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17장 - 우리가 몰랐던 75층의 비밀(4) (92/182)



〈 92화 〉17장 - 우리가 몰랐던 75층의 비밀(4)
마력을 모아 형태를 잡고, 날에는 오러를 두른 검.
조금 전에 휘둘렀던 그 검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주저앉았다.
검이 그대로 바닥에 깊숙이 내려꽂히더니, 잠시 뒤에 반짝거리면서 소멸했다.

"헉, 허억...."

턱선을 따라서 흐르는 땀방울의 궤적이 신경 쓰일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냈고, 온몸이 떨려오며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깜빡거리는 마력 부족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교주님의발닦개'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천마군림보(비행)

시야의 한 편에 후원 메시지와 채팅창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걸 읽고 있으니 조금씩 정신이 뚜렷해졌다.

- ㅁㅊ
- 단칼에ㄷㄷ
- 힐러(물리)
-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
- ㄱㅊ은거 맞나
- 빡칠만 했지ㅋㅋㅋ
- 천마군림보ㅁㅊㅋㅋㅋ
- 너무 무리한 거 아님?

[73층(시뮬레이션) 미션 완료
레지스탕스 기지 방어.(1/1)]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였다.
솔직히 말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후회를 하지는 않았다.
조금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시 선택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겠지.

'정말로 죽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괜찮은 건가?'

하지만 그를 죽이면 조금이라도 시원해질 줄 알았단 가슴이 여전히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설화님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하얀별님 괜찮아요?"
"아마도요."

주변을 둘러보자  멀리서 연주로 버프를 하고 있었던 루냐님까지  근처까지 와 있었다.
상황은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설화님은 쓰러진 백작을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하얀별님이 네즈를 죽인 직후에 행동이 이상해지더니 쓰러졌어요. 죽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죽었던 아이들처럼 치료가 전혀 먹히지 않네요."
"네즈...."

그가 자신의 인체실험을 신나서 자랑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입술을 깨물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안,  내 불찰이야. 쉽다고는 해도 너무 방심했어. 지난 회차에서는 우연히 죽어서 그랬는지 이런 이벤트가 없었거든."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죽은 사람은요?"
"아까 그대로."
"그건 다행이네요."

다들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고, 내가 계속 일어나지 못하는 걸  시리엘님이 나를 잡아 던지듯 가볍게 들더니 그대로 업었다.

"시, 시리엘님?"
"우리는 잡일 할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들어가서 쉬죠?"
"그, 그게 아니라."
"시아가 불안해하고 있을 거예요. 빨리 가서 안심시켜 줘야죠."
"아, 네."

혼자 걷겠다고 하고 싶었지만, 내가 지금 걷지 못하는 상태인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무리했구나.'

심플월드는 현실의 몸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알려진 게임이니까 무리한 수준의 움직임을 했다면 다치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회복을 사용하기에는 마력이 여의치 않았고, 분위기상 다른 분에게 부탁하기에도 애매해서 그대로 시리엘님에게 몸을 맡겼다.

- ㅗㅜㅑ
의외로 부끄러워하네
- ㅋㅋㅋㅋㅋㅋ
- ㅁㅇㅁㅇ
이런 주식은 생각도 못했다
안돼 별화주식 떡락한다
 근데 저렇게 업는게 가능한 거구나

이건 게임이니까 이렇게 업을 수 있는 것 아닐까?
현실에서도 가능한 사람이 분명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처럼 쉽게 될 것 같진 않은데.

"하얀별님. 아까는 깜짝 놀랐어요. 다행히 늦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갑자기 뛰쳐나갔을 때, 일신 백작의 검을 막아주셨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막긴 했는데, 못 막으면 어쩌나 많이 조마조마했어요."
"그랬구나.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대답을 들은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괜히 찔려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도착했는지 침대에 내려졌다.

['심크리트'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그녀는 나를 침대에 부드럽게 눕혔다. 그리고는 옷을 벗으며

- ㅁㅊㅋㅋㅋㅋ
- 뭔데
- ㅗㅜㅑㅗㅜㅑ
- 아니 뭔데ㅋㅋ
- ㄴㅇㄱ
- 개뜬금업네ㅋㅋ
- 저걸 저기까지만 쓰네

채팅창 분위기가 어두워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아까 갑자기 뛰어나간 것에 대해서 시리엘님에게 사과할 생각이었다.
아니, 움직이려고 생각만 했을 뿐이지 정말 움직여지진 않았지만.

"아...."

그리고 그때 짧은 탄식이 옆에서 들려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가져가자 시아가 기둥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74층(시뮬레이션) 미션
시아의 각성.(0/1)]

'이건 또 뭐야?'

갱신된 미션이 굉장히 예상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이건 나중에 포카님 만나면 물어봐야겠네.

"어?"

내가 시아에 정신을 팔린 사이에 시리엘님은 이미 방을 나간 상태였다.
되게 빠르시네.

"다녀왔어. 시아야 몸은 좀 괜찮아?"
"아, 아파?"
"응? 나?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나는 시아가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역으로 내가 괜찮냐는 답이 돌아오다니.
시아가 보기에도 내 상태가  아닌가 보다.

시아 귀여운 거 봐
- 옷 다 갈아 입히니까ㄷㄷ
- 종족 특성  있으니까 신기해
- ㄹㅇㅋㅋ
- 뭔가 뭔가네
죽었다는게 너무 안타깝다
- ㅠㅠㅠ

채팅을 읽다가 뒤늦게 눈치챈 사실에 나까지 조금 침울해졌다.
우리가 있는 이 던전은 시뮬레이션이다.
즉, 여기를 클리어하고 나가도 원래 층에서는 시아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다.
이제는 구할 방법이 없다.

"이거, 물...."
"고마워. 마침 목말랐어."

시아의 강아지 같은 귀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살짝 웃음이 터졌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까 방금까지 했던 답답한 생각들이 조금씩 사라지며 편해지는  같았다.

"많이, 죽었어?"
"아니, 대부분은 멀쩡하게 살아있어. 시아를 그렇게 만든 나쁜 놈은 죽었지만."
"응"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처음 구출되었을 때보다는 말도 잘하고 안정된 상태였다.

"언니가 조금만 쉬고 같이 놀자."
"괘, 괜찮아 놀지 않아도...."

확실히 잠을 자지 않아서 피곤한 상태긴 한데, 이번 던전은 켠왕이라 게임을 끌 수도 없었다.
쉬더라도 여기서 쉬어야지.

"시, 시아야?"

그리고 침대로 가까이 다가온 시아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기까지는 그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날개가 살짝 빛나더니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치유 마법이었다.
마력 흐름을 볼 때, 마법보다는 스킬에 가까운 수준으로 효율이 높았다.
이건 세라족의 스킬 같은데?

"고마워."
"언니, 좋은 사람."

상태가 좀 나아지자, 몸을 일으켜서 나도 같이 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시아야.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대답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시아가 억지로 답할 필요는 없어."

이 시대는 이종족 노예 제도가 시작된 것이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럼 분명 시아도 원래의 가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찾을 수 있다면 찾아주고 싶었다.

"시아는 연구실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어?"
"연구실 이전?"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혹시 너무 어릴 때라서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실험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처음에는 친구가 같이 있었어."
"그건 언제 기억이야? 연구소?"
"응."
"있었다는 건 역시...."
"......."
"미안해. 괜한 소리를 했네."
"카네사...."

시아가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잘 떠오르지 않는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 카네사?
들어본 것 같은데
너무 본 지 오래대서 모르겠네
- 카네사가 누구지
- 큐브온 좀 보고올까

"너무 억지로 생각할 필요 없어."

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진정시키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루냐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좀 괜찮아요?"
"네, 밖은  정리 끝났어요?"
"그렇죠.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이라고 하던데요? 기존에는 층 클리어 후에 노예 제도 폐지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으니 비슷하게 흘러가겠죠."
"던전은  전에 끝나는 거죠?"
"네."

시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몰래 이번 미션에 관해 물어봤는데, 확실한 것은 잘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깨질거라고 했다.

"아, 아까 전투 중에 치셨던 곡은 뭐에요?"
"게임 노래요."

 워낙 이 세계에 무지하니까 내가 모르는 클래식 곡이겠거니 했는데, 게임 노래였구나.

"어떤 게임이요?"
"큐브 게임은 아니고, 옛날 게임이에요. 수르디아 연대기라는 RPG 게임의 브금이죠."

모르는 게임이다.
애초에 내가 그걸 아는  더 이상하긴 하지.

"시아야. 피아노 쳐 줄까?"
"피아노?"
"악기야."
"악기?"

루냐님의 말을 시아가 끝없이 되묻는 상황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상황이 귀엽네.

"가을님. 그럼  곡 뽑아주시죠?"
"제발 그냥 루냐라고 불러주시면  될까요?"

- 응 아니야
- 절대 가을이해
가을이는 어쩔 수 없지
- 정가을! 정가을!
- ㅋㅋㅋㅋㅋㅋㅋㅋ
- 루냐 오열
- 여기까지 침범당했네ㅋㅋ

채팅창에서 불타는 시청자들은 다들 가을이라는 별명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루냐님 포기하고 붕어빵단의 대의를 따르십시오."
"그게 어떻게 대의에요. 아니다, 전 그냥 닥치고 연주나 하겠습니다."

루냐님도 은근 놀리는 맛이 좋다.
이러니 루냐님  시청자들 상태가 그렇게 장난스러운 거겠지.

"와."

시아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연주 중인 루냐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시아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로 피아노 연주는 아름다웠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연주하고 있는 루냐님을 보면 다른 사람 같아요."

['쪼꼬훔쳐먹는루냐'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ㄹㅇㅋㅋ

"선생님은  이쪽 방송에 계시는 거죠?“

저분 루냐님 방송 지박령 아니었나? 아니면 링크 스트리밍을 켜 놓아서 그런가?
시아와 함께 루냐님의 연주를 듣고 있는데, 포카님이 방으로 들어왔다.

"뭐야. 치사하게 시아랑 하얀별님만 듣고 있어요?"
"포카도 전투하면서 질리게 들었으면서 뭘...."
"그건 다르지. 나도 전투에 신경 쓰느라 정신없었잖아. 그러니까 한  더!"
"포카가 원하면 해줄 수 있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오, 얘들아 가을이가 나 꼬신다. 솔직히 가을이는 씹가능이지."

포카님과 루냐님의 핀트가 어긋난 대화를 듣고, 한숨을 쉬면서 시아를 안아 들었다.

"언니?"
"우린 밖에 좀 구경하고 오자.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레지스탕스 내부에도 간단한 상점은 있었다.
구매는 돈이 아니라 레지스탕스 내부의 보급 포인트를 사용하는 방식이지만.

"뭐야, 설화님?"
"어, 하얀별님 벌써 돌아다니실 정도로 괜찮아요?"
"네, 시아랑 같이 뭐  먹을까 해서요."
"그런 거면 제가 전문이죠."
"네? 아니에요. 제가 고를게요. 설화님 추천은 좀...."

슬라임 젤리에 민트초코까지, 난 설화님의 입맛을 따라갈 자신이 없다.
솔직히 여기서라고 크게 다른 음식을 추천할 것 같지도 않아.

"아 드셔 보시면 생각이 달라진다니까요? 이게 식물형 몬스터의 과즙으로 만든 음료수인데...."
"그거 무슨 맛이죠? 현실 쪽이랑 비교해서."
"애플민트?"
"으악!"
"애플민트? 그게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아의 뒤에서 경악했다.
아니  설화님이 추천하는 음식들은 그런 틀을 벗어나지 않는 거냐고.

- 비명 찐텐ㅋㅋㅋㅋ
- 민트악몽이자너
애플민트 맛있지
이거 민트 혐오야
- 저거 맛있음 애플민트보다 맛있어
- 민트를 왜 먹어 진짜

그걸 시아에게 먹이려는 설화님의 손길을 막아내면서, 평범해 보이는 쿠키 몇 개를 골랐다.

"평범한 거로 가죠."
"방금그 과즙이 들어간 쿠키도 있어요!"

계속 괴식을 추천하는 설화님에게서 도망쳐서 시아와 함께 쿠키를 우물거리며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부 구조가 좀 익숙해지기 시작했네.
여기를 다 클리어하면 다시 올 일도 없겠지만.

"시아야?"

시아가 먹던 쿠키를 떨어트려서, 혹시 상태가 이상한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아, 저 애들...."

그녀의 시선이 함께 탈출했던 아이들에게 향했다.
얼마 전까지 다수가 의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이 의식불명이었다.

"아, 델?"

나에게서 뛰어내린 그녀가 갑자기 뛰기 시작하더니, 한 아이 앞에서 멈췄다.
뭔가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아델...? 저 애 이름인가?"

나는 꽤 긴장한 상태로 시아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장문의 후원 메시지가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런 미친'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큐브온 확인하고 왔는데, 카네사는 시아의 몸을 이루는 실험체 중 하나의 이름입니다. 카네사, 안네, 이시달, 시엘, 아델. 이렇게 다섯 명이에요.

"뭐?"

그리고 거기 적혀 있던 것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