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18장 - 흔해 빠진 판타지 이야기(4)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그건 너무...."
나는 메구미씨가 희생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아서 뭔가 반박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내 말의 일부를 긍정한 메구미씨가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정말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더라고, 나 말고는 이 씨앗의 적합자가 거의 없는 것도 그렇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에 지니고 있던 검은색의 씨앗을 꺼내 들었다.
"이 씨앗을 몸에 심으면 마기에 잠식되는 대신 대량의 마력을 얻을 수 있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잠식되어 괴물이 된다나 뭐라나?"
다른 방법을 찾자고 설득하려고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도중에 메구미씨는 설명을 마무리했다.
"하여튼 이걸 내 몸에 심은 다음에 마왕군 편에 서면 지연이가 얻을 경험치가 딱 맞을 거라는 계산이야."
내가 그 방법에 대해서 뭐라고 하려는 순간 시리엘님이 대답했다.
"협력할게. 지연님을 포함해서 다른 멤버들에게도 말하지않겠어."
"시리엘님!"
나는 저 설명을 듣고도 바로 협력하겠다고 말한 시리엘님에게 경악했다.
나만 저 계획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얀별님. 하얀별님이 이 방법을 어떻게 생각하건, 저 녀석이 진지하게 고민해서 판단한 결과에요. 우리가뭐라고 훈수 둘 자격은 없어요. 존중해줘야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확실히, 직접 자신을 내던지며 결말에 도달하려는 그녀의 각오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은 없었다.
만약 메구미씨까지 구할 방법을 내가 찾아낸다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주장을 펼칠만한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은 알겠어요. 뭐 도와드릴 것 있어요?"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모르는 척해주는 것으로 충분해. 그리고 이거."
"이건?"
그녀가 목걸이로 만들어져 있는 보석 하나를 내밀었다.
보석이 살짝 검붉게 빛나서 불길하게 느껴졌다.
"마왕성에 돌입하는 방법."
"아."
[87층 미션 완료
마왕성에 대한 정보 수집(1/1)]
그 보석을 받는 순간 미션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흐릿해지는 주변의 모습에 아차 싶었다.
"망할, 이것도 스킵 걸려 있어?"
- 배신을 이렇게 써먹어?
- 이게 스킵이네
- 와ㄷㄷ
- 게임 악랄한거 보소
- ???
- 희생 오반데
- 이게 이렇게 깨지네
심플월드의 탑 공략 중에는 층이 바뀌면 시간과 장소가 생략돼서 다른 곳에서 시작하는 때도 있다.
그게 이번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88층 미션
마왕성에 돌입한다(0/1)]
"뭐야. 잘 해결했나 봐?"
지연씨와 메구미씨를 제외한 공략 멤버 전원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다들 방송을 종료하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계속 방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성으로 돌아왔네?"
"스킵이라니, 불안한데."
가능하면 메구미씨도 같이 클리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전개가 스킵당하면 그런 방법을 찾을 시간이 줄어든다.
'마치 그런 방법은 없다고 못 박아 놓은 것 같아.'
메구미씨가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는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녀가 희생해야만 클리어 할 수 있다고 미리 정해놓은 것만 같았다.
'너무 현실적이라 잊게 되지만, 이건 게임이니까.'
게임은 설계자가 있기 마련이고, 그설계자가 요구하는 방향이 이렇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건 그 부분이겠지.
'게임의 방향을 왜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해둔 거야?'
최대한 기분을 티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미션이 마왕성 돌입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대로 진행하면 되는 건가?
"그래서 마왕성은 뭐로 들어가요?"
"자세한 건 모르겠고, 이걸 쓴다는데...."
포카님에게 메구미씨에게 받은 보석을 보여줬다.
다시 봐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네.
"목걸이?"
"걸어볼까?"
"네?"
설화님이 목걸이는일단 걸어보는 것이 국룰이라고 생각한다면서루냐님에게 걸려고 했다.
"아, 싫어!"
"포카 언니!"
"소난다, 가을이 잡을게."
"소는 못 날아! 악!"
나는 높은 텐션으로 장난을 치는 그 모습에 어울리지 못하고 애꿎은 내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내 텐션이 너무 떨어졌네. 정신 좀 차려야지.
"다들 하이!"
그리고 그때 지연씨가 들어오면서 크게 외쳤다.
옆에 메구미씨가 같이 있나 확인해 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뭐 하고 있었어요?"
"이거 목걸이 채워보고 있었어요. 어울리죠?"
"오, 이쁘다. 가을님이랑 딱인데?"
"제발 루냐라고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잘 어울려요. 루냐님!"
"아니...."
- ㅋㅋㅋㅋㅋ
- 이제 NPC에도 농락당하네
- 개웃기네
- 지연이도 꽤 강적이야ㅋㅋ
- 해맑은거ㅋㅋ
- 악의 없이 사람패는게 루냐급인데
- 한숨ㅋㅋㅋㅋㅋ
지연씨까지 높은 텐션으로 장난에 참여하자 금방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지연씨 반응을 보면큰 문제는 없었던 모양인데....
나는 이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지연씨에게 물었다.
"저기 지연씨, 혹시 메구미씨는...."
"아, 서온이요? 서온이도 금방 내려온다고 했는데?"
그냥 조금 늦을 뿐이고, 아직 합류해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간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다행인가?
"어, 서온아!"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구미씨도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모였으니 곧 출발할 거라는 예상이었지만, 은근 장난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 지금 생각난 건데.... 우리 말 놓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 어때요? 나이 차는 조금 있지만, 앞으로 계속 싸워야 하는데 말도 줄일 겸!"
그 와중에 지연씨가 다 같이 말을 놓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전투 중에 반말을 쓰는 것이 편하다는 핑계긴 했지만, 그냥 지연씨가 그러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럴까? 사실 하얀별님도 안 지 오래된 것 같은데 말 너무 안 놓긴 했어."
"하얀별님은 어때요?"
"저는, 뭐.... 큰 상관은 없는데요."
내가 워낙 말을 안 놓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판이 깔렸을 때 놓지 않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하얀별님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미공개였나?"
나는 아연씨의 나이를 생각해봤다.
아마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던 거로 기억하니까 20살인가?
"그렇긴 한데, 공개해도 상관은 없어요. 제가 아마설화님보다 두 살 어렸나? 그럴 거예요."
"와, 레전드네. 아무리 봐도 설화가 더 어려 보이는데."
"설화님이 동안이긴 하죠."
그나저나 내가 시리엘님은 나이를 모르네.
전 아발론 크루는 전부새싹위키에서 확인해서 기억하는데.
"저 19살이요. 그럼 하얀별님이 언니네요. 별이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어, 응....“
"별이 언니! 나도 불러줘."
시리엘님이 꽤 텐션이 올라갔다.
이거 뭐라고 불러야 하지? 시리엘이라고 부르긴 애매하니까 리엘?
"응, 알았어 리엘아."
여기까지는 된 것 같고, 지연씨와 메구미씨는 아연씨와 같은 20살이라고 했으니까 나머지가문제다.
'솔직히 좀 그런데?'
반말을 듣는 것은 별생각이 없지만, 내가 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원래 다 동생일 나이대인데 무려 언니나 오빠로 부르는 건 난이도가 너무 높잖아.
차라리 형 누나면 그나마 낫지.
"아, 왜 그렇게 초롱초롱 바라보세요."
포카님과 설화님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언니는 너무 어색한데?
"이걸 안하네. 아...."
고민하다가 결국 가장 만만한 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나만 아픈 것보다는 역시 남까지 괴롭혀야지.
"가을 언니?"
"아, 가을이는 어쩔 수 없지."
"아니 왜 나야!"
죄송해요. 만만한게 루냐님이었습니다.
오히려 남자한테 언니라고 부르는 건 장난치는 느낌이라 할만한데?
"언니는 오바고, 포카형까진 가능할 듯. 제가 언니라는 말에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 루냐 가만히 있다 맞았네
- ㅋㅋㅋㅋㅋㅋㅋㅋ
- 포카는 형이 맞지
- ㅇㄱㄹㅇㅋㅋ
- 어캐 포카가 언니임
- 포카형은 ㅇㅈ이지
- 그럼 설화는 눈나임?
"설화님은 누나라고 부르라고?"
"에반데. 나도 언니라고 불러줘!"
"좋아하시는데? 설화눈나...."
어떻게든 장난치듯 넘길 수 있었다.
앞으로도 뭔가 이런 호칭을 붙여야 한다는 건 좀 걸리네.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슬슬 아연씨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남자로 살던 시절의 사고방식에 더 익숙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 시절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음, 그럼.... 메구미?"
"그래 그렇게 불러. 지연아 슬슬출발 준비나 하자."
까칠하게 굴고는 있지만, 지연이가 하자고 한 것이라 그런지 메구미도 분위기에 맞춰 따르고는 있었다.
'정신이 없긴 했지만, 어느새 나도 텐션이 돌아왔었네.'
대충 호칭 정리가 끝나자, 다들 메구미의 의견에 동의하듯 출발할 준비를 했다.
뭐, 준비라고는 해도 그냥 소모품 체크 정도긴 했다.
"오케이. 지금 지연이 레벨이 얼마지?"
"나 지금 83."
마지막으로 우리가 확인했을 때보다 레벨이 올라가 있었다.
아마도 스킵된 시간 동안 올라갔겠지.
'그나저나 스킵되면 그동안 우리 행동은 어떻게 정해지는 거야?'
지연이랑 메구미의 반응을생각하면 별로 이상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궁금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너무 뜬금없어서 참기로 했다.
'나중에 메구미한테 물어봐야겠다.'
우리의 묘한 부분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메구미가 적격이니까.
그리고 메구미가 희생하지 않고 경험치를 채울 방법도 생각해 봐야지.
"이쪽 맞지?"
"어."
메구미가 알려준 루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느낀 것이 있어서 물어보았다.
"여기 그때 그 마을 아니야?"
"맞아. 애초에 여기가 입구기도 했던 거지. 그래서 여기가 위험했던 거고."
지난 공략 도중에 급습당한 이유가 이거였다는 소리다.
애초에 적이 마왕성 코앞까지 왔으니 상대방도 제대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게 된 거였구나...."
가을 언니의 목에 걸려 있던 보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주변 광경이 살짝 변하기 시작했다.
이쪽이 길이었던 모양이네.
"온다."
그리고 마왕성에서도 침입자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우르르 병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지성체도 많이 보이네."
슬슬 명령체계에만 보이던 지성체 마왕군들이 병력으로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난이도가올라갔다는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후...."
버프를 위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으면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나도 이제는 서브탱 역할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야, 이제 포카 언니가 둘이라고 해도 믿겠다."
방금 설화님의 말만큼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더 없겠지.
지연이와 포카님의 화력이 미친 듯이 정면을 쓸어버리는 장면은 아군인데도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 어우 화려한거 봐
- 전체적으로 파티 수준이 너무 높다
- 압승이네ㅋㅋ
- 80렙이 이런데 99렙이 마왕 못깼다고?
- ㄹㅇ마왕이 얼마나 쌔길래
- 일단 88층은 낙승일 것 같은데
- 마왕이라니까 포카랑 햇갈리네
"다친 사람은, 없네."
메인은 힐러인 만큼 주기적으로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대부분은 별문제 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나마 다칠만한 상황은 가을 언니랑 내가 탱킹으로 넘기고 있고.'
탱커의 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서브탱 역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짜 스무스하네. 여기 마왕성 맞냐?"
"이건 우리가 오버스펙으로 온 거지."
"그렇긴 해."
병력을 대부분 처리하고 마왕성으로 들어서자, 마왕성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왕궁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화려한 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88층 미션 완료
마왕성에 돌입한다(1/1)]
"다음 미션은 뭐려나."
그때, 말없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메구미가 눈에 들어왔다?
"윽...."
"어디 다쳤어? 괜찮아?"
내가 회복을 시켜줬지만,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목 부근에서 눈동자 비슷한 것이 떠졌다가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