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7장 - 가스라이팅(6)
나는 시간을 되돌리면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소연이가주인공을 죽일 수 있을 정도까지 망가졌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처음으로 얀별이를 죽였다. 가장 어려운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에는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점점 나는 망가져 갔다. 결국은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게 되어버렸다.」
다시 시간이 가속하더니, 이번에는 책상에 앉아서 일기장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음, 이런 것을 쓸 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는데.
「그래서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얀별이가 내 고백을 받아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다만, 그 계획에서 이미 망가져 있는 나는 불필요한 존재였다.」
일기장에 적는 것은 일기가 아니라 이제부터 시행할 계획에 대한 계획서였다.
그런데 독백과 함께 적어 내려가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얀별이가 과거로돌아갈 수 있도록, 나는 그녀에게 연구실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힌트를 제공했다.」
"주인공이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한 원인이 소연이었구나."
나는 일기장에 글자가 늘어갈수록 조금씩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이제 점점 프롤로그에서 나온 대사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소연이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가 적나라하게 적혀나가고 있었으니까.
「내가 평소에 과거로 되돌아가는 날은 얀별이와 함께 있던 1월 28일이 아니라 2월 1일이다. 아마 얀별이가 과거로 돌아가면 나는 모든 기억을 잃게 되겠지.」
"기억을 잃는 것도 계획의 일부네."
소연이는 약간 바보 같고 순한 캐릭터라는 느낌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시간의 반복에 찌들어버린 소연이는 이미 그런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무서웠다.
「나는 얀별이에게 내 죽음을 눈 앞에서 자살하는 것으로써 각인시킨다. 그럼 얀별이는 내 죽음에 신경을 쓰다가, 내 고백에 대해서는 더 쉽게 생각해서 받아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녀가 죽으면, 착한 주인공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계속 시간을 반복시킬 것이다.
그럼 그녀가 주인공에게 집착했던 것처럼 주인공도 그녀에게 집착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노림수도 계산에 들어갔다.
「고백에 실패하였을 때, 얀별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다시자살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기억이 없다는 점.」
"이런 미친."
가장 큰 문제는 기억을 잃은 그녀 자신이 자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본래라면 자살이 아니라 연구실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겠지.
「하지만 연구실에서는 기억만 과거로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과거로 보내는 것은 결국 데이터를 과거로 보내는 거니까.」
「내 휴대폰을 대상으로 하는 예약 메시지를 다음 시간여행에 포함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목표를 위한 체스말로 사용한다.
심지어 기억을 잃었을 때의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까지도 이용한다.
"그냥 나는 유도대로 당한 거였네?"
이제야 왜 히든엔딩의 소연이가 그렇게까지 당황했는지 이해했다.
그녀의 계획대로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녀 자신은 깨어날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니까.
애초에 그녀의 계획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주인공에게 하는 고백이라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사랑에 미쳐버렸네. 이런캐릭터를 얀데레라고 불렀나?'
너 때문에 죽는다는 말과 함께 자살한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통해 상대의 심리를 유도해 원하는 결말에 도달한다.
"그렇게 전부 계획대로 진행된 결과가 트루엔딩이네?"
솔직히 충격스러운 내용으로 가득한 DLC였지만, 한편에서는 이걸 보고도 전부 납득하는 자신이 있었다.
"...아 진짜 대단한 게임이네."
트루엔딩과 히든엔딩은 DLC를 봐야 이해할 수 있는 상세한 설정이 있었다.
결말의 대부분을 본편에서 설명해 줬던 노멀 엔딩과는 상이한 느낌이었다.
"기억상실과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극도로 써먹었구나."
DLC는 프롤로그에서 소연이가 떨어지는 것을 1인칭으로 재현하는 내용으로 끝이 났다.
체감상 금방이었지만, 그래도 분량 자체는 꽤 길었다.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너무 간결하게 보여줬다면, 오히려 소연이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는 가는데, 무섭기도 하네....'
이제야 게임의 흐름을 전부 이해했다.
뒤통수를 여러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긴 했지만, 확실히 재밌는 경험이었다.
이 작품의 소연이는 최고의 히로인이면서, 최고의 빌런이었던 셈이네.
"집념이라...."
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게임에 과몰입해서 소연이를 살리겠다는 집념을 유지하다가 쓰러지기까지 했으니까.
이렇게 보면, 히든엔딩은 프롤로그의 소연이와의 재회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는 그녀와 비슷해져야 하는 엔딩 같았다.
'무슨 범죄자 양성이야?'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다른 DLC를 확인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확인해 볼 DLC는....
[트루엔딩: 그 후]
[히든엔딩: 비하인드]
'무조건 히든엔딩이지.'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결말은 소연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히든엔딩이니까.
그래서 트루엔딩의 DLC는 보지 않고 넘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 시작부터 연구실에서 들은 이상한 브금이네."
DLC를 시작하자, 갑자기 분위기가 변했다.
일단 엔딩에 관련된 DLC니까 엔딩 이후의 이야기겠지?
[2020년 2월 2일]
"2월 2일이면, 연구실이 2월 1일이니까 바로 다음 날이네?"
엔딩이 아예 끝나는 날은 2월 15일이기는 하지만, 2월 1일에서 바로 건너뛴 것이었다.
그럼, 그 중간쯤에 있었던 스토리인가?
"어, 주인공이네?"
주인공은 연구실에서 누워서 자고 있었다. 왜 여기에 누워있지?
그리고 주인공의 주변에는 이상한 주사 같은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주사약 병에 수면 마취라고 적혀있었다.
"설마 일부러 재운 건가?"
화면이 바뀌더니, 연구실을 나가서 집으로 향하는 소연이가 보였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2월 2일이면 소연이가 아직 죽기 전이니까 두 명이잖아?
'물론 한쪽은 클론에 들어간 프롤로그의 소연이지만....'
프롤로그의 소연이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직후에 당황하는 목소리가 집 밖까지 흘러나왔다.
「얀별이야? 뭐,뭐야? 나?」
「음, 이렇게 보니까. 조금 신선하네.」
그녀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원래의 자기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너 알고 있지? 어차피 2주가 지나면 죽을 거라는 걸.」
「너, 너는 대체 누구야. 왜 내가 한 명 더 있는 거야?」
당황하는 자기 자신에게 설명할 말을 고르던 그녀는, 귀찮아졌는지 말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야 칼? 설마...."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설마가 맞았다.
「힉! 그, 그건 왜 들고 있는.... 커흑」
「음, 그냥 우리 빨리 끝내자. 너 때문에 얀별이랑 있을 시간이 줄어들잖아.」
자기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모습은 진짜로 무섭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미치겠네."
아까 공통 DLC에서부터 느끼는 거지만, 본편을 진행하면서 생긴 과몰입이 엄청 빠르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과몰입이고 뭐고, 내가 구해놓은 소연이가 너무 무서웠다.
왜 히든엔딩이 트루엔딩으로 지정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럴 만한 캐릭터라는 건, 아까 DLC로 대충 이해하고 있었는데."
정말 아무 감흥 없다는 듯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그 모습이, 너무 섬뜩하고 완벽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던 히든엔딩의 DLC가 끝이 났다.
"...솔직히 어지간한 사람은 트라우마 걸리겠는데."
덕분에 과몰입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왜 심리적 공포 태그가 있는지는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게임이었다.
굳이 트루엔딩의 DLC는 볼 생각이 없어서, 게임을 종료하고 큐브 밖으로 나왔다.
"그래 뭐, 재밌었다."
게임은 재밌었으면 된 거지.
게임을 하다가 쓰러지거나, 정지를 당하거나 했지만....
그래도 이걸 하는 동안은 정말로 즐거웠으니까.
"아, 맞다."
[로그인에 실패했습니다. 사용이 정지된 계정입니다.]
게임을 끝낸 뒤에, 휴식으로 스위치 방송을 보려다가, 계정이 정지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청자로도 활동을 못 하는구나."
물론 방송을 보는 것은 로그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냥 채팅을 치지 못할 뿐이지.
나는 로그인을 하지 않고 스위치 앱을 켰다.
내가 팔로우한 사람들을 하나씩 검색해 보는데, 대부분은 지금 방송이 꺼져있었다.
"어?"
아니, 한 명의 예외가 존재했다.
설화월화님이었다.
'음, 이거 보면서 좀 쉬어야겠다.'
나는 설화님의 방송을 틀어 놓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아니, 우리 매니저긴 한데. 그래도 방송에 나오는 건 좀 그렇잖아. 진정해 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설화님이 저렇게 상황을 중재하고 있는 거야?
- 절.대.겨.울.이.
- ㅋㅋㅋㅋㅋㅋㅋㅋ
- 소원권이라며
- 겨울이랑 합방ㄱㄷㄱ
- 진짜 빡치네
- 매니저님 심기 건들지 마셈ㅋㅋ
- ㄹㅇㅋㅋ
- ^^7
"내가 소원권을 걸긴 했지만, 그 소원권은 나한테 요구가 가능한 거잖아. 내 동생이랑 내가 합방하는 걸 어떻게 해. 그리고 겨울이가 스트리머도 아니잖아."
아마도 설화님이 동생과 함께 방송하길 원하는 시청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건 어렵다고 말리고 있었구나.
"맞아 동생분이 매니저를 맡고 계신다고 했지?"
- 그럼 소원권을 매니저님한테 양도하는 조건으로
- ? 오 그거면 고민해 볼게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천젠데
- 그런 발상은 없었다
"잠깐만요. 제가 언제 소원권에 양도 기능이 있다고 했죠?"
- 언니는 좀 조용히 해
매니저님의 채팅에 설화님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역시 동생 분한테 약하시구나.
나는 방금 탄 커피를 홀짝이면서, 방송을 구경하고 있었다.
"후, 그럼 나랑 겨울이랑 우결 방송.... 알았어, 이상한 소리 그만할 테니까 때리지 마."
결론적으로 시청자가 가지고 있던 소원권은 설화님의 동생인 겨울님에게 넘어갔다.
대신 겨울님은 설화님과 날을 잡고 같이 방송하기로 약속을했다.
'이건 좀 그림이 되겠는데.'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곧바로 설화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하얀별님?"
"아, 안녕하세요. 설화님. 눈하 달하."
"제가 방송 중인 거 아시는구나?"
"네, 보고 있었어요."
평소라면 채팅으로 했을 내용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채팅을 칠 수 없으니까.
"제 토요일 정기방송에 설화님이 게스트 하기로 하셨잖아요?"
"음, 그렇죠?"
"혹시 그거 조금 변경해도 되나요?"
"어, 이번주는 저 짤리는 건가요?"
그럴 리가 없다.
설화님을 제외하고는 게스트 요청이 들어온 경우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후속 요청이 왔다고 해도, 선약을 깰 수는 없지.
"아뇨, 정확히는 제가 섭외를 요청하는 겁니다. 애매하다 싶으면 바로 거절해 주세요."
"섭외요?"
"겨울님도 같이 타로를 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나는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겨울이도요?“
"물론 겨울님이 허락을 하신다는 조건 하에요."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잠시 기다리자, 채팅창에 겨울님의 대답이 올라왔다.
- 어차피 약속했으니까 방송에 나가기는 해야 해서 괜찮을지도?
이번에 이런 아이디어를 낸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지난번에 수증기님의 타로 방송에서 콘소메님이 난입하는 장면이 꽤 재미있게 잡혔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둘을 섭외해서 서로 연관된 타로를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도 별로 상관은 없어요. 안 그래도 겨울이랑 무슨 컨텐츠를 해야 하나 고민중이었으니까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번에 게스트 신청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설화님은 내가 방송을시작한 초기부터 나를 많이 도와주는 것 같네.
굉장히 감사한 일이었다.
"저야말로 공짜 타로 개꿀인데요."
- ㄹㅇㅋㅋ
설화님과 겨울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이 나를 배려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건...."
아, 겨울님도 타로로 질문할 거리를 미리 생각해 오시라고 해야겠다.
타로 방송에서는 그게 제일 중요한 준비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