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28장 - 공주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6)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처음에는 분명 다들 리트라이를 하길래 방송 컨텐츠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애초에 왜 리트라이에 우리 왕국이 존재하는 것일까.
왜 리트라이에 존재하는 게이트는 우리 왕국을 습격한 것과 닮아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스우 공주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바마마가"
"아직도 뭔가 고민 중이신 건가요?"
"류아,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걸까."
류아는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하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메시지는 오직 플레이어인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니까.
[권장 등급: EX
클리어 조건: 바포로 왕국을 멸망시키기]
내가 이 게이트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내 손으로 이 왕국을 멸망시켜야 했으니까.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을 자신의 손으로 부숴야만 한다니.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조건 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조건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 가자. 누님은?"
"세자저하는 현재 훈련 중이신지라...."
"그럼 너는? 원래 선생 역할 하고 있었잖아."
"남은 건 제가 가르쳐드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별다른 것 없는 일상.
바포로 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아니 게이트가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일상.
너무나 그리웠던 것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방송도 해야 하는데.'
방송을 켜면 리트라이를나가야 하잖아.
그게 싫다고 방송을 켜고 리트라이를 한다면, 결국 나는 저기 적힌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공주 대접 받는 걸 보여주는 건 싫어.
얼마나 놀릴지 예상이 간다.
"아바마마...."
"스우야. 네가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는데.... 이렇게 돌아와서 다행이야. 한 번만 안아봐도 괜찮을까?"
"...그럼요"
남자의 몸으로 왕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그걸 해내고, 역사를 뒤져봐도 없을 정도의 선왕이라고 민심을 확보한 우리 가족의 자랑.
아바마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우 녀석은 네가 사라진 뒤에 자신이 약한 게 원인이라면서 틀어박혀서 검만 휘두르고 있다. 전해놨으니까 금방 너를 만나러 올 거다."
"환대,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이 돌아왔는데, 환대해주지 않으면?"
"그런 농담하지 마세요. 무서우니까."
"농담 아닌데?"
꼭 내 이야기만 나오면 진심으로 저런 소리를 해서 무섭다.
평소에 자신에 대한 욕이 나오는 건 신경도 쓰지 않으시면서, 왜 나한테만 저리 민감하담.
"다음부터는 말없이 사라지지 마라. 내가 더 잘할 테니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래, 너는 착한 아이니까. 그랬겠지."
아바마마도, 류아도.
이렇게 진짜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데.
이게 정말 게임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 걸까.
내 기억 속의 그들과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
바뀐 것은 오히려 다른 세계로 가서 긴 시간을 보낸 나밖에 없는데.
"그나저나 잠깐 사이에 많이 자랐구나. 성장기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런가요"
실제로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아바마마.
이제는 제가 입고 있는 공주용 의복이, 바포로 왕국의 고유 의복이 아니라 웨딩드레스로 먼저 보이고 말아요.
우리나라라는 말에서 바포로 왕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먼저 떠올려질 만큼.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나는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속마음을 그저 목 뒤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나는 그저 잠깐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일 뿐이니까.
한 번 왕국이, 아니 차원이 멸망을 맞이하였던 것도.
그 와중에 나를 구하겠다고 차원 이동 마법을 통해서 다른 차원으로 보냈던 것도.
이제는 모두 없었던 일인 것처럼 깨끗했다.
'그건 둘째치더라도....'
아무래도 게이트라는 특성 때문인지 지역도 좀 협소했다.
절대로 나갈 수 없는 섬 같은 공간에 우리 왕국만 고립된 느낌.
본래라면 다른 나라들과 교류도 했을 터였던 왕국이 온전히 자립하는 나라로 변해있었다.
"네가 사라지고 나서 정말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더구나. 평소에 네 행동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어."
"제가 뭘요?"
"네가 주변 이들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단 소리다. 착하게 잘 자랐구나."
"......."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내가 마지막에 살아남을 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건 알지만, 그 이유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 옆에서 일해주는 사람의 이름을 외워두는 건 당연한 매너고, 자꾸 까먹다 보니까 메모하기 시작한 덕에 생일도 다 챙겨주게 되긴 했는데.
그게 그렇게 큰 건가?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 내가 대단하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네....
"맞습니다. 공주님은 인망이 좋은 분이시죠."
"류아...."
특히 저 인간이 제일 이해가 안 간다.
온몸이 바스러져 가면서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오로지 나를 지키는 기사라면서 화를 내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류아."
"네?"
일정을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가는 길.
아니 정확히는 류아와 내가 둘만 남은 타이밍에 그녀에게 물어봤다.
"류아는 왜 기사가 된 거야?"
"갑자기? 공주님답지 않은 질문이네요."
"중요한 거야."
"...공주님처럼 되고 싶었거든요."
"나? 아니, 나는 엄청 연약한데?"
"아뇨. 누구보다 강하세요. 공주님이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할지도 몰라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람.
당장 류아한테 기습을 한다고 쳐도 1초 만에 제압당할 자신은 있는데.
심지어 지금은 내가 마법을 쓸 줄도 알아서 예전보다 발전한 게 이 정도였다.
"되게 예상하기 쉬운 표정을 하고 계시네요. 하긴, 그게 공주님이죠."
"뭐, 뭐가!? 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데?"
"기껏해야 저한테 검 휘둘러도 금방 제압당하겠다는 생각이나 하셨죠."
그걸 어떻게 알았대.
너 혹시 신기라도 있어?
그래서 내가 류아랑 게임하면 항상 졌던 건가?
"공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고, 이끌어주는 힘이 있어요. 뭐, 너무 마음이 여리셔서 왕위에 오르시는 건 어렵겠지만...."
"나는 못 해."
우유부단한 내 성격으로 아바마마처럼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한 건 확실하게 밀고 나가는 누님이 차기 왕위에 훨씬 어울리지.
아바마마도 그걸 알기 때문에 누님을 세자로 책봉하셨던 거고.
"아무튼, 저랑 처음 만나셨을 때 기억하세요?"
"류아랑 처음 만났을 때라...."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애초에 류아는 거의 내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지 않았나?
그때는 아마 류아가 기사가 되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저는 암살자로 키워지고 있었어요. 조용히 처리할 사람들을 정리하는 목적으로 양산되고 있었겠죠."
"...그랬었나?"
"네. 그때는 그런 게 당연했거든요. 아직 지금의 폐하가 정권을 완벽히 잡기 이전이었고요."
"아...."
"그러다가 제가 그나마 어린 편이니까, 공주님을 지키는 일을 맡았죠. 너무 나이 많은 사람이 공주님을 지키면 공주님이 불편해할 테니까요."
"어, 그래서 항상 내 곁에 있었구나?"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류아가 곁에 있었다는 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왜 나는 이런 사실을 기억 못 하고 있었지?
"근데 저는 항상 연기하면서 주변에 녹아들어 있다가 죽이는 것만 훈련받았지,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처음 해보는 일이라 엄청나게 실수를 많이 했어요."
"류아도 그런 시절이...."
"지금이야 누굴 죽이는 것보다는 지키는 게 더 익숙하지만, 그때는 그랬어요."
"그랬구나...."
코드 287.
방금 류아가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맞나?
저게 무슨 뜻이야?
"류아, 그게 무슨 뜻이야?"
"제 식별번호요. 287번, 그게 제 원래 이름이에요."
"어, 어?"
"그런데 그 당시에 그걸 들은 공주님이 이상하다면서 류아라는 이름을 주셨죠."
그랬었나!?
나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그렇게 중요한 걸 잊어먹고 있었던 거야?
"기억 못 하시는 건 알고 있어요. 저는 그래도 좀 나이가 있었지만, 공주님은 아주 어릴 때니까요."
"그, 그래도. 류아랑 나한테 있어서 엄청 소중한 기억이잖아. 잠시만, 기억할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괜찮아요. 괜찮아."
류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꼬옥 안아줬다.
아니, 그렇지만 그렇게 류아가 소중해하는 기억을 기억해주지 못하는 건 미안하잖아.
"그렇게 저한테 이름도 주시고, 나중엔 아바마마를 무서워하시던 공주님이 화내면서 암살자를 폐지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멋있었는지.남자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죠."
"성별이 무슨 상관이야."
"그런 부분에서는 폐하를 많이 닮으셨네요."
내가 아바마마를 닮지, 그럼 누굴 닮아?
아무튼 그렇게 내 요청이 정식으로 받아들여져서 암살자를 키우는 시스템은 폐지되고, 기존에 암살자로서 뒤에서 살아오던 이들은 방향을 틀어 기사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아바마마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후일담까지.
"지어낸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이야기가 훈훈해?"
"공주님이 얽힌 이야기 중에 이렇지 않은 건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잖아.
나는 결국 이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버러지였는데.
심지어 이번에도 왕국은 같은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야만 이 게이트가 클리어되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렇게 하려고 할 거다.
아직 나 말고는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것도 잠시겠지.
'대놓고 서울에 있었던 게이트야.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내가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이, 급하게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스우야!"
"누님...."
분명 아까 훈련에 푹 빠져있는 상황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아까 아바마마가 내가 돌아왔다는 걸 전했다고 하셨는데, 설마 그걸 듣고?
"정말 다행이다. 진짜 나는 네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죄송해요."
"으이고 귀여운 것."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는 누님을 노려봤다.
요즘엔 긴 머리를 만지지 않아서 정리가 서투른데, 이거 다시 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아, 미안. 머리 망가지지?"
"누님이니까 봐 드릴게요."
"그치만 우리 귀여운 동생이 살아 돌아왔는데, 쓰다듬어 주는 걸 참을 수가 있어야지."
"누님 변태."
"...그, 그런 심한 말을!?"
"그럼 변태처럼 굴지 마시던가요."
"으, 스우가 변했어."
오히려 마지막에 그렇게 멋있게 인사했던 누님이, 그렇게 애처럼 굴면서 저를 챙겨주면 기분이 이상하거든요?
제 감동 돌려주세요.
"검은 많이 느셨어요?"
"별로 진척이 없네. 가장 좋은 선생님한테 배워놓고 면목이 없지."
"그냥 막히셨을 뿐일 겁니다. 세자저하도 충분히 재능이 좋으시고, 노력도 많이 하시니까, 금방 더 높이 올라가시겠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굉장히 평온한 일상.
분명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빛나는 일상이 이곳에는 남아 있었다.
"아바마마는?"
"아까 인사드렸어요."
"그래, 어디 몸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말해! 다쳤으면 큰일이니까."
"없어요. 없어."
"우리 동생, 돌아와서 진짜 다행이다. 나는 진짜 무서웠어."
"죄송해요."
"돌아왔으면 된 거지."
누님은 내 머리를 다시 망가트린 뒤에야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나는 이제 들어가서 쉴게. 류아도 좀 쉬어."
"한동안은 교대로 공주님 곁을 지키라는 폐하의 어명이 있어서요. 문 앞에서 조용히 지키겠습니다."
"...너무 과보호인데. 그래, 고마워."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커튼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냥 계속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 걸까.
그냥 영원히, 이 왕국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