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18장 - 흔해 빠진 판타지 이야기(1)
"아, 미친."
나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급하게 심플월드를 켰다.
게임 켜기 전에 통화라도 하면서 시작할 줄 알았는데, 바로 게임에서 모이는 거였다니.
"아, 하얀별님 1분 지각. 왜 이제 오세요."
"죄송해요.... 아니 애초에 저는 게임 안에서 만나는 건지를 몰랐다고요."
- ㅋㅋㅋㅋㅋㅋㅋㅋ
- 큐하 큐하
- 이 방에서 심플월드 공략을 볼 줄이야
- 여기 판타지였나
- 링크 스트리밍이 뭐지
- 이번 공략이 86층인가?
- ㅇㅇ판타지
탑의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멤버들을 눈으로 훑었다.
지난번 던전에서 함께한 멤버 그대로였다.
"86층 고고."
아까까지는 별생각 없었는데, 당장 눈앞에 상황이 닥치니까 조금 긴장되네.
"초반을 간단하게 브리핑하면, 저희는 소환되는 용사를 도울 용사 파티원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용사요? 이번엔 용사물이구나."
"네. 예상으로는 마왕을 쓰러트리면 90층이 끝날 것 같아요. 아마도?"
중간에 전멸하고 86층으로 초기화된 상태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어떤 진행인지는 모르는 상태라고 했다.
"용사는 총 두명인데, 그중 한 명만 용사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요."
"용사 시스템?"
"우리가 쓰는 게임 시스템이랑은 다르고, 그냥 86층 설정상 주어진 능력 같은 거죠."
"아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었다.
준비를 묻는 시스템에게 답을 고르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86층 미션
용사 파티에 합류(0/1)]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86층은 그냥 대화할 뿐이니까. 87층 가야 전투가 나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위를 살폈다.
우리 앞에는 마법진처럼 생긴 바닥이 빛나고 있었고 몰려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아, 이건 용사 소환이라는 거다."
"네다씹."
옆에서 가벼운 농담이 들리던 도중에, 바닥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강해지더니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그 순간 이곳에 있던 대부분이 그 인영을 향해 무릎을 꿇었고, 우리도 눈치껏 그 모습을 따라 했다.
"뭐, 뭐야 여기는...."
"......."
말없이 주변을 살피는 소녀 하나와 당황해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소녀 하나.
소환된 것은 그렇게 둘이었다.
'몸 장난 아니네.'
외모는 충분히 미소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느낌이지만, 자세히 보면 온몸에 자잘하게 근육이 완성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운동선수의 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가 용사고 이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요?"
아까 호들갑을 떨던 소녀가 설명을 듣고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상태창? 이건 또 뭐야...."
잠시 기다리자 용사 파티의 멤버가 될 예정이었던 우리가 그녀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자리도 만들어졌다.
"우리끼리 대화할 수 있도록 사람을 좀 물려주시겠어요?"
포카님이 조심스럽게 부탁하자 우리와 소환된 용사들만 자리에 남았다.
"후, 저 답답한 것들이 없으니까 좀 살겠네. 반가워요. 저는 포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왠지 닉네임 같은 이름.... 저는 이지연이라고 해요. 지연이라고 불러줘요. 이 옆은 제 절친인 서은이!"
- 닉네임 같은 이름ㅋㅋㅋㅋ
- 닉네임이 맞긴 하지
- 아ㅋㅋㅋ
- ㄹㅇㅋㅋ
- 어떻게 사람 이름이 포카버터칩ㅋㅋ
- 에바지ㅋㅋ
닉네임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과 이름을 보면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이 이세계에 소환되어 용사가 되는 내용인가?
"서은이나 서온은 쟤가 멋대로 부르는 별명이고 내 이름은 메구미. 니시 메구미."
"일본인? 앗...."
나도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우리는 지금 제국 산하에 있던 판타지 원주민으로써 활동하는 중이니, 만약 소환된 이들의 설정이 정말 한국인과 일본인이면 내 말을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 ㅋㅋㅋㅋㅋㅋㅋ
- 시작부터 트롤하네
- 이래야 하얀별이지
- 아ㅋㅋㅋ
- 니가 일본을 어캐아는데ㅋㅋ
- 판타지 세계 기본 교양이잖아ㅋㅋ
- ㄹㅇㅋㅋ
"맞아요. 그리고 저는 한국인!"
지연씨는 내 말실수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을 해왔지만, 메구미씨는 나를 무서울 정도로 노려보고 있었다.
'의심을 산 것 같은데.'
앞으로 아군으로 함께 해야 하는데, 시작부터 삐꺽거리는 느낌이었다.
"결국, 용사 시스템은 지연님만 가지고 계신다는 소리군요."
"그런 것 같아요."
"애초에 제가 알기로 용사는 한 명이었는데. 아마 소환 과정에서 메구미님이 말려든 모양입니다."
"그건 좀 아쉬워요. 저보다는 서온이가 더 잘 싸울 텐데."
"그래요?"
확실히 분위기가 무섭긴 하지만, 누가 더 잘 싸울 거라고 확신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서온이는 금메달이니까요. 저는 동메달이고. 아무래도 전 세계 1위는...."
"시끄러워. 결론은 마왕을 못 죽이면 네가 못 돌아간다. 그거잖아?"
"아, 왜. 난 내 친구가 금메달인 거 자랑하고 싶다고."
"......."
메구미씨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몸 때문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 진짜 운동선수인 모양이네.
금메달이라는 건 올림픽 이야기인가?
"오늘은 이런 상황에 당황스러우셨을 테니 좀 쉬세요. 내일부터는 저희가 함께하면서 용사님을 강하게 만들어 드려야 하니까요."
결국, 급하게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방을 나가고있는데 메구미씨의 혼잣말이 작게 들렸다.
"망할, 왜 자꾸 조금씩 바뀌는 거야....."
그리고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자세히 고민하기도 전에 다음 전개가 시작되었다.
[86층 미션 완료
용사 파티에 합류(1/1)]
"이거 설마 내일로 스킵되는 건가요?"
"네. 솔직히 여기 층은 날로 먹는 것 같아요."
"일본인, 큭큭...."
"아, 진짜 죄송해요. 생각 없이 말 뱉는 거 고쳐야 하는데."
지연씨가 잘 넘어가 줘서 다행이지, 정말 제대로 분위기를 조질 뻔했다.
[87층 미션
마왕성에 대한 정보 수집(0/1)]
"전에는 이 단계에서 습격당하고 털렸지."
"아니 초반부터 그런 애들 나오는 거 에바라니까. 아마 쓰러트리는 게 의도한 공략은 아니었을 거야."
우리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지연씨와 메구미씨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마왕성에 들어갈 방법부터 찾아야 해요. 마왕성은 특수하게 숨겨져 있으니까 그냥은 접근할 수 없거든요. 그리고 그러면서 지연씨는 레벨업을 해야 하죠."
"레벨업이라니까 게임 같네. 이 시스템이 제가 마왕군 소속을 쓰러트릴 때마다 레벨을 올려서 강하게 해준다는 거죠?"
"네. 그럼 일반적인 사람들의 한계를 넘어 강해질 수 있어요. 그래서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용사님인 거죠."
어디서 본 것 같은 설정으로 돌아가지만, 지금 해야 하는 것은 확실했다.
마왕성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겸사겸사 지연씨가 레벨을 올린다.
"아뇨. 저는 반대입니다."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연 건 방금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메구미씨였다.
"마왕이 우리가 쓰러트려 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 겁니다. 용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를 죽이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마왕성에 대한 정보를 캐다 보면 우리를 처리하기 위해 나서리라는 것이 설명의 골자였다.
"그러니까 우선 우리는 최대한 가능한 만큼 지연이의 레벨을 올려주는 것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 오
- 전에는 이런 말 안했는데?
- 하얀별님이 트롤해서 못미더워졌나?
- 틀린 말은 아님
- ㄹㅇ 마왕이 기다려주는 클리셰 자체가 이상한거지
- 못미더워졌대ㅅㅂㅋㅋㅋㅋ
- 가능성있다ㅋㅋ
아니 이게 왜 내 탓이야.
하여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메구미씨의 주장이 타당하긴 했다.
다만 그 방법을 따르기에는 문제가하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레벨업은 전투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려면 결국 마왕측과 싸워야 하는데요?"
"마왕군과 싸우지 말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마왕성을 공격한다는 걸 벌써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평범하게 전쟁에만 참여하면서 지연이의 레벨을 챙기는 방향으로 가면...."
논리적으로 정리된 설명 때문에 확실히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까부터 밀려오는 의문은 확실해져 갔다.
'이게 이럴 수 있는 건가?'
과도한 의심일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이세계에 소환된 사람치고는 너무 차분했다.
그녀는 상황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운동선수라서 작전 수립에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찝찝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메구미님의 말이 맞아요. 레벨업은 안전하게 하고, 가능하면 용사에 대한 정보는 흘리지 말라고...."
"아뇨, 용사에 관한 정보를 통제하지 말라는 건 먹히지 않을 것에요."
시리엘님의 의견에 포카님이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미리 비슷한 건을 이야기했지만, 용사를 이용해서 인류의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어요."
마치 용사 소환 전에 물어봤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난번 공략에 해봤다는 뜻이겠지.
'역시 이상한데.'
그 이야기를 하는 포카님을 바라보는 메구미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시리엘님의 의견이 불발되어서 저런 표정이라기에는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마치,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가설을 확인한 것 같은 반응인데.'
메구미씨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키면서, 조금씩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서 조용히 포카님에게만 궁금한 부분을 물어봤다.
"포카님, 혹시 저번 공략에서정보에 접근했던 적이 있나요?"
"네. 거기서 전멸했지만요."
"그러면 거기만 피해서 전투지를 고르면되지 않나요?"
포카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있는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다들 여기 보시면 마왕군에게 당해서 빼앗긴 영토는 붉은색, 빈번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어요."
그리고 노란색이나 붉은색 지역에서 몇 개를 X표 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메구미님이 말한 대로 일단 지연님이 강해지시는 것이 먼저라고 하면, 저 X표친 부분은 좀 위험하다 싶은 곳들이니 최대한 나중에 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본래라면 가장 정보가 있을 가능성이 커서 먼저 찾아갈 장소였다고 했다.
하지만 작전을 안전 위주로 가기 위해서 여길 마지막으로 미루자는 설명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들 이렇게 최대한 안전하게 가는 방법이 정답이라 판단했고, 그렇게 공략을 진행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다음은 지금 수준 확인이에요. 두 분이 실력이 어떤지를 봐야 하거든요. 저희야 서로 대충 알지만.... 용사님들은 그게 아니니까요."
"실력?"
"네. 지연님이야 레벨업을 하면 해결되겠지만, 메구미님은 용사 시스템이 없어서 평범하게 훈련하셔야 합니다."
"맞네, 그럼 하얀별님이 한 번 대련해 주실래요?"
"대련이요?"
가볍게 전투력을 시험해 보자는 소리였다.
그런데아무리 그래도 상황상 메구미님은 방금 이세계에 소환된 일반인인데?
"어, 네."
어쩌다 보니 수락은 했지만,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일단 전투 센스나 재능은 나보다 좋을 수 있어.'
상대방은 무슨 종목인지는 몰라도 금메달리스트니까.
물론 종목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아까 지연씨의 발언을 생각하면 전투에 영향이 있는 종목일 것이다.
"어, 뭐야 잠시만!"
그리고 대련이 시작되자, 메구미씨가 아주 깔끔한 몸놀림으로 달려들었다.
'예측이 전혀 안 되는데?'
움직임의 빠른 변화와 중간중간 섞여 있는 블러핑이 너무 절묘했다.
스펙상 내가 우위에 있음에도 오히려 내가 움직임을 계속 놓쳤다.
"와 이거 오러 아니었으면 내가 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공격이 굉음을 내며 막혔다.
뭐야 이거 오러를 쓴 공격이었는데?
"뭐?"
나는 그녀의 손에서 정갈하게 빛나고 있는 오러를 보며 경악했다.
마법을 쓸 줄 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