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28장 - 공주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5)
아무리 달려도 사라지지 않는 혈향이 코끝을 찌른다.
콰과광!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으며, 백성들의 비명이 귀를 어지럽혔다.
우리는 패배한 것이다.
"폐하, 지금이라도 다른 차원으로 대피하셔야 하옵니다!"
"내가 혼자 도망쳐서 뭘 한다는 거야."
"하오나...."
"마력석이 얼마나 남았다고 했었지?"
"들키지 않기 위해 보안 기능까지 동작시키면 1회가...."
"시우나 스우를 태워."
아바마마에 입에서 내 이름이 언급된 걸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누님이나 나를 태우겠다고?
"폐하!"
"아바마마, 아니 되옵니다. 아바마마가 타셔야 다음 일을 도모할 수가...."
"도모? 나 혼자 살아서 뭘 어떻게? 차원 이동은 시우나 스우가 탄다. 그렇게라도 이 왕국의 핏줄을 유지한다. 그게 내 결정이야."
"아바마마!"
내가 아무리 외쳐도 아바마마의 생각은 바뀔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누님을 바라보았지만, 누님은 나에게서 눈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스우를 태우는 걸로 하죠. 저는 왕자이기 이전에 계승권을 가진 세자입니다. 아바마마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누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도 여기 남겠습니다!"
"스우야. 미안하다. 너한테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구나."
"누님?"
"류아, 부탁할게."
"예, 세자저하."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려고 해도, 류아는 나를 들쳐업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힘으로 그녀를 이길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내 발버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왕국을 대표하는 그랜드마스터였고, 나는 공주라는 직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머저리였으니까.
"류아, 이거 나줘. 나는 가지 않을 거야. 갈 생각 없어!"
"공주님. 죄송합니다. 세자저하의 명이십니다."
"류아...!"
많은 백성이 죽었다.
게이트, 아니 정확히는 그 게이트가 방치되어 생긴 침식이라 불리는 것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왕국은 멸망에 가까워졌고, 도망칠 곳은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은 다른 차원 말고는 없었다.
애초에 차원을 이동하는 마법은 최근에야 시험기가 나온 수준이었고, 제대로 된 선발대조차 보내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이 방법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나만...."
"공주님, 원래라면 오늘부로 바포로 왕국은 사라지는 겁니다. 하지만 공주님이 저희를 기억하고 살아남아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왕국은 영원할 것입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그냥 나를 살리고 싶을 뿐이잖아!"
"그래서요! 그게 뭐가 나쁩니까?"
"...어?"
류아는 울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나를 안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검을 휘둘러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얼굴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외쳤다.
"폐하도! 세자저하도! 저도! 공주님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류아...."
"저는 태어나서 죽음밖에 모르는 멍청이였습니다. 오로지 사람을 베는 것에만 온 삶을 던져왔습니다. 그런 저에게 류아라는 이름을 주시고, 일상을 주시고, 행복을 주신 건 공주님이셨잖습니까!"
"어?"
"오늘은 마지막이니까 말하겠습니다. 저는 폐하의 기사가 아닙니다. 세자저하의 기사도 아닙니다. 저는 오롯이 공주님의 기사입니다. 그러니 제 검은 오로지 공주님을 지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왜 모르는 겁니까, 남들은 다 아는 사실을!"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걸까.
나도 화나.
이런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 화가 난다고.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조금이라도 이기적으로 변해보란 말입니다. 이 멍청이가!"
"나는 충분히 이기적이야! 맨날 옷 가리고 밥투정도 하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바보야!"
쾅!
류아의 발길질로 인해 굉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안에 있단 마법사들은 준비가 모두 되어있다는 듯이 나를 이상한 기계에 넣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들켰나 봅니다. 엄청나게 몰려오네요. 다들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주님을 부디."
"...목숨을 바쳐서 성공시키겠습니다."
"잠시만, 이안. 여기서 꺼내줘. 제발, 부탁이야."
"공주님 죄송합니다. 움직이시면 위험하니까 결박을 하겠습니다."
"뭐하는 거야! 놔! 놓으라고!"
"죄송합니다. 저희는 절대로 공주님이 이렇게 돌아가시도록 둘 수 없습니다."
왜 다들 나한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나라가 불타고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이제는 차원 자체가 멸망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나를 감싸고 살리려는 거야.
아바마마처럼 군대를 움직이며 전략적인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누님처럼 직접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 최전방에서 싸운 것도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머저리란 말이야.
"공주님은 저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뭐?"
"저희가 뭐라고 하나하나 이름을 기억해주시고, 생일을 챙겨주시고, 심지어 가끔은 저희 아들놈 생일까지 챙겨주셨죠? 누구 하나 잘못되면 그 무서워하시는 폐하께 달려가서 화내면서 따져주시고. 아마 이 궁전의 누구라도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겁니다."
"나, 나는 그런 걸 원한 게...."
"뭔가를 원해서 하시는 게 아니었던 건 잘 압니다. 그래서 당신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애하는 공주님, 이게 저희의 마음입니다."
"싫어, 하지 마. 나는 여기에 모두랑 남아서 싸울 거야. 제발!"
주변의 마력이 요동치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바로 앞에서는 류아가 끔찍하게 생긴 괴물과 싸우면서 내가 있는 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팔이 으스러지고, 이제는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망가졌다.
그런데도 마지막 남은 팔로 검을 휘두르며 나를 지키려고 했다.
"류아?"
"공주님! 크헉...!"
"히익!"
류아의 몸에서 튄 피가 그녀와 나를 갈라놓던 유리 벽에 튀어서 흘러내린다.
아까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유리 벽을 부수려는 듯이 팔을 들어 올렸다.
"흡...!"
바닥을 굴러다니던 류아의 검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서 괴물을 베어냈다.
조금 전에 류아가 직접 상대할 때는 제대로 검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죽기 직전에야, 벽을 넘는 건, 신선, 한, 감각이네요."
"류아...?"
"죄송합니다. 공주님.... 혼자 있으, 시는 걸, 굉장히, 싫어하시.... 는데...."
"류아...!"
"공주님, 살아남으세요."
급한 마음에 결박을 풀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앗!
나를 지탱하고 있던 균형 감각이 증발한다.
내가 서있는 건지 누워있는 건지 모를 어지러운 감각이 계속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강렬한 두통이 찾아왔다.
"윽!? 우웩!"
어지러운 감각과 함께 찾아온 구토감에 빈속을 게워냈다.
위액만 토해낸 뒤에 정신이 들어서 주변을 살폈지만,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내가, 정말로 차원을 이동했다고?
"사, 사람?"
"■■ ■■■ ■■? ■■■ ■■■■ ■■ ■■ ■■■."
"어라, 이상하다? 왜 통역 마법이...."
혹시 통역 마법 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건가 싶어서 확인했지만, 제대로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차원을 넘어오면서 고장이라도 난 건가?
"죄송해요. 저는 바포로 왕국의 공주인 스우라고 합니다."
"■, ■■■■. ■■ ■■ ■■■■ ■■■ ■■■■ ■■."
"■■■. ■■■ ■■"
"저, 저기요?"
나를 처음 발견했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대화를 나눈 후에 그냥 지나가 버렸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통역 마법이 없으면 큰일인데. 일단 몸짓이라도 하면서 말을 익혀야 하나?"
그나저나, 나는 왜 진지하게 앞으로 살날을 고민하는 거람.
이제 왕국은 멸망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이미 살아갈 의미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닐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구나."
애초에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저 공주라는 직함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약해빠진 놈이니까.
"■■, ■■■■■■ ■■ ■■ ■■■? ■ ■■■ ■■■■."
"......."
한참을 바닥에 누워서 멍을 때리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아마도 내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대라고 생각했겠지.
"내버려 둬. 난 여기서이렇게 죽을 거야."
"■■, ■■■■ ■■■? ■■■■ ■■■? ■■ ■■ ■■■."
"꺼지라고."
"■■, ■■■■ ■■...."
그나저나 이 사람 옷차림은 굉장히 여자처럼 하고 다니는데, 가슴은 되게 작네.
생각해보면 아까 지나가다가봤던 사람들도 조금 이상했지.
왜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가슴이 컸을까?
"이상한 세상이네."
"■, ■■ ■■?"
"그렇게 말해도 몰라."
그러자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더니 주변을 마구 가리키고는 고개를 으쓱거렸다.
지낼 곳은 있냐는 건가?
대충 그런 비슷한 뜻인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나를 가리켰다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무슨 뜻이지? 자기가 지내는 곳에 오겠냐는 건가?
나는 어차피 혼자 죽을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 ■■■ ■■■. ■■■■ ■■■ ■■."
"꺼져. 이대로 굶어 뒤지거나 할 거니까."
슬슬 어지러운 감각이 찾아오고 있는 걸 보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이대로 죽어버릴 거다.
혼자서 살아갈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뭐야, 뭐 하는 짓이야!?"
"■■■ ■■. ■■■ ■■■■ ■■■?"
그녀인지 그인지 모를 사람이 나를 들쳐업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세상 사람들도 나한테는 오지랖을 부리는 건가?
진짜 어이가 없....
"...아"
"■■■?"
마치 류아에게 안겨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분명히 낯선 사람일 텐데, 나를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제약이 가지 않도록 안아 드는 실용성까지.
굉장히 류아를 닮아있었다.
'공주님, 살아남으세요.'
그 바보는 끝까지 내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면서 목숨을 바쳤는데.
나는 끝까지 죽겠다면서 단식 투쟁이나 하고 있었다.
나도 참 유치한 놈이라니까.
"■■."
"이게 뭔데?"
시범이라도 보이듯 먹어 치우는 걸 보고서야 저게 음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난생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하긴 다른 차원으로 날아왔는데 음식이 같은 것이 더 이상한가?
은근히 빵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세모낳고, 검은 게.... 내부는 또 하얀가? 뭐야 이게...."
물론 내가 그런 걸 따질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뭐라도 먹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일단 입에 욱여넣었다.
검은 무언가에서 짭짤한 맛이 느껴지고, 안에 있던 하얀 것들은 부서지면서 입에 퍼져서 꽤 재밌는 식감을 만들어냈다.
'안쪽에 있는 건 고기인가? 양념도 되어있는 것 같고.'
고로케랑 비슷한 음식인 것 같았다.
물론 느껴지는 식감이랑 맛은 달랐지만, 내가 아는 음식 중에서는 비슷한 것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맛있다는 정도인가?
'먹자, 그리고 류아가 원했던 대로 살아남자.'
바보처럼 떼를 쓰는 건 여기까지만 해야겠지.
다들 나를 위해서 희생하면서까지 여기로 보내줬는데.
그런 소중한 목숨을 내가 짜증 난다고 던져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
"이게 뭔데? 침대인가? 들어가?"
뭔가 관처럼 생긴 기계에 들어가라고 하다니.
집에 있는 걸 보면 정말로 관은 아니겠지만, 뭔가 이상한 물건이었다.
"어, 어라?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옷을 왜 벗기는데.
아, 여기에 들어갈 때는 옷을 벗어야 하는 건가?
내가 대충 눈치껏 신호를 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알몸을 보일 뻔했네.'
물론 좀 여성스럽게 입은 남성일 수도 있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지.
내가 옷을 모두 벗고 기계에 눕자, 내부에는 뭔가 찐득거리는 액체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것 때문에 옷을 벗는구나?
"어?"
그 감각이 짜증 난다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방금까지 느끼던 감각이 그대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cubetime0406'님 큐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최초 접속자이므로 스캐닝 작업을 시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관을 읽고 확인해주십시오.]
"뭐야? 약관? 확인을 누르라고?"
나는 별생각 없이 확인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신체 데이터를 수집 중입니다.]
[완료했습니다.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어.... 나네?"
갑자기 거울이 나타나더니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까 눌렀던 확인 버튼과 비슷한 버튼을 눌렀더니 거울이 사라졌다.
"야, 들려?"
"어? 어라?"
"음, 역시 풀다이브용 번역기는 먹히나 보네."
"너, 뭐야? 어떻게 왕국어를...."
"왕국어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의미를 전달하는 거야. 풀다이브끼리만 할 수 있는 거지만."
"그게 무슨...."
"이 기계로만 할 수 있는 통역 마법 같은 거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그래서, 넌 대체 뭐야?"
이름을 말해달라는 건가?
아니면 어디 출신인지를 말해달라는 건가?
"...스우"
"이름만 말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바포로 왕국의 공주. 마법으로 차원을 넘어서 날아왔어."
"진짜 심상치 않은 내용이네. 언어가 다른 걸 보면 거짓말 같지도 않고."
"...너야말로 뭐야? 대체 왜 나를 데려와서 밥을 먹이고 이렇게 이야기도 나누는 거야?"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아, 소개가 늦었네. 나는 강주현이라고 해. 너도 한국식 이름이 하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뭐?"
"여기서 쓰기는 스우보다는.... 그래, 승우는 어때?"
자기 멋대로 상황을 진행하는 좀 이상한 사람.
그게 내가 느낀 강주현이라는 사람의 첫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