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21장 - 예성 고등학교(2)
"침식을 정화할 거거든요?"
"그런데요?"
"혹시 다른 생존자들이랑 충돌할 수 있으니까 미리 확인하려는 거죠."
"아하."
침식을 정화하러 돌입하기 전에 이 주변을 정찰해두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침식을 공략할 때는 주변에 흔적을 남긴다나?
'뭔가 복잡하네.'
필수적으로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내가 깨어났던 곳을 안내했다.
"이쪽이에요."
"여긴 또 뭐야?"
큐브 비슷한 기계와 내가 아까 편의점을 털어서 모아놓은 물자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저 기계가 뭔지를 모르고 있었네.
"지내기에 좋길래 여기를 베이스로 잡고 있었어요."
"왜 의료용 캡슐이 이런 데 있지? 심지어 마력 전력화 기기가 붙어 있잖아?"
"의료용 캡슐이요?"
"몰라요? 게이트 터지기 전에 병 대부분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기계라고 유명했는데."
그런 게 있구나.
하긴 조금 다르지만, 현실에도 의료용 큐브가 존재했다.
그거랑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되겠지.
"많이 좋은 거예요?"
"딱히요. 이미 인터넷이 끊어져서 작동되질 않고, 만약 인터넷을 복구한다고 치더라도...."
인터넷은 결국 서로 송수신을 하는 시스템이다.
즉, 저의료용 캡슐 정상 작동을 위한 서버는 이미 무너져서 사용할 수가 없을 거라는 소리다.
"조금 아깝네요."
"그렇긴 해도 좋은 소득이에요."
그녀는 의료용 캡슐을 이리저리 확인하더니, 전력부로 보이는 곳에서 장치 하나를 뜯어냈다.
저건 뭔가 다른 장치랑 색감이 다른데?
조금 조잡하기도 하고.
"그건 뭔데요?"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데 전기가 통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마력을 전력으로 바꿔서 공급하는 장치가 생겨났어요."
"아하, 그런 식이군요."
기존에 전기로 돌아가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은 무리니까, 마력으로 돌아가도록 호환시켜주는 물건이라는 소리였다.
"이 정도면 A급 마력석으로 만들었나 보네. 꽤 수확이 좋네요."
"그래요?"
"오늘 침식 해결하고 얻을 보상이랑 비슷한 수준이에요. 이게 보상이 두 배가 되네."
- 보상이 복사가 된다고~
- ㅋㅋㅋㅋㅋㅋ
- 심플월드랑 확실히 다르네
- ㄹㅇ심플월드는 전자기기기 없지
- 근데 진짜 아포칼립스 느낌 물씬 나네
- 갓겜 미쳤다
"여기 뭐 특별한 것이 있나 확인하셨어요?"
"대충 다 살펴봤는데,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어요."
아, 생각해보니까 조금 걸리는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처음 게임에 접속해서 이곳을 봤을 때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까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너무 비정상적으로 깨끗했어요."
"깨끗하다뇨?"
"마치 일부러 청소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요."
나 자신이 너무 이질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여기는 아주 깨끗했다.
심지어 방문을 열고 나가면 풍비박산이 나 있는데 말이다.
"이 아포칼립스 상황에 아무도 없는 방이 깨끗한 건 이상하잖아요."
"확실히 그러네요. 애초에 이 방은 왜 이렇게 혼자 멀쩡한 거지?"
우연히 그런 경우가 왕왕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상한 점이 아주 많은 방이라고 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칼에 오러를 입혀서 벽에 내리찍었다.
"이야."
"어, 뭐야?"
- ????
- 와 오러가 막히네
- 벽 왜캐 튼튼함?
- ㄷㄷㄷㄷ
- 파괴불가 오브젝트인가?
- 평범한 건물이 아니었냐고
- ㄴㅇㄱ
다슬씨의 검은 겉만 조금 긁은 뒤에 벽에서 튕겨 나왔다.
그걸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 방은 대체 뭐길래 이런 처리가 되어 있는 거야?
"마력으로 구현해놓은 셸터네요. 그건 그렇다 쳐도 오러를 막는다라...."
어라?
여기서도 저런 마법 종류를 오러라고 부르네?
- ???
- 이게 여기서도 오러네
- 벌써 용어 적용시킨 건가?
- ㄹㅇ신작이라고 적용 빠르네
- 오...
- 시리엘! 시리엘!
- 와! 오러!
- 근데 오러를 어캐 막지ㄷㄷ
"근데 오러는 오러로만 막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어지간하면 그렇죠. 그리고 반발하는 느낌이 오러 느낌인 걸 보니까.... 오러로 벽을 만들어 막고 있네요."
"네?"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오러로 벽을 만든다고? 그건 지금 내가 해도 못 할 것 같은데?
"그물처럼 짜둔 거에 오러를 입히면 오러로 만든 철조망이 완성되죠. 그럼 자신보다약한 오러 정도는 막을 수 있어요."
"그럼 그 오러는 누가 쓰는 건데요?"
마법이면모를까 오러를 구현할 수 있는 장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이긴 처음 해보는 게임이니까 비슷한 게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 여기 있겠죠."
"네?"
그러니까 여기서 직접 오러를 불어넣고 있는 거라고?
그게 가능해?
"문제는 제 실력으로는 확인이 안 된다는 점이네요. 나중에 세랑 선배랑 같이 와야겠네."
"어, 그래요?"
"저는 지금 오러를 못 끊잖아요. 오러를 끊어서 이 주변을 파헤쳐야 오러의 주인공을 찾을 텐데."
"아하."
"근데 조금 이상하긴 해요."
이 정도로 보호를 확실히 하는 셸터라면 안에 지킬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 안에 사람이 없는데 여전히 오러를 가동 중이라는 점이 굉장히 이상하다.
애초에 오러를 불어넣는 것도 이곳에서 같이 하면 되지 따로 숨을 필요도 없고.
- 그러게
- ㄹㅇ왜 유지하지 저걸?
- 아무도 없는데
- 흠터
- 뭔가 떡밥인가?
- 느낌있네....
"나중에 다시 와보죠."
"그럼 이제 침식을 정화하러 가는 거예요?"
"네, 여기 말고 다른 곳도 대충 둘러봤지만, 딱히 들어간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아까 내가 쓰러졌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나저나 여기 좀 어두컴컴한데.
"이쪽이에요. 따라오세요."
"아, 네."
그리고 내가 눈치챘을 때는 주변이 완전히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깜짝 놀라서 뒤로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히익,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아뇨. 숨 쉬어보세요. 괜찮죠?"
"어, 어라? 아까는 어지러웠는데?"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다슬씨는 고개를 으쓱하면서 그 이유에 관해서 설명했다.
"아까 얀별씨가 예비 각성이라는 걸 했죠? 그게 각성자가 되기 전 단계인데, 능력은 없어도 신체 능력은 각성자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아하?"
"그래서 침식의 독성에 면역이 생긴 거죠."
아까 시나리오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각성 덕분이었구나.
예비 각성은 일종의 레벨업, 고유 능력이라는 녀석은 심플월드의 초기 스킬과 비슷한 녀석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싸울 줄은 알아요?"
"네? 조금은?"
반사적으로 마력을 허공에 뽑아냈다.
물론 내가 사용하는 마법이 여기서 어디까지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응?"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처음에 몬스터를 사냥할 때보다 훨씬 많은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 이것도 각성 때문에?"
정말로 단계 하나로 이루어진 레벨업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면 초반에는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해서 각성하는 것까지는 필수가 되겠네.
"오, 마력 컨트롤은 꽤 익숙하시네요?"
"그런가요?"
"하긴, 그 정도는 되니까 각성자도 아닌데 예성로를 돌아다녔겠지."
"아하하...."
그녀는 적어도 발목은 붙잡지 않겠다면서 나를 데리고 침식을 향해서 계속 다가갔다.
- 경력있는 신입이자너
- ㄹㅇ마법 못쓰면 못하는 게임이네
- 심플월드는 마법 없어도 꽤 재밌었는데
-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게임이 너무 하드함
- 누가 들으면 심플월드는 라이트한 줄 알겠네
- 아 나도 빨리 해보고 싶다
- 비교적이지ㅋㅋㅋㅋ
- 여기가 예성로인가?
"침식은 다른 게이트랑 크게다를 것은 없어요. 그나마 다른 부분이라면.... 다른 게이트는 생성된 다음 그 상태를 유지하지만, 침식으로 변한 경우에는 계속 변이가 일어난다는 점이 다르죠."
게이트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아마 심플월드에서 나온 게이트와 비슷한 개념이겠지?
침식으로 변했다고 하는 걸 보면 침식은 게이트의 변화된 형태인가?
"그 말은 변수가 많다는 거네요?"
"네, 동급 게이트보다 좀 더 어렵다고 취급되는 이유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거뭇거뭇하던 안개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이제 도착한 건가?
"여기부터는 침식의 기운은 없지만, 여기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강한 놈들이 많습니다. 가능하면 어그로 끌지 말고 사리세요."
뭐지, 이 고렙 따라다니는 뉴비가 된 기분은....
확실히 아까 밖에서 본 것보다 강해 보이는 몬스터들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다만 다슬씨는 그걸 어렵지 않게 제압하면서 진행해 나갔다.
"그리 변이가 심하진 않은 것 같은데.... 뭐, B급이니까 그럴 가능성이 낮기는 하죠."
"B급이요?"
"여기 난이도가 B급이에요. 지금은 측정을 못 하지만 게이트이던 시절에는 적정 난이도가 시스템에 표시되니까요. 그걸 기준으로 매기죠. 제가 B급 각성자니까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아마 게이트에 난이도가 붙어있고, 그 난이도를 플레이하는 것의 적정 전투력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각성자 랭크가 전투력 표기 비슷한 것이겠지.
'물리적으로 오르는 레벨은 없어도, 전투력 환산은 해준다는 소리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스펙 계산하기가 까다로우니까.
근데 왜 NPC는 보여주면서 나는 안 알려주지?
"등급은 어디서 확인해요?"
"아, 그거 각성한 이후에만 알 수 있어요. 그전까지는 나오지 않아요."
무슨 언랭이 배치 보는 것도 아니고, 각성 단계까지 가야만 나온다고?
"그리고 가능하면 각성하기 전까지 전투 경험을 더 쌓으세요. 이따가 제가 좀 안전한 상황이다 싶으면 말할게요."
"전투 경험을요?"
"각성 능력은 예비 각성자 시절의 행동과 성향에 따라 결정되거든요. 아무래도 전투에 관련된 능력이 중요하니 전투를 자주 접해서 전투랑 관련된 걸 얻는 것이 좋아요."
"아, 그렇구나."
- ???
- 이게 랜덤이 아니네?
- 갓겜 뭐냐고
- ㄷㄷㄷㄷㄷ
- ㄹㅇ 플레이 성향 최적화네
- 그게 가능한가
- 녹스!녹스!녹스!
- 근데 결국 완벽하게 상황 통제 못 하면 사실상 랜덤 아닌가
- 이건 결과를 여러번 봐야알겠는데?
하여튼 그나마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최대한 전투를 경험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조언이었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사냥에 지겨워져서, 침식을 정화하는 방법에 관해서 물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설명했다.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게이트 핵이라고 불리는 보석을 깨트려야 사라지는 건 알죠? 이건 침식도 마찬가지지만 침식은 깨트리는 것 대신 정화라는 작업이 필요해요."
"정화요?"
"네, 게이트 핵이 변화한 걸 침식석이라고 불러요. 이 침식석은 게이트 핵이 있던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거든요?"
"우리가 찾는 게 그거군요?"
"네, 그걸 원래 위치에 되돌리면 정화되면서 침식이 사라집니다. 이걸 몰라서 초창기에 많은 사람이 침식 안에서 죽었죠."
"어렵네요."
요약하면, 게이트에선 핵을 부수기만 하면 되지만 침식에서는 핵을 찾아서 원래 자리로 돌려야 한다는 거지?
"그래도 성공만 하면 보상은 더 좋으니까요.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핵이 부서진 파편인 마력석을 얻지만, 침식은 부서지지 않은 마력석인 마력 심장을 얻을 수 있어요."
"두 개가 큰차이가 나요?"
"음, 마력석은 일회용이지만 마력 심장은 다시 마력이 차는 영구기관이거든요. 마력석을 마력 심장처럼 만드는 건 분명 가능하지만, 등급 하나 정도의 효율이 떨어져요."
"즉, 마력 심장은 한 단계 높은 마력석이나 마찬가지다?"
"네. 그런데 이런 당연한 것도 모르다니.... 혹시 어디 셸터에서 혼자 살아남고 계셨어요?"
"아하하...."
그녀로서는 내가 굉장히 상식이 없는것으로 보일 터였다.
세상이 이 난리가 났는데 관련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이상하긴 하지.
그리고 침식은 게이트와 다르게 밖으로 몬스터를 뱉어내기 때문에, 주변에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침식을 정화하거나 침식이 될 가능성이 큰 게이트를 처리하는 건 필수적인 일이라고 했다.
"잠시만요."
그녀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천천히 주위를 살피더니, 한숨을 쉬면서 짜증을 내뱉었다.
"아씨, 왠지 느낌이 안 좋더라니."
그녀의 말이 신호였다는 듯이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