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29장 - 이 왕국은 공주가 납치당하는 전개에 약하다(3)
정직한 검로가 아닌 것을 넘어서, 비상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앞에서 찌르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이미 뒤쪽에서 검이 날아오고 있고.
가슴 쪽을 찔러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공격이 다리에 닿고 있다.
"미친...!"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 계열의 직업을 상대하는 느낌이다.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반격하려고 했는데, 상대는 이미 거리를 벌려서 타이밍을 놓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쪽이 두 명이라는 것과 굳이 쓰러트릴 필요 없이 시간만 끌면 된다는 거였다.
"비켜!"
"여기서 순순히 비켜줄 거면 여기까지 그 난리를 치면서 들어왔겠냐고!"
- ㄹㅇㅋㅋ
- 근데 ㄹㅇ 잠입 개잘하더라
- 아ㅋㅋㅋㅋ
- 위치추적이 폭탄 테러까지.... 이게 판타지가 맞아?
- 존나 무섭네
- 어지간한 대회보다 볼거리가 많은 방송ㅋㅋ
- 이러니까 E스포츠가 망하지ㅅㅂ
- 와 시발 방금 뭐임?
"칫."
"어우, 뒈지는 줄 알았네. 승아야 땡큐."
"언니, 조심해."
나도 피지컬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밀릴 줄이야.
그녀는 처음에는 우리를 평범한 검술로 처리할 생각이었다가, 그걸로 부족하니까 최선을 다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런 힘숨찐 메타에는 대응하기 딱 좋은 방법이 있지.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거.'
[여신의 계략 (성유물)
마력을 모두 소모하면 하루에 한 번만 계략 스택을 하나 추가한다.
계략 스택을 하나 사용하면 마력을 최대치까지 회복할 수 있다.
계략 스택을 사용하면 일정 시간 동안 마법의 효과가 100% 증가한다.]
여신의 계략에 쌓아뒀던 계략 스택을 소모해서 마법의 수준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A급 마력 심장을 깨트려서 마력의 성능을 바꿔버리면...!
"기술이 밀리면 화력이지."
애초에 내가 S급 각성자인 것은 성유물인 여신의 계략이 전투력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워낙 스택이 아까워서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탓에 자주 꺼내진 않지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
어느 쪽에 있는지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숨어다니다가, 중요한 타이밍을 잡아서 완벽하게 치고 빠지는 기습 형태의 공격.
하지만 그 숨을 장소 모두에 직격타를 날려버리면 피할 수가 없다.
쾅!
나는 마력으로 그녀의 목을 쥐고는 궁 안쪽으로 내팽개쳤다.
-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 이게 천마지
- 천마 데스빔이네
- 리미터 해제!
- 진자 오늘 방송 볼맛 나네!
- 아니 죽이지도 않았는데 왜 데스빔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암튼 데스빔이라고ㅋㅋㅋㅋ
"이게 S급...."
"오히려 그렇게 감탄하니까 없어 보이잖아."
그 기사가 쓰러지자, 우리에게 덤비는 병사들은 없었다.
정확히는 다른 기사들이 우리에게 달려들려는 병사들을 말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방금 그 기사가 질 정도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겠지.
"너무 걱정하지들 마시죠. 공주님은 어디 하나 다치지 않게 잘 데리고 있을 테니까요."
"얀별아!"
"어, 갈게!"
기계가 아니라 오로지 마법으로 구현한 포탈이라 그런지 굉장히 불안정해 보였다.
나는 혹시 누가 추가로 추격하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포카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수증기님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치워줬다.
"이게 갑자기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다들 무사히 도착했네. 오랜만이다?"
"소메? 소메도 왔던 거야?"
수증기님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납치해왔으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겠지.
근데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수증기님 잘 들으세요. 일단 수증기님이 지금 이 게이트에서 공주님 역할이죠? 이건 확실한가요?"
"...네"
"오케이, 그리고 지금 공략의 조건은 바포로 왕국의 멸망입니다. 틀렸나요?"
"맞아요. 혹시 정말로 왕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어요. 그러려고 지금 이 귀찮은 짓을 하는 건데."
물론 이런다고 해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다만 지금은 가장 가능성이 있는 부분을 파고들면서 해결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가장 좋은 건 멸망의 조건을 확실하게 알아내는 건데....
"하지만, 그럼 게이트는 어떻게 깨요?"
"멸망시키긴 할 건데, 멸망이라는 용어 자체는 애매하지만, 실제로는 분명한 조건이 있을 거잖아요."
"조건...."
"그 조건을 알아내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게이트를 닫는 게 저희의 공략 목표입니다."
솔직히 여기를 유저들로 물량을 몰아쳐서 클리어하는 것도 낭비에 속하는 일이었다.
최대한 우리 쪽 전력도 낭비하지 않고, 왕국에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서 클리어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그 멸망의 과정에서 딜을 치기에 적당한 건 아무래도 공주님이라서요."
"나, 나 공주 아니.... 맞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공주가 맞지...
- ㄹㅇㅋㅋ
- 수증기 방송켜!!!
- 아무리 생각해도 옷이 너무 이쁘당
- 헤으응 공주님
- 방송 켜주세요 현기증 나요
- ㄹㅇㅋㅋ
물론 아직 멸망에 조건에 대한 힌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애초에 그걸 우리가 알고 있었으면 이런 범용적인 계획을 짜지는 않았겠지.
그나마 이 계획에 기대하고 있었던 점이라면 하나가 있긴 했다.
"수증기님, 한동안 계속 왕국에 계셨잖아요. 맞죠?"
"그렇죠."
"왕국에서 엄청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있어요? 물건도 괜찮고 무슨 프로젝트 같은 것도 괜찮고."
마치 최근 며칠 동안 그런 걸 발견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 듯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이 왕국의 공주인 이상, 사실상 잘 알고 있는 내부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되어버린다.
수증기님은 걸리는 점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차원 이동 마법이라는 걸 개발 중일 거예요. 엄청 예산도 많이 붓고 진행도 그럭저럭 잘 되고 있었는데...."
"뭔가 있었어요?"
"문제가 있다면서 최근에 중지했다고 하던데요. 정확한 사유까지는 모르겠어요."
차원 이동 마법이라.
아마도 왕국이 멸망할 때 수증기님을 지구로 보내준 마법이겠지.
이 게이트 내에서는 연구가 중지된 상태인가?
"확실히 파볼 만한 문제네요. 혹시 수증기님 그 연구실 위치 아세요?"
"음, 거기가 어디였더라.... 센트로에 있는 건 확실하거든요?"
수증기님은 우리가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그 장소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웨딩드레스 대신 평범한 남성복, 그러니까 이 왕국 기준으로는 여성복이었다.
웨딩드레스를 계속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지금은 수증기님을 들키면 전부 망하는 거니까.
"근데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네요. 다들 걱정할 텐데."
"어쩔 수 없죠. 그래야 이 왕국을 구할 수 있다면서요."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과몰입 발언이겠지만.
나에게는 그가 정말로 이 왕국을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니까 왕국 사람들도 수증기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건가?
☆ ☆ ☆ ☆ ☆ ☆ ☆
"신의 탓입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이야기는 전부 들었어. 류아의 탓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공주님이 납치되었는데,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저는...."
"그만."
류아는 자신을 자책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왕국의 최고 자산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류아가 1대1에서 밀렸다고 했다.
심지어 상대는 3명이었고, 류아가 싸운 대상이 대장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까지.
'대장으로 보이는 마왕이라는 년은 허공에서 포탈을 만들어낼 정도의 실력자.'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자기 자신만 이동하는 마법까지는 대마법사 측에 드는 이들이 보여준 적이 있긴 했지만.
혼자서 포탈을 만들어낸다고?
"포탈의 도착지는 찾았나?"
"역산에 실패했습니다. 저희가 쓰는 포탈과 다른 것도 다른 건데, 암호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긴 공주를 납치하면서 그런 초보적인 문제점도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왕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얼마 전에 스우가 사라진 것만 해도 대형 사건이었는데, 이번에는 납치라니.
심지어 납치 사실이 전국에 뿌려져서 모르는 백성이 없을 정도였다.
그랜드마스터인 류아가 지키던 공주를 납치한 마왕의 존재에 많은 이들이 떨고 있었다.
물론 수도인 센트로에서의 분위기는 다른 곳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이라도 당장 공주님을 찾겠다면서 난리입니다. 저러다가 그 마왕 녀석들한테 당했다간...."
"결국우리가 추후 행동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지 스우보다 중요할 리가 없다.
왕은 가만히 눈을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바마마!"
"시우야."
"그 망할 새끼들 어디 있어요? 제가 가서 스우 구해오겠습니다. 허락...."
"시우야."
"......."
시우는 자신의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비릿한 비의 감촉이 느껴지지만, 그것보다는 당장 자신의 동생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안했다.
저번처럼 본인이 나간 것도 아니고 납치라니.
대체 그 착한 아이를 납치해서 무얼 하겠다는 말인가.
"이해는 한다만. 너도 센트로의 모두도 진정해야 해. 결국 그 마왕이라는 년은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있다고 했으니, 그것만 넘겨주면 스우가 무사할지도 모르지."
"그걸 어떻게 믿고...!"
"쳐들어가서 그 괴물 같은 놈들을 이길 수는 있고?"
"......."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아무리 병력을 모은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스승인 류아조차 장난감처럼 던져버린 놈들과 싸울 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그런 무력을 가지고 왜 굳이 스우를 납치했는지가 의문이 될 정도였다.
그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력으로 빼앗았어도 되는 걸 텐데.
"그 마왕이라는 년이, 우리 스우를 더럽히거나 하진 않겠죠...?"
"처음부터 목적이 스우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가끔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곤 합니다.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마법이 있다고...."
그렇다면 혹시 스우를 그 마법으로 세뇌라도 시켜서, 스우를 왕으로 두는 것으로 나라를 삼킬 속셈은 아닐까.
시우는 그런 용도로 스우가 더럽혀진다는 상상을 하자 죽고 싶어졌다.
차라리 왕위를 넘기면 넘겼지.
스우가 그렇게 이용당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근거 없는 낭설이다. 차원 이동 마법도 꽤나 진척했던 우리도 고전했던 것이 정신과 관련된 마법이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머리에 피가 쏠렸나 보네요."
사실 왕국 쪽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해도 문제점은 많았다.
그들에게는스우라는 인질이 있으므로, 스우를 죽인다고 협박하면 제대로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
물론 그들도 어지간하면 자신들의 무기인 그를 상처입히진 않겠지만 구석까지 몰린다면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그리고 그건 왕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이었다.
공주인 스우를 포기한다니.
그것만큼은 왕국이 절대로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폐하! 마왕군 놈들로 의심되는 자들을 봤다는 제보가...."
"그렇다면 올도 기사단을...."
"제가 가겠습니다."
"류아 너는 아직 더 요양을 해야 할 텐데?"
"올도 기사단보다는 제가 나을 겁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류아가 패배한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왕국 최대의 전력이 류아인 것이 바뀐 것은 아니니까.
그나마 그들과 대치할 수 있는 것은 류아가 유일했다.
"그래서 어디라고?"
"차원 이동 마법 연구실입니다. 대체 어떻게 알고 거길 찾은 건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거기 폐쇄 안 했어? 폐쇄해서 나도 거긴 열지 못하는데?"
"그냥 다 부수고 지나가서 돌입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방금 알아차린 겁니다."
하필이면 차원 이동 마법 연구실이라니.
서둘러야 할 이유가 더 생겼다.
"류아."
"예 폐하."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문서 같은 게 있으면 선점해서 태워버려."
그 녀석들이 뭘 원하는 건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왕국 입장에서도 절대로 내줄 수 없는 정보가 있는 법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