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8장 - 매운맛 스트리머의 은밀한 비밀(5)
'...혹시 여자끼리도 미투 당하나?'
내가 괴상한 고민을 하는 사이, 찰칵하는 카메라 셔터음이 났다.
그 뒤에증거확보라고 중얼거리는 겨울님의 목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흡, 흐읍...."
거기다가 나를 보며 울먹이는 설화님까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뭐야? 아, 방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문을 열었던 건 루냐님이었구나.
"아니, 나 억울해...."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입니다."
겨울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설화님의 눈가를 닦아냈다.
겨울님이 생각보다 더 짓궂으시네.
"설화님 아시죠? 저, 그냥 문에 밀려서 넘어진 건데. 하하하."
"아, 아니에요.... 저, 저야말로 갑자기 누군가 가까워지면 다, 당황해서. 죄, 죄송합니다."
그나마 다행인점은 지금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남자가 방금 그 구도로 사진을 찍혔다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심각해졌을 것 같은데.
"후,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언니도 그렇고 하얀별님도 반응이 너무 찰지네요."
"겨울님. 아까 그 사진은 지우는 방향이 좋지 않을까요? 끄응."
"싫은데요? 이거 소장가치 엄청 높은데."
사진을 보면서 웃고 있는 겨울님에게서 휴대폰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빼앗는 것은 무리였다.
"어설프시네요."
"아, 제발요."
결국은 포기하고, 루냐님에게 해명이라도 하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루냐님은 거실 쇼파에 앉아서 쉬고 계셨다.
"루냐님. 안녕하세요. 현실에선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뜨거운 시간은 잘 보내셨어요?"
"네? 아니,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그럼 그걸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나갔다고? 난 당연히 농담하고 나간 줄 알았는데?
가끔 보면 사람을 당황스럽게하는 면이 있는 분이었다.
"저는 딱히 여자끼리 야한 짓을 하면 안된다는 편견이 있지는 않아요. 마음껏 하셔도 괜찮아요."
"아니, 그런게 아니에요! 저는 설화님이 방송에서 연기하는 부분 때문에겨울님이 이야기해보자고 불러서 온 거예요."
"아, 그거구나."
루냐님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봄이가 방송한다기에 처음에는 반대했거든요. 뭐 그래도 지금은 알아서 잘하는 것 같으니까, 별말은 하지 않지만...."
"스트리머가 쉬운 직업은 아니죠."
"애초에, 저한테도 그리 맞는 직업은 아니었죠. 지금은 좀 익숙해지긴 했어요. 그나마 제가 사운드 채우는 건 재능이 있어서 다행이었죠."
루냐님은 설화님과 겨울님이 있는 방을 흘겨보더니, 나에게 손짓을 하면서 일어섰다.
"제가 방송하는 방 보여드릴게요."
루냐님을 따라서 들어간 방에는 큐브와 피아노가 놓여있는 방음부스였다.
맞다, 피아노도 치신다고 했었지.
"원래는 피아노를 했거든요. 뭐, 방송을 시작하면서 포기한 꿈이지만.... 그래서 방음부스가 있어서 방송 시작은 꽤 유리했어요."
"아...."
"전 이미 포기했는데, 봄이는 제가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끔 방송 컨텐츠로 쓸 겸 다시 연습하고 있어요."
설화님이 무리하면서까지 방송을 시작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루냐님이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거다.
'상냥한 사람이니까.'
처음 보는 나를 챙겨 줄 때부터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설화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가족을 위해 당연하게 자신을 희생한 루냐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설화님이랑 루냐님을 보면, 여러 가지 느끼는 점이 많네요."
"다른 방도보실래요?"
"다른 방이요?"
"음, 아직 안 보셨을 것 같은 방이...."
루냐님은 잠시 고민을 하다 작게 박수를 치시더니, 방음부스를 열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나저나 뭘 하기에 저 둘은 손님도 안 챙기고 있는 건지...."
"하, 하하.... 아마 아까 이야기 나왔던 걸 이야기하고 있겠죠."
"여긴 맘대로 보여주면 혼날 것 같긴 한데. 뭐, 소메식으로 혼날 각오를 하고 보여줘야겠네요."
그렇게 중얼거린 루냐님이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 방은 엄청 난장판이네.
"겨울이 방이에요. 좀 난장판이죠? 최근에 뭔가 열심히 만들고 있던데. 그래서 그런지 정리하기가 힘든가 봐요."
루냐님의 설명을 듣다가, 겨울님의 책상 위에 있는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빼곡하게 적혀있네. 무슨 공부라도 하는 건가?
"요즘에 큐브 관련해서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요.... 너무 자세히 보면 화낼지도 모르니까, 살짝만 보세요."
노트에는 머릿속에서 보이는 환각을 입력 장치로 사용하는 시스템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이런 것도 큐브에서 가능하구나?
'원래는 환자의 환각을 살피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술 같은데....'
왜 이런 내용을 공부하고 있는 걸까.
저번 방송에서는 스트리머를 할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좀 어려운 내용이네요. 이과가 아니라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도 예체능이라 잘 모르겠어요. 뭐, 겨울이는 나이대 치고 똑똑하니까요."
그러다가 침대 아래쪽에서 발에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바닥을 훑었다.
손에 작은 메모지 하나가 잡혔다.
[진짜 죽고싶다.]
"이건...."
겨울님이 쓴 것으로 보이는 메모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아, 이런.... 겨울이한테 혼나겠네. 괜히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냥 말씀 드릴게요."
루냐님은 메모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주 최근 메모는 아니에요. 전에 겨울이가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었거든요.학교 옥상에서."
"네?"
그리고 꽤 무거운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나도 모르게 당혹이 담긴 목소리가 나왔다.
자살이라고?
"고3인데, 학교를 중퇴하면서까지 지금 집에 있는 건 그것 때문이에요. 검정고시야 어렵지 않게 통과할 것 같지만.... 겨울이가 입은 상처가 많았겠죠."
"학교를 중퇴 했다면...."
"부모님이 없다는 이유로 꽤 길게 괴롭힘이 이어졌던 것 같아요. 가장이면서 신경을 못 쓴 제 잘못이죠. 생활비랑 대학 갈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안일했어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루냐님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는지 루냐님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겨울님이 그런 티는 전혀 내지 않던데...."
"그럴만하죠. 심지어 상황이 가장 심각하던 때에 가족이던 저랑 설화도 몰랐으니까요. 설화는 대충 이야기는 알지만, 자살하려고 했다는 건 아직도 몰라요."
"그럼 겨울님이 설화님 매니저를 시작한 것도?"
"집에 계속 있으니까, 자기가 언니라도 지키겠다면서 시작한 거죠. 저야 커진 이후에는 회사에서 매니저를 붙여주니까...."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연이 많은 집안이었다.
루냐님은 대충 설명이 끝나자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루냐님을 따라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실수로 책상에 있던 마우스를 건드렸다.
"...컴퓨터가 켜져 있었구나?"
마우스를 건드리자 어둡던 모니터의 화면이 밝아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화면에 눈길이 갔다.
[4월 23일 테스트 실패]
[4월 24일 테스트 실패]
[4월 25일 테스트 성공]
'테스트? 뭔가 해보고 있나?'
화면에 유일하게 보이는 폴더에는, 날짜와 함께 성공과 실패가 적혀있는음원 파일들이 있었다.
정확히는 전부 실패에 마지막 파일인4월 25일만 성공이었지만.
'...들으면 혼나겠지.'
솔직히 궁금하긴 하다. 그러니 이게 게임이라면 무조건 들었겠지만....
남의 집에서 그런 짓을 할 자신은 없었다.
"이건 또 뭐야?"
그런데 밖으로 나가고 있던 루냐님이 다시 방에 들어오시더니, 4월 25일의 파일을 실행했다.
그러자 컴퓨터에서는 겨울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4월 25일 테스트입니다. 자, 이제 말해봐 언니.」
언니? 설화님을 말하는 건가?
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옆방에서 달려 나온 겨울님이 그대로 컴퓨터를 꺼버렸다.
"지, 지금 뭘 듣고 있는 거예요?"
"어, 미안. 들으면 안 되는 거야? 야한 건가?"
"무슨 소리야 이 머릿속에 야한 것만 가득 찬 멍청이가! 아니, 남의 컴퓨터는 왜 뒤져보는 거야?"
겨울님은 이 상황에 많이 놀란 듯, 숨을 몰아쉬면서 루냐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이름은 진한 주황색으로 변해있었다.
'주황색이면, 당황하셨다는 거네.'
저기 있는 파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들어선 안 되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마우스를 건드는 바람에."
"하아.... 진짜 깜짝 놀랐네."
"그런데 정말 그게 무슨 파일인데 그렇게 당황하는 거야."
"오빠는 몰라도 상관없거든?"
나는 그렇게 겨울님이 틱틱대는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루냐님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방을 나갔다.
'어라, 나 뭐 하는 거지?'
갑자기 겨울님머리는 왜 쓰다듬고 있는 걸까.
그녀는 오히려 눈을 감고 쓰다듬어 주는 것을 즐기는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니, 아까는 설화님도 쓰다듬었었지?
'라스트 발렌타인 때문인가?'
그때 너무 과몰입한 덕에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힉? 자, 잠깐만요. 생각해보니까 하얀별님이 왜 제 머리를?"
"아, 죄송해요. 무심코...."
이제야눈치챘구나. 방금까진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니지, 방금 그건 너무 범죄자가 할법한 생각이네.
"...하얀별님"
"네?"
"잠시 껴안아 봐도 괜찮을까요?"
"...네?"
갑자기?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랑 전혀 연결이 안 되는데.
거절할까 싶었지만, 방금 지은 죄가 있었던 만큼 허락하기로 했다.
"별로 상관은 없어요."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들어서 나를 껴안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얼굴을 묻은 채로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히익?"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야?
그렇게 나에게 껌딱지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겨울님을 떼어놓으려다가, 겨울님의 침대 쪽으로 쓰러졌다.
'이번엔 아까처럼 내가 덮치는 모양새는 아니라 다행이네.'
아니지, 같이 꽉 안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 이것도 꽤 위험한 것 같은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방문 쪽에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니, 이번에는 설화님이 휴대폰을 들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 자매 덮밥?"
설화님 그 순진한 표정으로 대체 무슨 말을 내뱉는 건가요.
저는 아까부터 굉장히 억울합니다.
"죄송해요. 뭔가 상상 이상이라.... 잘 먹었습니다."
"...대체 뭘 드셨는데요."
겨울님도 뭔가 핀트가 어긋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지. 언니랑 이야기해봤는데, 날짜를 잡아서 한 번 시도해 볼 생각이래요."
"그렇게 결정이 났구나."
"어, 어떻게든 노력하면 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요. 응원하겠습니다. 그거로도 모자라면 병원에 꼭 가보시고요."
"그, 그럴게요."
이제야 대화가 정상화된 느낌이다.
그나저나 슬슬 긴장이 풀리니까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저도 오늘 방송해야 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반쯤은 내가 피곤해서 이야기한 핑계였지만, 오늘 방송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저녁 드시고 가시지."
"괜찮아요. 나중에 또 올게요."
"들어가세요."
"가,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그날은 별문제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어, 음...."
그래, 그날에는 문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