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18장 - 흔해 빠진 판타지 이야기(5)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저게 아까 보여줬던 씨앗을 심은 건가?
- 으악 개징그러워
- 눈동자 국룰이지ㅋㅋ
- 저게 씨앗인가
- 눈을 뜨거라....
- 기생ㄷㄷ
- ㅗㅜㅑㅗㅜㅑ
확실히 저런 반응을 보일 만큼 눈동자의 모습은 기괴하고 징그러웠다.
메구미 자신도 눈동자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처럼 눈동자의 움직임에 맞춰 표정을 찡그렸다.
"......."
"괜찮아? 좀 쉴까?"
"아니, 이제 괜찮아."
다행히 고통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는지, 메구미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나에게 답했다.
그리고 방금까지 목에서 깜빡이던 눈동자가 닫히더니 얌전해졌다.
감쪽같이 사라져서 그런 것이 있었다는 것이 착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괜찮은 것 맞지?"
"응. 간부들 전부 처리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어."
"다시 묻는 거지만, 꼭 이렇게 해야겠어?"
"얀별이 너는 지연이랑 좀 닮았다니까. 쓸데없이 착해 빠져서는...."
메구미는 내 질문에 피식 웃더니 내 이마를 툭 쳤다.
그리고는 우리의 앞쪽에서 걸어가던 지연이에게 합류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다른 방법은 보이질 않네.'
솔직히 다른 방법을 찾을 만한 타이밍이 전혀없었다.
그렇다고 상황을 미루는 것은 어렵다고 메구미가 미리 경고했었다.
너무 지체되면 위험하다고 했었지.
[89층 미션
사대천왕을 모두 처치(0/4)]
"사대천왕?"
"아까 이야기 나왔던 간부들인가? 네 명이라고 했으니까 걔들이 사대천왕이겠지."
이전에 메구미에게 들었던 설명을 생각하면, 아마도 이 간부 넷을 처리한 직후 지연이의 레벨이 99가 될 것이다.
'거기서 부족한 마지막 경험치를 위해 메구미가 희생하려는 거고.'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연속적인 보스전을 치르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 보스들도 NPC라 그런지 사고가 유연해서 이전처럼 간단하게 처리하기는 힘들었다.
'역시 심플월드는 느낌이 확 다르네.'
기존에도 보스를잡는 큐브 게임은 많이 진행했지만, 대부분은 패턴을 공략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간부들은 마치 다른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것처럼 사고가 유연해서 패턴이 굉장히 복잡했다.
경험이 많은 플레이어와의 PVP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얀별아!"
나를 부르는 소리에 급하게 날아가서 힐을 때려 박았다.
난이도가 높아진 만큼 피격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고, 피격으로 쌓인 데미지는 힐로 해결해야 했다.
피해가 들어간 사람들에게 회복을 넣고, 메인 탱커인 루냐님의 체력을 집중적으로 관리한다.
이런 힐러의 역할도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서 서브탱까지 할 정신은 없었다.
"후, 수고했어."
[89층 미션
사대천왕을 모두 처치(2/4)]
내가 조금 약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사실 공략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제대로 난이도가 있는 전투를 진행하면서 전투에 대한 감은 나날이 늘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 다들 합 잘 맞네
- ㄹㅇ너무 잘하는데
- 루냐 피아노 넘 좋다
- 내가 하는거랑 같은겜 맞냐
- 힐하느라 서브탱을 못하네ㅋㅋ
- 원래 공략파는 다른겜이야
- 아 이거 그렇게 잘하는거 아닌데
"남은 건 둘이네."
다음 전투를 위해 정비를 끝내고 계속 진행했다.
나는 그 와중에도 혹시 히든보스 같은 것이 있을까 궁금해서 마왕성의 수색에 집중했다.
혹시 히든보스가 경험치를 충분히 부여해 준다면 메구미가 희생할 필요성도 사라지니까.
'역시 없네.'
간단한 힌트 정도라도 있었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듯해 보이는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준비해."
메구미의 말을 듣자마자 주변을 급히 경계했다.
마왕성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메구미일 테니, 그녀가 준비하라고 했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정답일 터였다.
"둘!?"
날아드는 인영이 둘이라는 느낌을 느끼자마자 뛰어들어 공격을 막았다.
하나는 루냐님이 막겠지만, 다른 하나는 내가 막아야만 했다.
당장 탱킹 역할을 할 사람은 우리 둘이 끝이니까.
"윽...."
제대로 막았다고 생각했는데도 팔이 얼얼하게 데미지가 들어왔다.
바로바로 회복시키면서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이게 둘이네."
둘이서 하나로 취급되는 보스인지, 아니면 그냥 보스 둘이 같이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갑자기 타점이 두 개가 되면서 전투 양상이 많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둘이서 튀어나오는 건, 좀 당황스러운데."
메구미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언니 지금 틈에 탱커 관리!"
메구미와 리엘이 근접 공격으로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에 루냐님에게 달려가 회복을 시전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면서 시간을 벌어준 둘의 체력도 보충해줬다.
"오케이!'
꽤 빡빡한 전투가 진행되다가, 메구미가 적 하나를 온전히 처리하자 난이도의 체감이 급감했다.
이번엔 진짜로 좀 어려웠던 것 같은데.
"지연이랑 포카 화력이 이런데도 난이도가 위험하네. 그나마 메구미까지 화력에 집중에서 살았네."
"둘이 같이 나오니까 난이도가 확 오르네. 크게 다친 사람은 없지?"
일단 마력이 많이 빠진 상태라서 마력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력의 회복을 위해서 다들 휴식에 집중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나타났다.
[89층 미션 완료
사대천왕을 모두 처치(4/4)]
"이거 정말 두 명이었네? 그럼 이 다음은 마왕인가?"
그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메구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있던 그녀가 일어나더니 지연이에게 물었다.
"지연아 지금 레벨은?"
"방금 레벨업 했으니까 이제 99이네."
이전에 메구미가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왕을 눈앞에 둔 지연이의 레벨은 99였다.
100레벨에서 확 강해질 수 있는 용사 시스템의 특성상 마왕전 이전에 추가적인 전투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마왕을 이길 수 없다.
- 벌써 그 시간이네
- ㅠㅠㅠㅠ
- 진짜로 경험치가 딱 부족하네
- 근데 그럼 마지막층은 미션이 뭐임
- 교주님도 표정 죽었네
- 그러게
- 앗 아앗
- 결국 이렇게 가나
메구미가 미리 말했었던 배신의 타이밍은 지금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마왕이 아니라 메구미라는 소리였다.
"그래, 그러면 여기까지네."
"뭐가?"
그리고 그 순간 소름이 끼치는 비명이 메구미의 목에서 귀를 찌르듯 들려왔다.
아까 봤었던 눈동자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 어우씨
- 개징그러
- 귀갱에반데
- 아 깜짝이야
- 개무서운데
- ㄷㄷㄷㄷ
"이게 뭔...!"
다들 당황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표정이 멍해져 있는 건 당연하게도 지연이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언질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90층 미션
이지연의 레벨이 100에 도달 (99/100)]
"다들 준비해!"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고 있었던 리엘이 냉정하게 말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마력을 일으켰다.
그 순간 메구미의 공격이 루냐님을 내려찍었다.
그런데 분명히 공격을 제대로 막았음에도 주르륵 밀려났다.
"뭔 데미지가!"
아까까지 싸운 간부보다 훨씬 강했다.
결국은 루냐님이 연주를 끊고 몸을 추스를 정도였다.
"괜찮아?"
"어."
이런 와중에도 지연이는 갑자기 진행되는 상황에 당황해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지연아! 정신 차려!"
메구미가 지연이를 공격하기 위해 다가왔지만, 지연이는 멍하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내가 그쪽으로 날아가서 공격을 대신 막았다.
"아악!"
"얀별아!"
- 이런ㅁㅊ
- 딜 실화냐
- 이거 그래도 탱킹셋팅아님?
- 탱셋팅 끼고 이렇다고?
- 사대천왕이랑 수준이 다른데
- 사실 메구미가 마왕이었누
- 와ㅁㅊ
내가 탱킹을 맡기에는 워낙 메구미의 화력이 강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회복시키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제대로 피격당했으면 탱킹 셋팅이 있는 나도 즉사였다.
"어우, 진짜 고통이 아닌데도 피 깎이는 것 때문에 아프게 느껴지네."
너무 과몰입 같지만, 순간적으로 숨이 답답해질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체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차오르는 것은 거의 호러였다.
"왜, 왜? 왜서온이가?"
"아, 씨."
나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메구미는 자신을 희생했고, 그렇다면 그녀가 원했던 것에 도달하게 해줘야 했다.
물론 이런 방향은 싫지만, 나는 아직도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약속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지연아 정신 차려. 메구미를 침식한 저 씨앗을 없애야 해. 그냥 놔둔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나는 저 씨앗을 따로 없애는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한다.
당연히 구할 가능성도 0에 수렴한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지연이가 싸움에 동참하게 해야 했다.
그녀가우리와 함께 메구미와 싸워서 100레벨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만했다.
"지연이 네가 넋 놓고 있으면 전부 다 죽어! 네가 용사잖아!"
"나, 나는...."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조금씩 싸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냉정해질수록 공격이 아까처럼 다시 정교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격은 잘 들어간다는 거네.'
기본적으로 메구미는 화력에 몰빵한 느낌이었다.
적중시키기는 어려웠지만, 적중만 시키면 데미지가 굉장히 치명적으로 들어갔다.
"망할, 마력이 끝나가는데."
이래서는 곧 루냐님의 체력 관리에 문제가 생긴다.
그럼 탱커와 힐러 모두 리타이어 된다는 소리인데, 그럼 더 버티기는사실상 힘들어진다.
"피하는 건 무리인데."
다른 보스들이 광역 공격이나 유도 공격이 문제였다면, 메구미는 말도 안 되는 정확도 때문이었다.
현재는 그걸 탱커가 일부러 맞아주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그래서 무리가 가더라도 탱커인 루냐님을 최대한 활용해서 막는 식으로 진행해 왔다.
'그것도 여기서 끝.'
사실상 끝나버린 마력을 확인하며, 메구미가 먼저 쓰러지길 염원했다.
이제 그것 말고는 방법이없었으니까.
"어?"
그리고 정말로 이 타이밍에 지연이의 공격이 메구미에게 적중했다.
거의 빈사 상태가 된 메구미가 쓰러져서 바닥에 뒹굴었다.
"서온아!"
그리고 메구미에게 뛰어가서 몸을 떠는 지연이를 보던 리엘이 중얼거렸다.
"약속은 지킬게."
리엘이 무방비로 누워있던 메구미의 목을 단호하게 베어냈다.
그럴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지연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90층 미션 완료
이지연의 레벨이 100에 도달 (100/100)]
"대체 무슨 짓을.... 서온아? 서온아! 힐.... 얀별아 힐 좀 해줘. 응? 지금이라면 살릴 수 있는 거지? 아직 괜찮은 거지?"
"......."
그럴 리가 없었다.
이미 그녀는죽어서 지연이의 경험치가 되었으니까.
만약 내 회복으로 살릴 수 있는 수준이더라도, 지금은 내 마력이 텅 비어있는 상태라 불가능했을 것이다.
- 앗아앗
- ㅠㅠㅠㅠ
- X
- 메구미ㅜㅜ
- ㅠㅜㅜ
- 결국 이렇게 되네
- 이거 클리어 된거임?
"이런 게 어디 있어...? 갑자기 이렇게 가는 게 어디 있냐고...."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턱 막혀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 모두와 함께 축하해야 할 공략의 끝에 도달했는데, 지금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90층의 공략에 성공합니다. 86층의 진입 인원수 제한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와는 상관없이 시스템은 기계적으로 자신이 알려야 할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제 91층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이곳에서 멍하니 있었을까, 결국은 마왕이 나타나서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왕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지연이에게 죽었다.
99레벨과 100레벨은 딱 그런 수준의 차이가 났다.
"허무하게 짝이 없네."
우리는 마왕성을 나와 돌아가기 시작했다.
6명 모두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비를 조용히 맞으며아무런 대화 없이 걸었다.
['시련발아'님이 1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고생하셨습니다
공략은 끝났다. 마왕은 용사에게 죽었고, 이 세계는 구원받았다.
그걸로 끝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