 대충 볼 때는 DLC 목록까지만 봐서 몰랐는데, 실제로 큐브스토어를 통해 다운을 받아야 했다.
물론 가격 자체는 무료였지만.
[공통: 0의 이야기]
[트루엔딩: 그 후]
[히든엔딩: 비하인드]
"총 세 개인가?"
게임에서는 0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보라고 추천하고 있었다.
음, 이런 것은 추천을 따라도 괜찮겠지.
"어 뭐야 어두워. 꺄악!"
천둥소리였다.
아, 진짜. 갑자기 바뀌니까 깜짝 놀랐네.
그나저나 이 분위기 좀 익숙한데,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프롤로그!"
[펜타임 빌딩 옥상]
이번에는 내가 캐릭터에 빙의한 상태가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옥상으로 걸어 올라갔더니, 프롤로그의 장면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소연아, 제발!」
「바로 너 때문이라는 걸.」
그 장면을 이렇게 멀리서 보니까 새로운 느낌이네.
가만히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소연이 목에 있는 넥밴드, 연구동B에 있던 거잖아?"
저 넥밴드는 시간여행을 연구소 밖에 나가서도 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안돼에에!」
소연이가 떨어지는 순간, 세상이 죽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빗방울도 허공에 멈춰서 물방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연이가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프롤로그 기준으로?"
아까 편집할 때는 생각 못 했는데?
큐브온을 켜서 확인해 봤는데, 실제로 프롤로그에서도 소연이는 넥밴드를 하고 있었다.
"히든엔딩에서 소연이를 살렸을 때, 소연이가 펜타임 빌딩 옥상에서 떨어졌다고 말했지."
그럼 설마 히든엔딩에서 깨어난 소연이가 프롤로그에 있던 소연이라고?
확실히 트루엔딩을 진행할 때의 소연이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지?
"아, 과거로 돌아가지 않은 거구나."
프롤로그에서 넥밴드를 통해 소연이의 기억 데이터 자체는 연구실에 저장이 되었지만, 과거로 보내지는 않았다.
이후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갔고, 그 과정에서 연구실에 있던 소연이의 기억 데이터가 함께 과거로 돌아왔다.
하지만 소연이의 몸은 없으니까 연구실에서 데이터만 방치된 상태였겠지.
"그럼 설명이 되네."
히든엔딩에서 연구실에 방치되었던 기억 데이터를 클론의 몸에 입힌 덕에 프롤로그의 소연이가 깨어날 수 있었다.
잘 생각해보니까 퍼즐이 전부 맞아 들어갔다.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이런 것까지 고려해서 시나리오를 작업했구나.
"그래서 왜 이 장면은 바뀌질 않지?"
대충 상황은 다 이해했는데, 왜 이 장면에서 멈춰져 있는 거야?
주변이 다 회색으로 멈춰 있으니까 좀 무서웠다.
"어, 소연이만 컬러네."
허공에서 멈춰 있는 소연이만 색이 칠해져 있었다.
이거 설마 내가 뛰어내려서 소연이를 붙잡으라는 건가?
"아니 미친."
고소공포증이 엄청 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더 드물다.
아무리 이게 게임이라도....
"에휴."
어쩔 수 없이 눈을 꾹 감고 소연이가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다만 예상과는 다르게, 중력이 약해진 것처럼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정답이구나.'
그리고 소연이에게 내 손이 닿자마자,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지더니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 뭐야."
심지어, 눈치챘을 때는 이미 내가 소연이의 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설마 이 DLC의 주인공은 소연이인가?
그리고 그 추측이 정답이었는지.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이 끝나자 예상대로의 설명이 나타났다.
[공통: 0의 이야기는 캐릭터 '이소연'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소연이가 침대 위에 혼자 앉아있는 채로 독백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2월 14일에 죽는다. 그리고 연구실을 통해 시간을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계속해서 시간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저 죽고 싶지 않아서였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소연이의 말은 굉장히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이미 그녀를 구하는 것에 성공했더라도, 이런 고민 자체가 가슴 아픈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힘들어하는 나를 얀별이는 계속 신경을 써줬다. 본래도 그녀를 좋아했지만, 시간이 반복되고 내가 고립된 시간의 반복이 길어질수록 그 마음은 커지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보면, 이 DLC는 프롤로그의 소연이가 왜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고백을 매번 거절했다.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너무 상냥했던 나머지,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썼다. 자신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인지, 오히려 내 앞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기타 등등.」
슬쩍 시야가 바뀌더니 주인공이 소연이를 거절하는 장면들이 지나갔다.
이유는매번 달랐지만, 모두 거절이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나 자신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녀 이외의 것에는 모두 흥미를 잃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시간을 되돌리면 다 문제가 사라지니까. 그래서 눈치를 챘을 때쯤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별 감흥이 없었다.」
독백은 거기까지였다. 시간이 가속하면서 장면이 바뀌기 시작했다.
"와 뭐야, 이런 설정이 있었구나."
확실히 히든엔딩의 소연이, 정확히는 프롤로그의 소연이는 트루엔딩으로 겪는 소연이랑은 많이 다른 느낌이 있었다.
거기에 이런 스토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네.
시간이 스킵되어서 도착한 곳은 주혁이가 알바를 하는 카페였다.
「하여튼, 얀별이 너도 너무 그런다니까」
「흐음, 그런가....」
주인공과 주혁이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거 왠지 선택지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주혁이를 죽인다.]
[그냥 넘어간다.]
"뭐야 시발"
죽인다니 갑자기 주혁이를 왜 죽여?
이거 설마 주인공이랑 이야기해서 질투 난다고 죽인다는 거야?
"그냥 넘어간다지."
그런데 그냥 넘어간다는 선택지가 내 손에 닿자마자 불타오르더니, 위에 있던 주혁이를 죽인다는 선택지가 강제로 선택되었다.
"아니 이런 개 또라이 게임이 또"
몸이 자동으로 움직이더니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포크을 주혁이의 머리에 던졌다.
그대로 주혁이는 픽하고 쓰러졌고, 주인공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아, 비명이 내 목소리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나는 진짜 당황한 상태로, 급하게 휴대폰을 켰다.
아마 여기서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 된다.
"상세설정은 안 되는구나. 그냥 되돌리기만 가능하네."
어쩌면 당연하다.
DLC에서 그 정도 자유도를 주기에는 분량부터 해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겠지.
한 번 시간을 되돌린 이후에야, 그냥 넘어가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내 상태는 심각해지기시작했다. 얀별이가 내 고백을 받지 않는 상황에 스트레스는 늘어갔고, 그 스트레스를 시간을 되돌려야만 해결할 수 있는 과격한 행동으로 풀어냈다.」
"와 이번 스토리는 많이 무서운데?"
본편은 그냥 방탈출에 연애 시뮬레이션을 섞은 정도의 게임이었다.
그런데 DLC는 유혈이 좀 있네.
심지어 내가 소연이 시점인데 소연이가 사람을 죽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어, 다음이구나."
그리고 다시 시간이 가속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집에 있는 침대였다. 당연히 옆에는 주인공도 있었다.
「얀별아, 키스해도 괜찮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키스라니.」
「한번 해보고 싶어서.」
「그건 좀....」
[억지로 키스한다]
[포기한다]
솔직히 이번에도 아까랑 마찬가지로 아래 선택지를 누르면 위의 것으로 강제로 넘어갈 게 뻔히 보였다.
그렇다고 위에를 누른다고 아래가 선택되진 않을 것 같은데.
"몰라, 일단 한 번 해보기나 하자."
위를 선택하자, 정말로 위는 별문제 없이 그냥 선택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강제할 거라면 왜 선택지로 만들어 놓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읍...!」
「하아, 가만히 있어.」
당하는 캐릭터의 목소리가 나랑 똑같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심지어는 점점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소연이가 주인공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니야?'
「그만해...!」
그리고 결국엔 주인공이 소연이의 뺨을 때렸다.
떨면서 울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내가 봐도 많이 놀란 것으로 보였다.
[계속한다]
[계속한다]
"후...."
이제는 선택지가 의미가 없는 걸 숨길 생각도 없구나.
선택지를 고르자, 소연이가 힘껏 주인공을 넘어트리더니 옷을 찢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인공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소연이는 이제 주인공을 때리면서까지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했다.
「저항하지 마, 저항하지 말란 말이야.」
「소, 소연아. 흐익!」
주인공이 계속 저항하자, 이제 소연이는 그녀의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
발버둥 치던 주인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결국은 움직임이 멈췄다.
"이게, 뭐야."
결국 소연이가 주인공을 죽였다.
내 머리가 스토리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렇게 말고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