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28장 - 공주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2)
지금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는 와중에도, 이걸 어떻게 해야잘 도망칠까?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뭔가 정신에 강력한 공격을 받은 것 같아.
- 가...능?
- 내 안의 뭔가가 무너진 느낌이야...
- 왜 이쁜데 ㅅㅂ
- 아니 어...
- 남자는 예쁘고 여자는 잘생겼어
- 이게 뭐지???
- 뭐야 가슴 돌려줘요 아래왜 튀어나와있는거야!!!
- 으악
['정신나갈것같애'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아 정신나갈것같애 정신나갈것같애 정신나갈것같애 정신나갈것같애 정신나갈것같애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아니, 아 도망쳐야 하는데.... 뭔가 머리가 녹아버려서 말을 못 하겠네"
"가능, 가능...."
멘탈이 나가서 멍한 상태인 나와 콘소메님, 그리고 계속 가능을 외치고 있는 포카.
이런 우리를 보고 한숨을 쉬며 길을 이끄는 승아.
이미 망한 것 같았다.
여성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남성들인데다가, 전체적인 외모가 여성에 가까웠다.
다른 점이라면 골반이 엄청나게 크거나 하지는 않다는 점인데....
그렇다고 해도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상태나 매끈한 털까지 생각하면 남자로 보기는 어려운 인간들이었다.
특히 길고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는 누가 봐도 천상 여자였다.
심지어 다들 간단한 화장까지 한 거로보여서 더 머리가 어지러워질 것 같았다.
반대로 남성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여성들이었는데, 가슴이 크다는 것과 골반이 크다는 걸 제외하면 외모가 남성에 가까웠다.
그냥 여유증에 골반 넓은 남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특히 수염까지 기른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마초남 스타일인 기사도 존재했다.
"시발,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은데."
"어, 음...."
이런 이세계를 남녀역전 세계라고 부르던가?
아닌 거 같은데?
보통 외모까지 역전시키지 않잖아?
아, 시발 심지어 목소리도 역전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기 가슴은 크지만 남자 목소리로 수염 기르고 도끼 휘두르시는 분이 여성분이시라는 거지?
뒤에서 마법 쓰면서 누구보다 반짝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다소곳하게 날아오고 있는 저분은 치마를 한 손으로 누르고 있지만, 남성분이라는 거고?
오우쉣.
"승아야, 언니는 틀렸어. 뒷일을 부탁해."
"재미없으니까 그만해."
"재밌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나도 딱히 오토코노코같은 밈이나 남장여자 같은 밈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는데.
세계 전체가 저따위로 변해 있는 걸 보니까 정신에 데미지가 너무 들어왔다.
"따돌렸나?"
"정신이 하나도 없네."
"승아야 고마워, 너 없었으면 우리는 바로 잡혔을 거야."
사실 원래 이 세계는 우리랑 마찬가지로 평범한 곳인데, 우리한테 정신공격을 시도하기 위해서 저렇게 차려입고 나온 게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게 그렇게 충격받을 일이야? 다른 세계잖아."
"그렇게 말하니까할 말은 없는데...."
약간 수증기님 방송 처음 보면서, 이게 남자...? 하면서 의문을 가졌던것보다 강렬한 충격이었단 말이야.
다른 것보다 치마에 살짝 튀어나온 부분 때문에 내부가 상상되는 게 무섭다.
아, 반대쪽의 가슴도 내부가 말랑말랑할 게 상상되는 것이 무섭다.
시발.
- 아 드디어 안보이네
- ㅅㅂ미친건가
- #남녀역전
- 안본눈삽니다
- 아니 시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게 이세계지ㅋㅋㅋㅋ
- 이런 건 남녀역전이 아니야
여러분, 아쉽게도 이번에 만나볼 남녀역전은 절망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것이, 우리는 여기서 나가려면 여기를 클리어해야 합니다.
그 이전에 수증기님부터 찾아야 하지만.
'잠시만, 수증기님?'
수증기님이 왜 이런 세계에서 잠적하셨을까.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이기는 해도, 전화까지 잊어먹고 공략할만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난이도도 혼자 하기는 어려워 보이고.
[권장 등급: EX
클리어 조건: 바포로 왕국을 멸망시키기]
무려 여기 있는 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조건이다.
사실상 전쟁을 하거나 내부에 스파이처럼 잠입해서 무너트리라는 소리가 되는데....
당장 옷 입은 것만으로도 쫓기는 신세인데 어떻게 스파이처럼 잠입을 하지?
[익명으로 미션이 도착했습니다.]
[미션: 간절한 부탁(1)
조건: 본인이 만족할 정도로 바포로 왕국의 구성원들을 구원하면서 게이트를 클리어할 것.
보상: ???]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정말 오랜만에 나오는 일만시간의법칙 시스템의 미션창.
심플월드 탑 플레이 이후로는 처음으로 나오는 녀석이었다.
그나저나 왕국을 멸망시켜야 하는 엔딩을, 왕국의 구원과 함께 진행해서 달성해야 한다는 소리지?
'썅, 오늘따라 개소리가 판치네.'
남자가 여자고, 여자가 남자인 세상에 왔더니.
갑자기 그 세계를 멸망시켜야 클리어가 된다고 하고.
누구는 멸망시키지 않고 클리어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시스템을 속여서 멸망한 것으로 인식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미션을 걸었을 거라고 믿으면서.
['소연율'님이 100시간을 후원합니다.]
- 믿숩니다!! 교주님!!충성!충성!
'어, 음....'
기대해주는 것은 고마운데, 저런 응원을 들어놓고 실패하면 굉장히 미안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최대한 성공하도록 노력해봐야겠지.
특히 저분한테는 이제까지 꾸준히 후원을 받았기도 하고.
"일단 너무 충격적인 장면을 봐서 놓치고 있는데, 저희는 수증기님을 찾으러 온 거잖아요."
"그랬었지."
"근데수증기님을 찾는 데 크나큰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뭔데?"
일반적으로 수증기님하면 떠오르는 분위기는 뭘까.
남자지만 여성스러운 그 외모와 목소리.
정확히는 남자처럼 행동하려고 목소리도 중성에 가깝게 내지만, 급하면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그 갭.
그게 수증기님의 특징인데....
"여기는 수증기님 같은 사람이 너무 많아요!"
"아, 시발...."
누구보다 특별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여기서는 너무 매우 흔한 설정이었다.
심지어 여기 사람들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게 응응응에 가깝게 들려서 더 수증기님 같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일단 둘 중 하나를 골라야겠네."
"네?"
"그나마 남자인 콘소메님은 가슴이 작다는 걸로 괜찮지만, 우리는 남장을 할지 아니면 가슴을 압박 붕대라도 써서 보이지 않게 할지 골라야 해거든. 옷은 몰래 좀 훔쳐 오면 되고."
최대한 이 세계에 적응해서 활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시작부터 이렇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아서 쫓겨 다니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나, 나 남장해볼래!"
"포카는 어울릴 것 같긴 하네...."
그리고 승아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가볍게 옷만 갈아입어도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나다.
생각보다 가슴이 걸리적거리니까 남장으로 가는 쪽이 좋긴 하겠는데....
"시청자 여러분들이 허락해주시면 전 괜찮아요."
"내가 화장하면 그럴듯하게 될 것 같은데?"
포카가 미소년인지 미녀의 남장인지 헷갈릴 정도로 해줄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왠지 너 엄청나게 신난 것 같다...?
"그리고 필요한 건 말이 통하는 거네요. 아니, 이제까지 어지간하면 말은 다 통하던데, 여기서 갑자기 말이 안 통하는 건...."
"번역기 켜보셨어요?"
"아, 그거 리트라이에도 켤 수 있는 거였어요?"
"응, 몰랐어?"
- 바보....
- 아ㅋㅋㅋㅋㅋ
- 근데 어차피 그거 켜도 우리는 못 알아먹음
- 답은 체험모드다ㄹㅇㅋㅋ
- 큐브온에 자막 어떻게 다냐고ㅋㅋㅋ
- 진짜 응응응 소리밖에 안들리는데
- 응응....
큐브 접속자끼리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직통으로 생각을 교환하는 번역기능이 존재했다.
이게 NPC 대상으로도 먹히는 건가?
그럼 언어 문제는 일단락되는 것 같은데....
"난 그래서 뭐라고 하는지 다 들었지."
"난 응응응 밖에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한 거야?"
"뭐, 공주전하의 명이라면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전부 잡아야 한다고 외치던데."
"공주...?"
윽, 머리가.
왜 공주라는 말을 듣자마자 수증기님이 떠오르는 거지?
내 악질 회로야 멈춰!
"헉, 사실 그 공주가 수증기님인 거지!"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공주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 드립을 참을 수 있다고?
그걸 참을 수 있다면 당신은 참 착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 ㄹㅇㅋㅋ
- 아ㅋㅋㅋㅋ 바로 그거였네
- 아! 여기가 증기나라였네
- ㄴㅇㄱ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
- 고건 몰랏네
- 헉
- 방장이 악질임ㄹㅇ
꼬우면 옆에서 태클 걸고 멈출 수 있게 나오던가.
잠적한 사람이 잘못이지.
아무튼 우리는 가정집을 습격해서 옷을 좀 훔쳐 온 뒤에 대충 갈아입고 나서야 왕국을 구경할 수 있었다.
"별생각 없이 들어와서 돈 될만한 게 없는데....마력석이 여기서도 가치가 있으려나?"
"마법이 있는 세계관이니까 돈이 될 것 같긴 한데."
옷이야 급하니까 훔쳐서 입었지만, 온화하게 왕국의 상황을 살피려면 자연스레 돈이 필요할 거란 예상이 나왔기에 마력석이라도 팔아볼 생각이었다.
다만 여기는 제대로 된 돈이 오고 가는 세상이니까 마력석 말고 돈만 받을 확률이 높은데....
'갑자기 물건 건네주면서 거스름돈은 알아서 내놓으라는 건 너무 수상하잖아.'
그래서 가능하면 마력석을 판매하기 괜찮은 장소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아무래도 이런 걸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상인이 있을 것 같은데.
"아, 글을 하나도 못 읽으니까 미치겠네."
"말은 통하는데 말이지...."
번역기는 오로지 말로 전하는 것에만 적용되기 때문에간판을 읽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냥 길 가던 사람 하나 붙잡고 물어봐야 하나?
별거 아닌 일인데도 왠지 우리가 이상한 것이 티가 날까 봐 걱정이었다.
"저, 잠시만요. 혹시 마력석을 팔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될지 알 수 있을까요?"
"아, 마탑 찾으시는구나. 이쪽에서는 가려져서 잘 안 보이실 텐데, 쭉 가셔서 돌아가시면 마탑이 보이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내가 그런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콘소메님이 나서서 물어봐 줬다.
이게 안 쫄리나 보네.
왜 저렇게 강심장인 거야?
"어차피 걸려도 우리가 이기는 거 아니었어요?"
"아, 듣고 보니 그건 그러네요."
그냥 조금 귀찮아질 뿐이지 우리가 걸린다고 죽거나 할 가능성은 작았다.
애초에 아까도 거의 붙잡힌 수준이었는데 어렵지 않게 돌파하고 빠져나갔으니까.
그래서 그냥 실패하더라도 도망치면 된다는 마음으로 지르셨구나?
"그나저나, 마탑이 원래라면 잘 보이는 것처럼 말했는데...."
여기라서 마탑이 잘 보이지 않는다.
즉, 다른 방향에서라면 마탑이 잘 보일만 한 디자인이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엄청난 고층 건물일 거다.
"아, 저거겠죠?"
"...그런 것 같네요."
평범한 건물들 사이에서 비정상적으로 솟아 있는 원기둥 모양의 건물.
심지어 그 높이가 어지간한 고층빌딩 급이라서 눈에 확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까 거기서는 꽤 고층인 건물이 많아서 가려진 덕에 보이지 않는 거였구나.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혹시 마력석 좀 팔 수 있을까 해서요."
"아, 혹시 보증서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등급 검사 수수료를 내셔야 해서요."
"구매금에서 까주실 수 있나요?"
"음, 그렇게 해드릴게요."
혹시 마력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서 넉넉하게 들고 다니는 A급 마력석 몇 개를 건넸다.
그녀는 마력석이 좀 특이하게 생겼다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묘한 기계를 통해 마력석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잠시만요. 이거 다 비슷한 품질이에요?"
"어, 아마요?"
"...최상급이 이렇게 많이? 잠시만요. 최상급 판정은 제가 자격증이 없어서...."
여기 자격증까지 있는 세계관이었어?
마법 관련된 쪽은 생각보다 문물 수준이 높은 건가?
"하아, 귀찮게. 대충 서류에 내 이름만 박으면 되잖아."
"맨날 그러니까 학회장님한테 불려가시는 거 아니에요?"
"킁, 그래도 네 눈이면 틀림없겠지."
"최종 판별은 교수님이 하세요. 자꾸 조교한테 맡기지 마시고!"
- 앗
- 조교였구나..
- PTSD오네
- 귀찮아하는 교수와 짬처리당하는 조교
- 도망쳐!!!!
- 마법도 대학원생ㄷㄷㄷㄷ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여기도 다를 게 없네
교수는 가만히 내가 건네준 마력석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최상급이라고 말하고는 사인을 하고 들어가 버렸다.
조교는 그런 교수에게 몰래 욕을 내뱉더니, 뒤돌면서 우리에게 웃으면서 판매 처리를 도와줬다.
"개당 일괄 구매가격이 시세에 90%로 쳐서 3300논 되겠습니다. 4개 주셨으니까 13200논이네요. 1000논짜리 13개랑 100논짜리 2개로 드리면 될까요?"
"네, 그렇게 주세요."
조교는 뭔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루에 동전 15개를 담아서 건네줬다.
아까 최상급 마력석이 되게 귀한 것처럼 이야기가나왔으니까, 이거라면 한동안 지내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금액일 것 같았다.
"음, 포카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맞혀봐."
"나랑 비슷한 생각 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랑 포카는 마탑을 나오자마자 같은 생각을 하면서 멈춰 섰다.
처음 와보는 장소.
그리고 풍족한 자금.
이럴 때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