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24장 - 이것이 하얀별의 뜻이라(1)
"님들 이걸 어떻게 모으셨어요?"
고성능의 동화급 장비도 꽤 많았고, 등급은 낮아도 성능만큼은 동화급이나 준신화급으로 취급되는 장비들도 많았다.
심지어 지금 이 창고는 2018년도의 심플월드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때는 동화급이 사실상 종결이던 시절이라 동화급 하나에 50억 루니는 했을 텐데?
'내가 동화급으로 도배할 때 대충 40억 루니가 들었으니까....'
대충 생각해봐도 이 창고에 있는 물건들의 가치가 굉장히 높았다.
그래도 여기까지였다면 그나마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을 터였다.
[투신의 사슬(준신화)
사용제한: 무기
매우 단단한 사슬을 생성한다. 사슬은 살상력은 없지만 잘 끊어지지도 않는다.
사슬에 닿은 대상은 약점에서 빛이 난다. 약점에 모두 사슬이 닿으면 적을 봉인하여 한동안 무력화한다.]
근데 그 시기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희귀했을 준신화급이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장 영향력이 가장 큰 부위인 무기였다.
"아니, 이걸 가지고 계시네?"
물론 탑을 등반하면서 하나씩 준신화급을 파밍하며 맞춰나갈 생각이긴 했지만, 이 창고에서 준신화급을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ㄷㄷㄷㄷㄷ
- 저거 저때 얼마였지?
- 풀루니 였을듯?
- 아니ㅅㅂㅋㅋㅋㅋ
- 풀루니면 천억아님?
- 준신화가 여기서 나오네
- 근데 진짜 2년 동안 인플레 오졌네
- 아동부 클라스ㄷㄷ
- 대충 이때 아이템 시세면 지금 10배임
내가 한창 준신화급을 구매하려고 찾아볼 때 성능 좋은 준신화급 무기가 100억루니를 살짝 넘었으니까, 1000억 루니면 대충 10배 가격이 맞았다.
그리고 준신화급도 준신화급이지만 동화급 장비가 워낙 많아서, 우리 3명의 장비는 충분히 맞춰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동부 진짜 뭐하던 사람들이지?"
이 정도면 거의 2018년도 기준 심플월드 썩은물들 아니야?
자기가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공용 창고에 이만큼 쌓아둔다고?
['프로젝트아르카'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뭐가 있는지는 기억 안 났는데 저게 있었네
"기억이 잘 안 날 만큼 예전이긴 하죠. 그래서 이건 나중에 어떻게 하셨는데요?"
['프로젝트아르카'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업데이트하자마자 팔아서 아르카의 레이드 스타일 장비가 되었죠
팔아버릴 아이템이었는데 아직은 우연히 남아 있었다는 소리였다.
이건 운이 좋았네.
"하여튼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초기 장비가 이 정도로 있다면 생각보다 계획을 빨리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이 장비들을 보고 계획을 세워나야겠네.
오늘 워낙 한 것이 많아서 피곤한 상태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장비를 받았는데 그냥 쉬고 미루기에는 애매하니까.
"포카야, 나 슬슬 방종할 건데 지금 시간 있어?"
- ㅇㅇ
그러니까 이제 슬슬 방종하고 큐브온을 보면서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계획을 짜야 할 것 같았다.
포카가 도와줄 테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오케이. 일단 그럼 오늘은 여기서 방종하고 내일 다시 켜겠습니다."
나는 수증기님에게 호스팅을 넘긴 뒤에 방송을 종료했다.
☆ ☆ ☆ ☆ ☆ ☆ ☆
"슬슬 준비하자."
손에 착착 감기는 사슬의 감각이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거 진짜 마음에 드는 무기라니까.
"진짜 여기 오기 전에 그렇게 빡센 파밍을 해야 했어? 여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아직까진 이지한데?"
"아직까진 쉽긴 해. 아니, 말했잖아. 원래라면 레나 네가 죽은 곳이라니까?"
"진짜 믿기 어려운 소리네. 겨우 이런 곳에서?"
우리는 탑을 오르고 준신화급 장비를 파밍하는 방식을 사용해 천천히 탑을 올라왔다.
솔직히 다른 것보다 같은 던전을 몇 번이고 돌아서 아이템이 나오길 기도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하긴 원래 MMORPG가 다 그런 거지.'
그 와중에도 새로운 파티원은 구하지 못했다.
탑의 NPC는 공략이 끝난 층으로는 넘어갈 수 있지만, 새로운 공략에는 참여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맨날 탑에서만 사는데 새로운 파티원을 어디서 찾냐고.'
무조건 탑 바깥 출신의 시스템을 지닌 NPC만 참여할 수 있다 보니, 새로운 파티원을 구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게 느껴졌다.
결국 5인이면 조금 더 널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층도 빡세게 아이템을 파밍해서 도전해야만 했다.
'슬슬 파티원을 구하긴 해야 하는데.'
물론 이런 방식도 한계가 있었다.
파티 인원수도 채우지 않은 상태로 계속 올라가기에는 탑 위쪽의 난이도는 굉장히 높았으니까.
그래도 71층은 내가 경험해본 적이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서 준비만 단단히 하고 도전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시아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 좋게 71층에 입장을 한 것이 아까 전이었다.
'물론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지만.'
시아에 대한 좋은 기억 덕분에 미화가 되어서 그렇지, 사실 71층에서 75층까지의 내용은 심각할 정도로 더럽고 추잡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대부분 시아에게 조명되어있기 때문에 더화가 나는 곳이었었지.
"시아가 잘 따라줘서 다행이야."
"응, 시아 너무 귀여워."
"나는 별로...."
아르카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대충 상황을 알고 있는 나는 그녀의 그런 반응이 이해가 가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 ㅋㅋㅋㅋㅋ
- 자기혐오ON
- 나왔다! 아르카식 츤츤대기!
- 저러면서 가장 빡쳤던게 누구더라
- ㄹㅇㅋㅋ
- 츤데렠ㅋㅋㅋ
- 솔직히 노린 것처럼 비슷한 상황이니까
- 그럼 시아도 스트리머됨?
"시아도 스트리머 하냐고요? 오우쉣...."
"아, 지랄하지 마."
"그럼 아르카가 선배가 되네?"
부끄러워하는 아르카의 모습에 우리는 킥킥대면서 장난을 걸었다.
장난은 적당히 해야 한다지만 아르카의 반응이 너무 귀여웠다.
"개소리하지 말고 전투에나 집중해."
그렇긴 하지.
아무리 우리가 준비를 많이 했다고는 해도, 일신 백작을 상대하는 일이기에 주의를 요해야 했다.
"미리 계획한 대로만 하면 문제없을 거야."
가장 중요한 적은 일신 백작과 네즈지만, 그래도 대형 전투인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인명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탑 공략을 하는 입장에서 그런 피해는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레나야 부탁할게."
"엉, 잘하고 와."
그런 이유로 레나는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병사들과 레지스탕스의 싸움을 막기 시작했고, 나와 아르카는 최전방으로 섞여 들어갔다.
"근데 왜 그렇게 어려운 길로 가는 거야? 일신 백작까지 죽이면 되잖아?"
"아니, 일신 백작은 죽이지 않는 편이 나아."
일신 백작을 묶어둔 채로 최대한 빨리 네즈를 죽이고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괜히 애매하게 일신 백작이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네즈가 일신 백작을 강화할 테니까.
"호오, 꽤 건방진 소리를 하는 녀석들이군."
"일신 백작."
내가 일신 백작과 제대로 붙는 것은 처음이었다.
시뮬레이션으로 여기에 왔을 때는 포카나 리엘이 상대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일신 백작의 스타일을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영상을 돌려봤고, 맞붙을 스펙도 충분했다.
'일단 약점부터 확인하고.'
사슬을 검처럼 늘려서 가볍게 일신 백작과 부딪혔다.
부딪히는 순간 빛이 나는 일신 백작의 약점들을 최대한 암기했다.
원래는 사슬을 통해 조금씩 적을 묶어서 모든 약점을 감싸는 식으로 사용하는 무기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무래도 상대가 대응하기 때문에 효과를 발동시키기가 어렵다.
'가능하면 한 번 묶는 타이밍에 모든 약점을 건드려야 해.'
그리고 이 계획은 나 혼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 할 수 있다면 아르카도 아까 거기에 두고 왔겠지.
"지금!"
아르카의 신호에 맞춰서 일신 백작을 노리던 사슬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리고 바닥에 있던 함정들이 터져 나오면서 일신 백작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다.
"뭣?"
본래라면 아르카가 사용하는 함정은 마법을 써서 풀어내면 되는 간단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능보다는 암호화에 신경을 쓰는 방향으로 연습했기에 금방 풀어내기가 어려울 터였다.
"오케이!"
최대한 정확하게 사슬을 묶어내자 투신의 사슬이 발동하면서 일신 백작의 몸을 꽁꽁 묶어 바닥에 고정했다.
아르카는 계획대로 일신 백작을 따로 구속한 뒤에 일신 백작을 인질로 데리고 다니면서 전투를 중단시키기 시작했다.
- 주모!
- 저걸 한 번에 하네
- 고였다 고였어
- 이게 천마지ㄹㅇㅋㅋ
- 채찍형 무기의 신ㄷㄷ
- 와 컨트롤 미쳤네
- 무슨 사슬이 살아 움직이네
- 일신 백작 표정ㅋㅋㅋㅋ
'여기부터가 중요해.'
나는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던 네즈의 위치를 확인하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만약에 놓쳐서 도망가면 골치가 아파진다.
"단칼에 끝내자."
이번엔 투신의 사슬이 아니라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을 만들었다.
이쪽이 살상력이 더 높기 때문이었다.
'하얀별 망설이지 마.'
나는 충분히 저 새끼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쓰레기라는 걸 알고 있어.
여기서 죽여야 추가적인 피해가 생기지 않아.
[대상: 네즈가 특성: 기억 속을 거니는 자(S)의 조건을 만족합니다.]
'어?'
그리고 내가 네즈를 공격하려는 순간, 주변의 광경이 변화하더니 다른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아니, 이 특성 대체 발동 조건이...."
너무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발동하니까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발동하는 대상이 네즈라고?
내가당황하는 것과는 별개로 특성은 착실하게 네즈의 과거를 재생해주기 시작했다.
"연구소장님, 역시 여기서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망할, 역시 이종족들을 섞는 건 무리인가?"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종족끼리는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 태어난 하프는 인간의 유전자만을 물려주기 때문에 인간과 이종족 이외의 하프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이 특징들은 이종족 차별이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마치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하는 부분이었으니까.
"하, 여기서 끝내는 건 아쉬운데."
그리고 이종족들을 합치면, 이종족들의 완성품인 인간이 탄생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널리 통용되는 가설이었다.
그래서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종족을 섞는 실험은 음지에서 늘 존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네즈가 이 실험을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이종족들을 합치면 인간이 나올 것이라고 공표하고 다녔지만, 본인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신인류의 탄생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만약 실험에 성공해서 자신이 신인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업적을 통해 '성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좌?"
나에게는 익숙한 용어였다.
시스템을 통해 나에게 시간을 후원해주는 초월적인 존재 같은 이들이었다.
"하, 끝까지 빡치게 하네."
성좌가 얼마나 가치 있는 자리인지는 몰라도, 그가 이런 실험을 하는 이유가 결국은 자신의 탐욕 때문이라는 건 바뀌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렇게 화가 나든 말든, 네즈는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진짜 내가 멍청했군."
애초에 인간이 다른 종족이 상위호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서, 왜 종족을 합칠 때는 인간을 넣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해서 하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프로써 섞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종족 특성이라면?
왜 그런 당연한 의문을 품지 못했지?
"성공이다! 이거라면...."
하지만 이것은 실험체를 살아있게 유지했을 뿐이지, 특성과 마력 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최종적인 완성을 시키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걸 위한 실험들을....
"그만."
나는 한 소녀가 안네라는 이름을 잃고 시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탄생하는 장면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보자 토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강제로 특성의 동작을 멈췄다.
'...과거를 봤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건 없었네.'
정말 한결같은 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자마자 네즈의 목을 힘껏 베어냈다.
"컷."
- ㄹㅇ사이다
- 이새끼는 죽을때마다 기분 좋네
- 깔끔했다
- 진짜 연습한 그대로네
- ㅅㅅㅅㅅㅅㅅㅅ
- 하얀별!하얀별!
- 너무 싱거운데
네즈의 죽음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네즈를 제외한 기사나 병사들은 레지스탕스에 항복한 채로 정리되어 있었다.
"수고했어."
"응. 마력만 회복되면 시아를 보러 가자."
사실 여기까지는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부분이었다.
역시 문제는 시아의 폭주인 75층의 해결이겠지.
"이번에는 진짜로 끝을 내자 시아야. 아니."
안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