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18장 - 흔해 빠진 판타지 이야기(3)
"일단 인원을 나누어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메구미씨에 대한 문제가 중요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공략의 키카드인 지연씨를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지연씨를 데리고 다 같이 이동하는 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가능하면 지연씨가 지금 상황에 대해서 몰랐으면 했다.
'눈치로는 지연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까. 괜히 메구미씨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어.'
그것도 그렇고 사실 메구미씨와 서로 싸우게 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가 시간여행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예상했고, 그 목표가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계획을 오히려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애초에 가는 인원은 메구미씨를 서포트 하기 위한 인원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
효율적인 인원 배분을 잠시 고민하던 포카님이 나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하얀별님, 손에 들고 최고속도로 날 수 있는 인원수가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잠시만요? 좀 잡아보실래요? 흠...."
짧은 거리로 속도를 테스트하자 2명부터는 속도 차가 느껴질 정도로 느려졌다.
이걸 물어보는 게 맞겠지?
"1명 같아요."
"그럼 일단 하얀별님이랑 해서 총 2명이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이쪽에 연락해 주면 될 것 같아요."
"그럼 제가 같이 갈게요."
시리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원했다.
"오케이. 급하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 마력은 좀 손해 보겠지만 바로 도와주러 갈게요."
"네."
나는 방향을 확인하면서 시리엘님을 잡은 채로 날아올랐다.
마력을 사용해서 비행 속도를올리자 금방 지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체험모드ㄱㅇㄷ
- ㅗㅜㅑㅗㅜㅑ
- 변태놈들ㄷㄷ
- 개빠르네
- 제발 채팅 치지말고 조용히 즐기렴
- 이게 사람의 온기라는 건가
- 역겹게하지 마라
"설마 시리엘님 안고 있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사람 안고 날아다닌 게 처음도 아닌데."
내 말에 그 대부분 남자였다는 이야기가 나와 순간적으로 무슨 소리인가 했다.
그러니까 여자를 안고 있다는 감각이 문제라는 건가?
'확실히 그런 차이는 있지.'
나도 처음에 포카님 안을 때는 많이 당황스러워했으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처음은 아닌데?
"포카님은 남자 아니잖아."
- ?
- 그게 어캐 여자임
- 마왕님은 남자지ㄹㅇㅋㅋ
- 노카운트입니다
- 아 에바지
- 포카가 어캐 여자임ㅋㅋ
- ????
- 선넘네
시청자들의 성적 본능을 넘어선 인성질을 보면서 감탄했다.
사실 전부 이 드립을 위해 빌드업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이쯤인가?"
시리엘님과 잡담을 하면서 이동하자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꽤 거리가 있는데, 메구미씨는 혼자서 대체 어떻게 이동한 거야?
우리는 지도를 확인하며 도착지를 다시 점검했다.
"마을이긴 한데, 꽤 오래전에 마왕군에 점령된 곳이네."
"쉿."
마을에 근접해서, 천천히 다가가다가 시리엘님의 신호에 숨을 죽였다.
바로 앞쪽에서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전투 중인 것 같은데?"
혹시 들킬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몸을 숨겨가며 소리가 들리는 방향에 도착하자 괴물들의 시체가 주변에 널려있었다.
"와, 다 죽어있네."
가끔은 잘린 채로도 기괴하게 움찔거리는 것이 있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라 이런 건가?
"여기인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시체들이 생산되는 중심에 도착하자 메구미씨가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 ㄷㄷㄷㄷ
- 와 미쳤는데?
- 아까 봐준거였네
- 깔끔한거 뭐냐고
- ???
- 내가 뭘 본거지?
나는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에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메구미씨가 괴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표현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니, 어?"
내가 매드무비를 보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한결같이 간결하면서도 미려하게 느껴졌다.
"검술? 아니, 검술은 아니지."
무언가의 검술이라기에는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은 최소한의 마력을 사용하기 위해서인지 계속해서 형태가 변화하고 있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변화하는 무기와 그 무기를 무엇보다도 효율적으로 다루게 하는 그녀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쾌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까 나는 봐준 거구나."
아니, 그건 그렇다고 쳐도 무슨 싸우는 모습이 저렇게 아름답지?
무엇보다도 그것이 실용성이 넘친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예전에 비슷한 걸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금방 깨달았다.
포카님이 너맞손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내용의 클립을 볼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하여튼 그 모습에 멍하니 집중해 있으니, 금방 괴물을 모두 처치한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나와."
음, 너무 대놓고 쳐다보고 있기는 했지.
구경하기에 바빠서 제대로 숨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 앗
- 들켰누ㅋㅋ
- 와 그 많던 몹 다죽었네
- 말하는 톤 개무섭네
- 간지 미쳤네
- ㄷㄷㄷ
블러핑일 가능성 때문에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숨을 죽이자, 곧바로 이쪽으로 뛰어들더니 나를 베어내려고 했다.
"그만."
내가 그 공격에 반응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시리엘님이 공격을 검으로 막아냈다.
"하, 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직접 찾아오셨네."
"찾아온 건 맞는데, 너무 화려하게 맞이해 주시네."
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얼어붙은 것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갑자기 끼어든 건 죄송해요. 하지만 메구미님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에요. 오히려 도울 수 있는 건 도울 생각이에요."
"하, 공격을 받은 상태로 태연하게 그런 말이나 하네. 제정신인가?"
메구미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마법을 해제했다.
적대는 멈춘 거로 생각해도 되겠지?
"애초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 들어나 보겠습니다."
"메구미님은 혹시...."
나는 진정하면서 말을 골랐다. 민감한 주제인 만큼 물어보기가 꽤 어려웠다.
"메구미님은 시간을 반복하고 계신 것 맞죠?"
그 순간 메구미씨의 움직임이 돌이 된 것처럼 멈췄다.
그리고 무섭게 나를 노려보면서 마법을 다시 전개했다.
"무슨 근거로?"
내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시리엘님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꺼냈다.
"그렇게 회귀자라고 팍팍 티를 내고 다니면서, 들키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을 거 아냐?"
"저, 시리엘님 조금만 말을 이쁘게...."
"언니는, 아니 하얀별님은 가만히 있어 보세요."
- 말하는거 봐ㅋㅋㅋ
- ㄹㅇ시원하다
- 이게 대화지ㅋㅋ
- 하얀별은 조용히 하고 있어!
- 있어보세요
- 엌ㅋㅋㅋㅋㅋ
시리엘님의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쉰 메구미씨가 일본어로 무언가를 궁시렁거리더니 다시 한국어로 말했다.
"그럼 당신들이야말로, 대체 뭐지? 내가 그 회귀자라는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왜 사람도 바뀌고 같은 사람이라도 장비가 바뀌는 건데? 심지어 나머지 셋은 봤던 사람들이지만 당신들 둘은 이번에 처음 보는 얼굴이야."
메구미씨가 속사포처럼 쏟아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는 정말로 과거로 돌아가며 지난 공략의 기억을 온존한다는 소리였다.
'이제까지 탑 공략의 재도전에서 그 탑에 속한 NPC들 본인이 반복하는 것이 정답이었다는 소리네.'
그래서 지난 층에서 시아가 레나씨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가?
"크게 다를 건 없지. 네가 시간을 되돌아가듯, 우리도 이 세계의 구원이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거든. 당연히 여기를 돕는 인원도 바꿀 수 있고."
"맞아요. 만약 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을메구미님이 알고 있다면 그걸 도우려고 지연씨에게 말하지 않고 왔어요."
"나만 이 지랄을 반복한 건 아니라는 소리네. 좋아 이해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쉰 그녀가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인가?
"여기는?"
메구미씨를 따라서 가정집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그녀는 주방에서 익숙하게 차를 내리더니 식탁에 내려놓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내 설명을 다시 할게. 나는 올림픽 마전종목의 은메달리스트였던 니시 메구미. 이제는 금메달이지만."
그 말은 시간을 되돌아가기 전에는 은메달이었지만, 시간을 돌아가면서 금메달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올림픽 메달이 바뀌었다는 건, 여기 오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는 소리잖아요."
"그렇지."
"그럼 왜 매번 다시 여기에...."
"내가 오지 않아도 지연이는 혼자서라도 여기 소환될 테니까. 위치랑 상관없이 지연이 근처에 소환진이 나왔거든."
"네?"
용사 시스템을 받는 지연씨만 소환의 대상이기에, 원한다면 메구미씨는 소환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소리다.
"애초에 내가 과거로 돌아가는 트리거는 내 죽음이 아니라 지연이의 죽음이야. 내가 혼자 살아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지."
"글쎄, 너는 회귀 트리거가 그게 아니었더라도 지연님을 살리려고 했을 것 같은데."
시리엘님의 말에 메구미씨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난 나 자신이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이타적이라는 게 아니야. 그만큼 네가 지연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지."
"닥쳐. 그 바보의 어디가 좋다고."
"솔직하지 않네."
메구미씨는 계속 장난을 거는 시리엘님에 지쳤는지 그녀를 애써 무시하며 나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같이 있다가 덤으로 우연히 소환된 거였어. 그때는 도와주는 파티원도 지금이랑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고."
아마 그때는 다른 파티가 공략을 시도했거나, 누군가의 공략이 아니라 미리 게임의 스토리로써 진행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실패했겠군요."
"마왕 본인이 우리 파티를 척살했지. 우리 같은 쪼랩 파티를 마왕 본인이 끝낸다니, 그 당시에는 무섭기도 했지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마왕 본인이...."
아까 초반 진행에 대한 계획에서 그녀가 조심하려고 했던 것은 모두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쓸대없이 마왕이 현실적이네.
"마왕은 그냥 무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신중한 면모도 조금 있어. 그걸 어떻게 회피해야 할지 알아내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 정확한 방법을 확신한 것도 지난 실패 덕이니까."
"지난 실패라면, 아마 멤버의 세 명이 지금이랑 같은?"
"그래 맞아."
그녀는 매 회차를 제물처럼 바쳐가며 이 세계에 대한 공략을 만들어 왔다.
그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도 중에서 운 좋게 모든 마왕군을 전멸시키고 마왕에게 도달한적도 있어."
"정말요?"
그 말에 거기까지가 공략 멤버 없이 스토리로 전개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88층부터는 클리어 이력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실상 올릴 수 있는 레벨은 모두 올렸지만, 그래도 역부족이었지. 지연이 레벨이 99레벨이었어, 100레벨에 도달하기에는 경험치가 꽤 부족했거든."
"부족했다고요? 전부 잡았는데?"
"어. 그리고 레벨 10마다 확실하게 강해지는 것이 용사 시스템의 특징이니까, 100레벨도 비슷할 거야. 그래서 마왕을 잡는 건 100레벨에 도달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때부터는 어떻게 해야 추가적인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을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조건은 간단하지만, 그 부족한 경험치를 채워줄 만한 적은 잘 없었어. 마왕만큼은 아니라도 아주 강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 뒤에 들려온 해결책은 아무래도 내가 이해할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결국, 찾아낸 해결책이 나야. 마지막에 용사 파티를 배신하고 마왕측에 붙을 생각이고, 그럼 지연이는 100레벨에 도달할 수 있겠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멍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자신이 경험치가 되어서 희생하겠다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