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12장 - 시청자 참여 방송(1)
어디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대충 모노를 처치하고 찾았던 이상한 상자를 찾았던 것이, 스토리가 이상해지는 시발점이었다.
'시발....'
그 상자에 있던 것은 모노가 사용하던 이능력 샘플 이식기와 그 출처에 관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 이식기의 출처 쪽이었다.
"그 망할 엠브리오."
음지에서는 유명한 소문으로, 엠브리오 대회에서 우승하면 소원을 빌 기회를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회의 2회차 우승자가 바로 모노였다.
모노는 우승의 대가로 이능력 재능의 격차를 줄이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 이능력 샘플 이식기를 얻어냈다.
하지만 지난번 샘플 이식 기술 사건에 의하여 이능력의 샘플 채취 자체가 중지되었고, 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해 기존 샘플이 몸에 잠들어 있는 이식자들을 납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자기 자신한테 이능력 샘플을 전부 이식했겠지.'
모노가 여러 가지 능력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뒷배경이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뒤의 스토리가 정말 막장을 거듭했다.
아직 꺼림칙한 샘플 이식 기술의 시작을 알아보기 위해 돌아다닌 결과, 그것 또한 1회차 엠브리오 대회와 관련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조사를 위해 3회차 대회에 직접 참가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스토리.
심지어 그 뒤로 나오는 보스들의 퀄리티도 정말 조악했다.
대부분이 기존에 나온 보스들을 재활용한 수준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노전이 젤 재밌었지.'
난이도도 모노전이 가장 어려운 편이었다.
물론 모노전은 패배한다고 해도, 다른 루트로 스토리가 전개될 뿐이지 아예 진행에 실패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꼭 이겨야 하는 건 아니랬지."
하여튼 그 망할 대회 잠입의 결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제까지 멀티모드로 함께 스토리모드를 공략했던 동료 캐릭터가 AI로 등장하여, 결승전에서 싸워야 한다는 스토리는 누가 생각한 걸까.
사실 거기까지가 전부였다면, '스토리 모드 정말 재미없었다'라고 말하고 적당히 끝내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아까부터 내 시야에 보이는 미션 메시지였다.
[미션: 성불(2)
조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기
보상: 리트라이 입장 티켓(1/3), ???]
'생각도 못 한 타이밍에 튀어나왔단 말이야.'
영전에서 검신AI와 싸운 이후,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진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로메의 스토리모드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역시, 일반적인 AI 느낌이 아니야.'
그리고 나타난 상대 AI는 이번에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로메는 꽤 오래된 게임이고, 그런 게임에 심플월드수준의 고성능 AI가 튀어나오는 것은 너무 이상하잖아.
'영전 때도 이런 식이었지.'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변명이 게임회사의 공지로 올라올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미션을 내주는 것이 게임회사들과 관계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와, 이건 좀 빡센데?"
로메가 1대1의 격투모드가 있는 게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1대1에서 서포터가 불리하게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마 나는 궁극기 게이지가 채워지면 할만하긴 하다.
문제는 그 궁극기의 게이지가 전투가 시작할 때 0부터 시작한다는 거지.
"가끔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도 좋잖아!"
"흡!"
그런데도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뛰어난 기동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덕분이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수증기님의 캐릭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거슬리네.
트라우마의 내용인가?
'수증기님 목소리는 맞아. 하지만 역시 수증기님은 아니네.'
말하는 분위기도 달랐지만, 캐릭터를 다루는 컨트롤 자체가 달랐다.
수증기님이 다루는 검신의 화력 자체는 검신과 동등하다.
하지만 로스트 메모리즈의 시스템 보정을 받는 것일 뿐이라서, 실제의 컨트롤 자체는 엄청 어설펐다.
하지만 내가 아까부터 상대하고있는 이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
영원한 전쟁에서 만난 검신처럼 자연스러우면서 과감하게 검과 마법을 다루고 있었다.
- 또 AI 이상하네
- ㅋㅋㅋ꼭 얀별님만 이런일 겪네
- 심지어 또 검신;
- 대사는 정상인데 마법ㅋㅋㅋ
- 여기도 뭐 AI 추가 하려고 하나?
- ㄹㅇㅋㅋ;
- 교주님 지는 것 아니죠?
"질 것 같은데?"
나는 전투에서 버티기보다는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반격할 틈은 물론이고, 내 공격을 제대로 된 견제로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상황을 바꿀만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금 열심히 맵을 부수고는 있는데."
맵을 부수는 것은 궁극기 게이지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내가 궁극기를 채우고 전투에 돌입하는 것 자체는 가능할 것이다.
"왜 늘 희생하기만 하는 건데, 이제껏...!"
"어우, 위험했는데."
전투가 지속될수록 영전에서 만난 검신과의 차이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전투에 대한 실력은 제대로 된 상태지만, 이번 AI는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대사를 말하는 부분 자체는 특별한 AI로 보이지 않았다.
'수증기님의 트라우마를 입으로 쏟아낼 뿐이니까.'
그나저나 멀티모드의 대사가 이런 방식이라니.
수증기님 쪽 방송에서는 내 캐릭터가 저러고 있다는 뜻이 되잖아?
어찌 보면 약관을 제대로 읽지 않은 나의 탓이겠지만, 조금 거슬렸다.
"그리고 나 여자 아니라고!"
"푸읍."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얼마나 놀렸으면 트라우마가ㅋㅋ
- 근데 여장 클립 보면 여신 맞지
- 그래서 궁극기가ㅋㅋㅋㅋ
- 아아 수증 여신님
- 미치겠네ㅋㅋㅋ
아 역시 그 부분도 트라우마에 속하는 내용이었구나.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제야 제대로 싸워 보겠네."
방금까지는 사실상 체력만 보존하는 채로 도망만 치고 있었지만, 드디어 궁극기의 게이지를 모두 채우고 전투에 나섰다.
내가 실을 다루는 것이 익숙해질수록, 여러 가지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실을 이용해서 검과 비슷한 형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검 형태로 엉켜있는 실을 손잡이 부분을 제외하고 고속으로 움직여 순환시키면, 마치 톱과 비슷한 방식의 무기가 완성된다.
- 겜잘스ㄹㅇ
- 게임 처음 하는 날에 저걸 어떻게 하냐고
- ㄹㅇㅋㅋ
- 아리아 너무 사긴데
- 로메에 사기가 아닌게 어디있어
- 하긴ㅋㅋ
로메에서 이런 식으로 본래의 스킬 방식을 넘어서는 컨트롤 방법을 '오버라이트'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했다.
이게 꽤 고인물들만 가능한 컨트롤이라는 것 같았다.
'로메의 스킬들에는 스킬 자체에 마법적 특성이 숨어 있어서, 그 덕분에 이런 짓이 가능하다고 했지.'
로메의 스킬은 마치 내 새로운 몸 일부처럼 다룰 수 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없어야 할 몸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행하는 하나의 마법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내가 실로 만들어진 검을 꺼내자, 순간적인 화력은 수증기님의 캐릭터보다는 강했다.
문제는 결국 내가 검을 다루는 실력 자체가 부족해서 제대로 피해를 누적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내가 밀리는 건 아니지만, 이러면 끝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증기님의 캐릭터의 검이 빛나더니 사라졌다.
이 이펙트는 잘 알고 있었다.
'수증기님의 궁극기인 여신화.'
사실 거기까지였다면, 예측했던 부분이라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리아?"
- ???
- 이게 갑자기 디자인이 이렇게 나오네
- 버그인가
- 2페이즈임
- 갑자기?
- 원래 시간만 지나도 켜짐
- 2페이즈는 자기 트라우마도 섞임
- 멀티 안해봐서 몰랐네
- 와ㄷㄷ
- 방장님 ㄱㅊ?
"...또 당황하면 제 체면이 안 살죠."
아까도 비슷한 상황에 당황했다가 죽을 뻔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맞겠지.
이런 건 결국 게임의 연출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곧 쏟아져 나올 공격에 대비하는데, 어째서인지 공격이 날아오지 않았다.
"어라?"
"언니."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자, 심장이 턱 하고 멈추는 것 같았다.
캐릭터의 목소리가 정말 오랜만에 듣는 아리아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미안해요. 언니를 힘들게 해서."
"...뭐야, 뭐냐고."
수증기님의 캐릭터가, 그 AI로 이제까지 제대로 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페이즈부터 제대로 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설정이 있었겠지.
"...언니"
"닥쳐! 그 목소리로 말하지 마!"
솔직히 나는 아리아와 길게 본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냥 내 눈앞에서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그뿐이다.
'망할....'
분명히 후회 했었다.
내가 레벨이 좀더 높았더라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리아를 구하는 퀘스트를 받았더라면, 결과가 다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다.
"아리아가 죽은 것은 아리아 때문이니까. 언니가 힘들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아니었으면 구할 수 있었어."
"언니가 없었으면 아무도 오지 않았을걸요?"
그럴지도 모르지.
심플월드 탑 1층의 계단 함정은 워낙 유명하다고 했으니까, 그것에 걸리는 사람이 흔하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생각해봐서 알고 있었다.
"알아, 알아, 안다고. 머릿속으로, 이론상으로는 전부 알고 있어. 애초에 넌 진짜 아리아도 아니겠지!"
"그럼 언니,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자신이 아리아라고 말하는 웨딩드레스 차림의 한 캐릭터를,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고 있었다.
"언니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언니가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건 어떨까요."
"어?"
"지금의 절 이겨보세요. 언니가 이제는 누군가를 지킬 만큼 강하다고 증명해 봐요. 그 일이 자신의 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분명 지금은 강해졌을 거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가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으면서 웃었다.
그러자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미션이 변경되었습니다.]
[미션: 성불(2)
조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기
보상: 리트라이입장 티켓(1/3), ???
실패: 아리아에 관한 기억 삭제]
"......."
그녀가 미션의 내용을 바꾼 건가?
미션의 대상으로 나온 AI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였어?
아니면 미션을 건 사람과 저 AI와 관계가 있는 건가?
'내 기억을 지우겠다고?'
그것 때문에 내가 힘들어하니까?
"웃기지 마."
아리아의 기억으로 고통받았지만, 그렇다고 기억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내가 짊고 가야 하는 기억이니까.
"그래, 이겨줄게."
저번부터 나오는 저 AI들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저렇게까지 도발하는데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흐읍!"
마법은 없지만, 극도로 강해진 스킬의 의지는 마법에서의 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로메의 공략글에 적혀 있던 내용이다.
'가속해. 더 빠르게.'
검을 이루는 실이점점 빠르게 회전할수록, 절삭력과 파괴력이 증가한다.
질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카앙!
내 검과 그녀의 마법이 공중에서 부딪히더니 엄청난 소리를 냈다.
나는 여파에서 탈출하면서그녀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괴물이네"
"이 궁극기는 그런 물건이니까요. 확실히 캐릭터가 잘 빠졌어요."
나는 방금 사용한 수준의 화력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
내 캐릭터의 특성상 쿨타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공격이 마법인 그녀는, 어렵지 않게 대량의 마법을 쏟아냈다.
컨트롤이 영 아니었던 수증기님이 사용할 때도 매번 무서운 결과를 냈던 궁극기다.
그런데 검신의 컨트롤과 비슷한 수준인 AI가 사용하면 어떻겠는가.
'포카님과 대치하는 기분이야.'
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
게임 속이라서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술에서 전해져오는 압박감은 그럭저럭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로메의 스킬들에는 스킬 자체에 마법적 특성이 숨어 있어.'
즉, 어떻게 보면 로메의 스킬은 특성이 강한 마력과 다르지 않다.
내가 사용하는 실은 어떻게 보면 특별한 형태의 마력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지는....
'내 자유야.'
거기까지 깨닫는 순간, 실행하는 것은 간단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었다.
'당연한 거지.'
실을 사용해서 마법을 재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담긴 이미지.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내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강해졌던 건 아니야."
하지만 내 방송을 보는 누군가가 즐거워지길 바라면서 게임 실력을 연마한 건 사실이다.
피지컬도, 마지컬도, 심지어는 이 망할 오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 생각도 없거든."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그녀의 HP가 소량이나마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