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28장 - 공주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1)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래도 잘 진행되고 있기에 망정이지."
"누가 하루마다 얼마나 바뀌는지 갱신하고 있던데? 워낙 팍팍 바뀌니까 볼 때마다 신기하더라."
"다행이지 뭐. 다들 오픈 초기라 그런지 빡겜 하고 있고. 슬슬 마무리 단계라 다행이야."
원래 이런 빡센 노동게임은 한국이 최고지.
워낙 동원되는 인원이 많아서 조율에 문제가 있거나, 사고를 치는 인원들이 있어서 문제가 없다고는 하기 어렵긴 하다.
그래도 유저들이 들어온 것이 더 긍정적인 부분이 많았다.
"알았어, 얀별이한테서 떨어지라 이거지?"
"승아야, 포카한테 너무 그러지 마."
"......."
승아가 말없이 포카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포카가 자꾸 나를 툭툭 건드는 모션을 해서 그런 거겠지.
나는 포카의 스타일에 익숙하니까 별생각이 없었는데,승아한테는 나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나 보다.
- 얀데레ON
- 당장이라도 찌를기세네ㅋㅋㅋ
- 승아교는 마왕군의 퇴거를 요청합니다
- 마왕을 꼬라보는 사이코패스ㄷㄷ
- 마왕 많이 죽었네ㅋㅋㅋㅋ
- 아ㅋㅋ 지금 깝치면 진다고
- 승아교ㅇㅈㄹㅋㅋㅋㅋ
"아, 내가 성유물만 있었어도 승아한테 정신교육 들어갔는데."
"지금은 질 거고?"
"아무래도, 아직 승아까지는 무리지."
포카는 다행히 마법 계열 특성을 각성하기는 했지만, 아직 단련할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평범한 A급 수준 정도의 스펙이 한계였다.
근데 아마 그 정도도 엄청난 속도 아닐까 싶은데.
거의 내가 리트라이에 적응할 때와 비슷한 속도로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내 성유물을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나도 다른 성유물이 있는 건 아니라서."
"그걸 왜 나를 줘. 더 좋은 성유물 구하면 모를까. 너는 그거 꼭 쥐고 있어야지. 인류의 영웅씨."
"으,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
예성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도 오글거려 죽겠는데, 포카까지 그렇게 부르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지금 리트라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영웅이니 뭐니 하는 건 좀 그렇잖아.
"왜 나는 항상 오그라드는 별명만 생기는.... 뭐야 콘소메님한테 전화가 왔네."
"소메가?"
무슨 일이지?
생각해보니까 최근에는 콘소메님이랑 연락을 한 적이 별로 없네.
"여보세요?"
"하얀별님, 통화 괜찮으세요?"
"네, 방송 중인데 괜찮나요?"
"음.... 뭐, 다들 아는 내용이라 괜찮을지도?"
"뭔가 일이 있긴 하나 보네요."
아예 민감하지 않은 문제라면 저런 애매한 답변을 하지는 않았겠지.
이게 민감한 문제는 맞는데, 어차피 다들 알고 있으니 괜찮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최근 승우, 아니 수증 녀석 방송 상태 알고 계세요?"
"어, 팔로우 목록에서 못 보긴 했는데...."
['수증기(cubetime0406)'님의 채널]
- 최근 생방송 7일 전
7일 전이라고?
수증기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생방송을 켜지 않을 만한 사람이었나?
혹시나 해서 공지사항을 들어갔더니, 멘탈 상태가 좋지 않아서 녹화만 따두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뭐야, 왜 방송 안 해요?"
"모르겠어요. 말해주지도 않고, 일주일째 큐브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요. 전화도 꺼져 있고."
"...정말 녹화를 따두긴 하네"
다만 같이 지내고 있는 콘소메님조차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건 좀 이상했다.
멘탈이 나빠졌다면 뭔가 전조가 있었을 텐데, 혹시나 해서 확인해봐도 삭제된 다시보기도 없는 데다, 마지막 다시보기도 별로 이상한 내용이 없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한 전조는 없었어요?"
"딱히요. 요즘 컨텐츠 할 게 없다길래, 핫한 리트라이를 좀 해보라고 했었는데.... 그게 문제였나?"
"리트라이요? 근데 리트라이면 현재 활동 범위가 좁아서 누군가는 봤을 텐데?"
하지만 최근에 수증기님을 리트라이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었나?
당장 포카만 해도 시작한 첫날에 녹화로 시작했는데도 여기저기서 스샷 찍혀서 돌아다녔고....
뭐, 포카랑 수증기님은 인지도가 다르니까 이렇게 비교하는 건 잘못된 거겠지만.
"지금 그러면 계속 리트라이 중인 건가요?"
"큐브에는 그렇게 표시가 되고 있네요. 제가 아직 리트라이는 막 시작한 참이라, 하얀별님이 잘 알 것 같아서 물어봤어요."
"일단 알아볼게요. 슬슬 안쪽에서 사진 프린트 정도는 되니까, 아바타 수정이 적었다는 가정 하에는 찾을 만 할 거예요."
만약 수증기님이 방송을 하지 않는 이유가 리트라이에서 생긴 거라면, 맨 처음에 리트라이를 시작할 때 외모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았을 거다.
특히 처음 시작한 계기가 방송 때문이라면 더 그렇겠지.
그럼 당연히 수증기님의 원래 외모로 활동을 할 테니까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나마 어려운 건 활동 범위가 자유로운 편인 심플월드 게이트네.'
리트라이는 아무래도 현재 상황이 상황인지라 인천과 서울 말고는 갈만한 곳이 별로 없다.
어지간한 장소에는 전부 플레이어가 있는 데다가, 플레이어라면 다들 녹화를 켠 상황이니까.
'신서울 건립 때문에 전원 녹화를 하자고 했던 게 다행이네.'
일단 수소문은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신서울 건립도 막바지라서 구역 대부분은 시범 테스트에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인력은 그럭저럭 여유로워진 타이밍이었다.
"수증은 멘탈이 약해서 탈이라니까."
"수증님이 조금 그런 면이 있지. 근데 리트라이에서 뭘 봤길래 일주일 동안 틀어박혀 계시는 거지?"
"누구처럼 사람이라도 죽는 걸 본 거 아니야?"
"그래도 나는 방송은 켰어!"
거참.
나도 그 당시 멘탈이 좀 약하긴 했다.
심지어 아연씨가 죽은 줄 알았던 직후에 있었던 일이라서 더 민감했던 것도 있고.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그래도 이겨내셨으니까....
- ㄹㅇ그거 큐브온에 올리실 줄은 몰랐는데
- 그럴수도 있지
- 프로 큐리에이터ㅋㅋ
- 솔직히 큐브 뉴비한텐 좀 빡센 경험이긴 했어
- 아ㅋㅋ
생각해보니까 그거 진짜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아리아한테 속았던 거잖아.
갑자기 생각하니까 화나네.
아리아가 최근에 휴대폰을 받았다고 했으니까, 전화해서 심플월드 쪽 일이나 맡겨야겠다.
이게 나의 작은 복수다.
"...뭐야 아리아도 방송 보고 있네."
채팅을 훑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지나간 닉네임 중에 'AIR'가 보였다.
아리아가 사용하는 스위치 계정의 닉네임이었다.
"아리아, 심플월드쪽 조사는 부탁할게. 밖은 내가 찾아보고."
- ㅔㅔ
일이 좀 여유로워졌다 싶었더니, 수증기님 때문에 추가로 일이 생겨버렸네.
근데 대체 어디 틀어박혀 있길래 봤다는 사람이 없는 거야?
"언니, 이거 아니야?"
"응?"
잠시 물을 마시면서 쉬고 있던 나에게, 승아가 휴대폰에 온 제보메일 하나를 들이밀었다.
이거 확실히 수증기님 사진 같은데.
날짜는 6일 전쯤이고 옷도 심플월드의 초보자용 복장이었다.
"영상 좀 볼게."
확실하네.
걷는 폼이 아무리 봐도 수증기님 그 자체였다.
입고 있는 옷도 아리아가 준비해둔 초보자용 세트였으니까 확실했다.
"아, 아리아."
"찾았어. 7일 전에 심플월드 나간 기록."
"...어, 여기 밖에 있는 제보도 들어왔어. 근데 어떻게 딱 6일 전이지? 그 뒤로 고의로 잠적이라도 했나?"
"다시 들어온 기록은 없으니까, 아마도 어디 게이트라도 들어간 게 아닐까?"
"아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네.
전화도 꺼놓고 게임에만 몰두하니까 잠적했다고만 생각했는데, 만약 전화는 그냥 잊어먹은 거고 게이트를 공략 중인 거라면?
아무래도 리트라이의 시스템상 공략 도중에는 게임을 멈추기 어려우니까.
'EX급 게이트일 가능성이 있겠네.'
그냥 어려운 게이트였다면 휘말린 시점에 사망해서 로그아웃했을 가능성이 크다.
EX급 게이트는 당장 위험하다기보다는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소모하는 형태일 가능성이 존재하니까, 뉴비인 수증기님이 일주일간 살아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저기가 어디지? 서울인가? 아, 좌표 적혀 있네. 여기부터 살펴보자."
"응."
"오케이, 그 근처부터 뒤져보자. 일주일 전이니까 큰 의미는 없겠지만."
"지금은 이거 말고는 정보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하여튼 그런 상황을 예상해보면, 마지막으로 수증기님이 발견된 위치 근처에 미발견 EX급 게이트가 있을 확률을 배제할 수 없었다.
다만 저번처럼 1인 입장 던전인 경우에는 일이 복잡해지는데....
그렇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 콘소메님."
"아직 뉴비인 채로 합류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대신 휘말려서 죽어도 탓하기 없습니다?"
"...큐브온 각을 위해 희생하는 걸로 하죠."
콘소메님은 아직 각성 능력조차 주어지지 않은 뉴비였다.
그래도 본인이 수증기님을 찾고 싶어서 달려온 데다가, 자기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그리고 어지간한 난이도라면 나랑 승아, 심지어 포카까지 있는 시점에서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흩어져서 찾아보고, 의심되는 단서 있으면 연락하죠."
"......."
승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 팔을 붙잡았다.
...너는 나랑 떨어지기 싫다는 소리구나?
"그럼 승아는 나랑 같이 다니는 걸로."
"고생이다."
"아하하...."
저번에 3주간 방치했던 사람이 나라서 떼어놓을 만한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나도 그 게이트를 3주 동안 붙잡고 있어야 할 줄은 몰랐지.
알았다고 해도 1인만 도전 가능한 시점에서 내가 들어갔겠지만.
게이트가 있으면 마력 흐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수증기님이 발견된 장소와 거리가 있는지 쉽게 발견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좀 의외네.
그 영상 이외에는 수증기님이 찍힌 제보가 없어서 이 근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보세요?"
"얀별님, 찾은 것 같아요. 권장 등급이 EX네요."
"오, 찾았어요? 제한 인원은요?"
"없는 것 같은데요."
"지금 방송 켜져 있으세요?"
"꺼져 있네요. 포카한테도 연락할까요?"
"포카는 제가 연락할게요. 문자로 좌표 넣어주세요."
- 이걸 끄네
- ㅜㅜㅜㅜ
- 근데 일단 안에 상황 보고 오픈해도 되는 정보니까
- ㄹㅇㅋㅋ
- 진짜 EX급 게이트인가?
- 수증기 방송켜!!!
-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 있었네
- ㄴㅇㄱ
일단 방송 송출에서 위치를 들킬만한 부분들만 끄고 내 목소리만 송출하는 걸로 바꿨다.
포카한테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콘소메님이 찾았다는 게이트 앞으로 모였다.
"와, 마력 진짜 안정적이네. 이러니까 못 찾지."
"...이건 어떻게 찾으셨어요?"
"너무 안 나오길래, 그냥 맨 처음에 발견되었다는 곳부터 천천히 생각해봤죠."
"오...."
마력 흐름도 안정적인데 그냥 평범한 건물 지하에 게이트가 열려있어서 굉장히 찾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찾기라도 한 것이 운이 좋다고 봐야 할 수준인데.
"일단 연락은 다 열려있으니까, 급하면 좌표 쏘면 되거든요? 일단 들어갈게요?"
"그러죠. 수증이 바로 죽지 않은 걸 보면 그리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이제는 익숙해진 게이트 내부에 들어가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바뀐다.
이제 위치 특정은 하지 못하니까 송출 옵션은 되돌려놔야지.
- 휴
-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 오 뭐야
- 판타지인가?
- ㄷㄷㄷㄷㄷㄷㄷ
- 갑자기 하늘 맑아지는거 뭐임
- 이세계 전이ㄷㄷ
- 심플월드는 판타지 아니였냐고ㅋㅋㅋ
확실히 심플월드의 일부 탑처럼 굉장히 판타지 느낌이 남아 있는 세계였다.
근데 심플월드도굉장히 자연스럽게 구현된 판타지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뭔가 엄청나게 느낌이 다르네.
심플월드가 한국식 판타지라면, 여긴 외국식 판타지라고 해야 하나?
"어라, 경계 받는 것 같은데요."
"그럴 만도 하지. 복장 차이가 되게 심하잖아."
물론 어느 정도는 우리도 판타지 계열의 복장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대 세계관인 리트라이 기준이었다.
진짜 판타지 세계에서 보기에는 정말 심할 정도로 현대에 가까워 보였다.
심플월드에서는 이런 것에 태클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응?"
그런데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보다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복장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있겠지만....
'왜,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가슴이 크지?'
반대로 여자처럼 치마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가슴이 납작했다.
어라, 뭔가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