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24장 - 이것이 하얀별의 뜻이라(6)
우리는 모두 혼란에 빠져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가?"
아르카가 친 드립에도 순수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럼 이게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아까 편지 내용에 기존과 다른 점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랑 헬만씨의 검은 진짜가 맞아.'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밖에 없다.
"허. 되게 당당하게 말하더니 실패네요?"
"저희야말로 당황스럽네요.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지음씨가 가짜 성검이라니."
- ㄹㅇ뭐임?
- 원래랑 다르네?
- ㄴㅇㄱ
- 이번에는 지음이가 임포야?
- 아ㅋㅋㅋㅋㅋ
- ㄹㅇ그럴지도모른다는 소리는 했지만
- 이게 왜 진짜냐ㅋㅋㅋㅋ
그렇다면 지금 강현씨나 아리아 중에 누가 진짜 성검을 가졌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 미치겠네.'
이제까지는 계속 기존이랑 똑같은 진행이었기에, 갑자기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자, 다들 진정하세요. 아직 확실히 나온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아리아가 말리고 나서야 지음씨도 조용히 물러섰다.
"일단 베이스캠프에서 휴식을 좀 취하죠. 다들 너무 흥분했어요."
"그렇게 하죠."
각자의 텐트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다들 개별로 흩어졌다.
그나마 지금이 아리아랑 이야기할 기회겠지.
나는 방송을 종료한 후에 바로 아리아의 텐트로 찾아갔다.
"저, 아리아씨?"
"네? 아, 하얀별씨였죠? 들어오세요."
저번에는 아리아가 내 텐트로 찾아왔었지.
이번 아리아는 나에 대해서 모를 테니까 내가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 캔커피.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그녀를 혼란스럽지 않게 떠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난 키워드를 던지기로 했다.
"아버지는 잘 지내요?"
"네?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미묘한 대답이었다.
내가 아는 아리아라면 조금이라도 특이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조금요."
"음, 아쉽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아시다시피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요. 다들 영웅이셨다는 말은 하던데...."
'연기?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이 질문으로는 제대로 된 대답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또 아리아의 특별했던 점이....
'자기가 주현씨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AI라고 했었지.'
만약 그런 정보를 그녀가 가지고 있다면 주현씨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반응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주현이라는 이름은 아세요?"
"강주현?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역시 지금 아리아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만, 아리아는 주현씨가 리트라이를 플레이 할 때 데이터로 만든 AI라 하지 않았나?'
지금은 2년 전이라서 그 데이터가 추가되기 전의 아리아라는 거야?
그렇다면 아직은 평범한 NPC인 아리아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니에요. 별 건 아니고 찾는 사람이라서요. 이야기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아리아가 가짜 성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신조차 할 수가 없네.
아리아가 아니라면 100층의 미션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누구의 성검이 진짜인지부터 가려내야 했다.
"오케이."
그리고 다음 날 진행되기 시작한 공략은 어제보다 훨씬 쉽게 느껴졌다.
하긴, 여기는 원래 처음 공략할 때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 게이트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요?"
지음씨는 계속 상황을 주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건 우리도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겠네.
'이번에는 3명이니까, 헬만씨와 우리가 무조건 들어가야 답이 나와.'
"헬만씨, 그리고 저희가 같이 갔으면 좋겠네요."
"그걸 마음대로 정하려고 하시네요."
"헬만씨는 믿을만해 보이니까요. 남은 한 명을 그럼 지음씨가 추천해 보시겠어요?"
다른 인원들은 우리 둘이 멤버 선택으로 활활 불타자,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강현이를...."
"그럼 아리아씨를 데려가겠습니다."
지음씨는 가짜 성검을 가지고 있고, 그러니 지음씨가 강현씨의 성검의 진위를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 대충 답이 나온다.
우리와 지음씨의 성검 중 하나는 가짜라는 것이 밝혀진 상태에서, 지음씨의 성검이 진짜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가짜 성검을 우리 공략에 참여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지금 지음씨가 넣자고 한 파티원이 가짜 성검이겠지.
"이번 공략에서 만약 제가 진짜라면, 가짜인 지음씨가 추천하는 멤버는가짜가 되겠죠. 따라서 반대로 해서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허, 그런 식으로 해서 은근슬쩍 실패 횟수를 늘리려는 수작 아닙니까?"
"실패하면 다음 공략부터 저희는 공략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1명의 다른 가짜를 찾지 못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가셔도 마찬가지입니다. 딱 한 번의 시도로 성검을 확정시킬 방법은 어차피 없습니다."
지음씨와 강현씨가 헬만씨나 아리아를 넣어서 진행한다고 해도, 거기서 실패하면 그 이후에 찍기를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논리적으로 볼 때, 어느 쪽을 처음 타겟으로 잡아도 확률 자체는 큰 차이가 없겠네요."
- 오 그러네
- ㄷㄷㄷㄷㄷ
- 이걸 생각하고 딜을 걸었구나
- 근데 그럼 굳이 이쪽 의견부터 할 필요가 있나?
- ??
- 아 맞네 이러면 헬만이나 아리아는 이걸 하지
- 난 이해가 안간다
확률 자체는 같더라도, 이걸 헬만씨나 아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달라진다.
우리를 먼저 믿게 되면, 만약 실패했을 때 헬만씨나 아리아는 무엇이 정답인지 본인이 답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실패하면 강현씨와 지음씨가 진짜다.
그럼 아리아씨나 헬만씨는 자기가 진짜라고 생각할 테니, 결국 3명의 진짜가 나오게 되는 거지.
물론 강현씨가 지음씨를 속였다거나, 나와 지음씨 모두가 가짜라는 상황일 가능성도 있지.
근데 거기까지 고려하면 어차피 저쪽도 믿을 수 없잖아?
"먼저 이야기 꺼낸 쪽부터 진행해보죠. 만약 이번 공략에서 실패하면 지음씨와 강현씨를 전적으로 믿도록 하겠습니다."
헬만씨나 아리아의 의견이 우리 쪽으로 좁혀지면서 우리가 원했던 대로 성검을 선택하게 되었다.
[97층 미션 완료
게이트 하나 봉인(1/1)]
"이거지!"
역시 이번에는 아리아가 진짜 성검을 들고 있었다.
이러면 생각보다 진행이 매끄러워지겠는데.
"......."
"말씀해 보세요. 가지고 계신 성검 가짜죠?"
"모, 모르겠어요. 당연히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연기라는 걸 충분히 알법한 모양새였다.
아마 마지막에 악마 계약자인 보스로 나서기 위해서는 파티에 남아야 하니까 저러는 거겠지.
"강현씨는 할 이야기 없으세요?"
"저는 정말로 잘 모릅니다. 받아온 성검이라서요."
강현씨는 지난번 공략이랑 다르게 꽤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하긴, 이번에는 다투었어야 할 지음씨부터 가짜 성검이니까.
[98층 미션
게이트 하나 봉인(0/1)]
"알겠습니다. 하여튼 진짜 성검은 다 찾은 거잖아요? 이제 마음 편하게 공략만 하면 되겠네요."
그 뒤로 4번째 게이트의 공략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솔직히 워낙 우리 파티가 스펙이 좋아서 어려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여기부터지.'
[99층 미션 완료
게이트 하나 봉인(1/1)]
기존과 어떻게 다른 진행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는 원래 계획했던 방향대로 진행하기로 이야기를 마쳐 놓았다.
['시아의 성흔(비활성화)'가 '시아의 성흔(활성화)'로 변동됩니다.]
[현재 플레이어의 데이터를 분석 중입니다. 적절한 능력을 찾는 중입니다.]
"제발, 시스템 변경...."
여기서 성흔이 주는 능력이 꽝이면 모든계획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된다.
[능력이 결정되었습니다. 당신의 종족이 시아족으로 변동됩니다.]
- ?
- 뭐야 왜 종족이 바뀌냐고
- 플레이어 아니었음?
- ???
- NPC만 바뀐다며
- 엥?
- 왜 1회용일 때랑 메시지가 다르지?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이루어졌지만, 나는그것보다는 당장 사용해야 하는 능력 쪽에 눈이 돌아가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의지
규칙을 변경하는 것과관련된 마법의 효과와 한계가 대폭 증가한다.
단, 자신이 인류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죽이면 규칙을 변경하는 것과 관련된 마법을 잠시 사용할 수 없다.]
'떴다!'
딱 내가 원하던 느낌의 능력 그대로를 적어준 듯한 느낌이었다.
계략의 스택도 충분히 쌓아왔기 때문에 잠깐 시스템을 변경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지, 지음씨?"
아리아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음씨가 우리가 사용하던 성검 하나를 빼앗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100층 미션
악마 계약자 민지음 사망(0/1)]
"상대가 좀 바뀌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진행해야 하는 것에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물론 대응해야 하는 전투 스타일은 조금 바뀌겠지만, 아무래도 주현씨의 피지컬을 그대로 가진 아리아보다는 지음씨가 상대하기 편하지.
"헬만씨 강현씨를 맡아주세요!"
나는 다른 인원들이 나를 지키거나 지음씨를 상대하는 사이에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신의 계략은 스택만 있다면 마력을 다시 채워낼 수 있다.
그래서 시스템의 변경에 들어갈 많은 마력을 커버할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스택을 소모할 때마다 효율이 올라가는 건 덤이지.'
[100층 미션
악마 계약자 민지음 자앙(0/1)]
"천천히, 천천히...."
급하지 않게 조금씩 글자를 바꾸기 시작했다.
넉넉하리라 생각하면서 채워왔던 계략 스택이었는데, 생각보다 사라져가는 속도가 빨랐다.
[100층 미션
악마 계약자 민지음 재압(0/1)]
"조금만 더...."
그 와중에도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신호를 줬다.
내 시스템뿐만 아니라 모두의 시스템의 미션이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100층 미션
악마 계약자 민지음 제압(0/1)]
"지금이야! 여유 별로 없어!"
아르카가 함정을 써서 지음씨를 잠깐이나마 제압시키고, 그에 따라 미션의 조건이 완수되면서 탑이 클리어되었다.
[100층 미션 완료
악마 계약자 민지음 제압(1/1)]
- 퍄퍄
- 이게 진짜 되네
- ㄹㅇ말도 안된다
- 누가 마지막 층 공략을 이렇게 하냐고ㅋㅋ
- 진짜 어이가없네
- ㄹㅇㅋㅋ
- 된게 더 신기하다
물론 이걸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시스템 자체는 클리어 판정을 내줬지만, 그래도 아직 악마 계약자인 지음씨가 우리를 적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딱히 걱정할 만한 부분은 아니지.'
내가 전투에 참여하면 지음씨를 완벽하게 압도할 수 있으니까.
"어, 어째서.... 나는 모든 걸 버려가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들은 왜 나보다 더 강한 거야?"
"뭐긴요. 그냥 인원수로 다구리 때리는 거지."
"이번이라면 천화씨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야 진짜 우네.
선생님 악역이 그렇게 우시면 간지가 안 살아요.
"여기까지 하자."
이번에는 오히려 강현씨가 지음씨를 보듬어주기 시작했다.
뭔가 실연당한 여주인공을 보듬어주는 남주인공 같네.
내가 알던 강현씨가 맞냐?
이거 맞아?
"하여튼 다들 고생하셨어요."
[100층의 공략에 성공합니다. 96층의 진입 인원수 제한이 사라집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들의 공략으로 탑이 모두 클리어되었습니다!]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었던 부분도 있었고, 진행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 주모!!!!
- 하얀별! 하얀별! 하얀별!
- 천마펀치천마펀치천마펀치
- 오우쉣
- 와 이제 클베하냐?
- ㄷㄷㄷㄷㄷㄷㄷ
- 드디어 아르카 방송 돌아온다 드디어 아르카 방송 돌아온다
- 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
대충 상황을 정리한 이후에는 다른 파티원들보다 빨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대로 내려가게?"
"그래야지."
다른 파티원들은 대강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뭔가 찝찝하다는 듯이 나에게 되물었다.
"아리아랑 더 이야기 안 할 거야?"
"아무것도 모르잖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시 기억을 되찾으면 또 무리해서 날 도우려고 할 테니까.
아리아의 성격이면 그럴 것이 뻔하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쳐 울 거면서 강한 척은 혼자 다 해요."
"......."
메구미의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다 계획대로 잘 되었는데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참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 ㅠㅠㅠㅠㅠㅠㅠ
-아리아ㅜㅜㅜ
- 그래도 구했으니까 됐지
- ㄹㅇ잘하셨음
- 하얀별! 하얀별! 하얀별! 하얀별!
- 울지마세요ㅜㅜ
"야, 하얀별 이쪽에 있다."
그렇게 말한 메구미는 금방 나를 지나쳐 걸어갔고, 곧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언니."
"아리아...?"
내가 뒤돌아보자, 아리아가 들고 있던 성검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내 품으로 뛰어 들어와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