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29장 - 이 왕국은 공주가 납치당하는 전개에 약하다(5)
우리는 건물이 완전히 불타기 전에 밖으로 빠져나왔다.
류아라고 했던가?
방금까지 우리와 싸웠던 기사가, 뭔가 못마땅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뛰어 들어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치만 어차피 내가 들어가면 류아는 안 막을 것 같았단 말이야."
실제로 그러긴 했지.
심지어 수증기님 덕분에 이 이상한 문서도 구해낼 수 있었고.
위험했다는 이유로 수증기님한테 뭐라고 계속 지적하기에는 수증기님이 해낸 일이 너무 많았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수증기님이 구해낸 문서는 당연하게도 왕국어로 적혀있었다.
문제는 우리들이 왕국어를 전혀 모른다는 거다.
그나마 이걸 읽을 줄 아는 것은 류아 정도인가?
물론 수증기님도 이 문서를 읽을 줄은 아실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증기님이 진짜로 공주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청자들은 수증기님이 그냥 처음으로 입장했기 때문에 스토리에 편입된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갑자기 수증기님이 글자를 읽으면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그렇기에 수증기님이 글자를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지간하면 지양해야 한다.
정 그것 말고는 답이 없으면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내서 우기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래도 지금은수증기님 말고도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었다.
"읽어."
"내가 왜?"
"공주님을 위해서."
"공주님...."
"류아, 부탁해."
그녀는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이런 상황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기는 해.
납치된 줄 알았던 공주님은 왠지 그 마왕 놈들이랑 같이 뭔가를 찾고 있고.
왕국에서는 그걸 막으려고 하고 있으니까.
"공주님. 명령입니까?"
"......."
"폐하의 명으로 왔기에, 공주님의 부탁으로는 들어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애초에 아바마마의 명이면 어쩔 수 없지. 괜찮아."
"아니요. 공주님이 명해주신다면, 저는 할 겁니다. 폐하의 명보다 공주님의 명이 저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 서윗해ㄷㄷㄷ
- 기사 ㄹㅇ 스윗하네
- ㅗㅜㅑ
- 개멋있는데
- 저게 어떻게 여자임?
- 오빠나 죽어(덜렁)
- 헉!
- 폐하보다 공주님이 중요하데ㄷㄷ
솔직히 공주님이 우선이긴 하지.
폐하가 어떤 분이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같아도 수증기님 고른다.
"난...."
수증기님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류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도와줘 류아. 명령은 아니야. 오랜 친구로써 부탁하는 거야."
"...공주님"
콘소메님이 없어서 조금 아쉽네.
그 인간이 여기 있었으면, 지금쯤 수증기님이 선 긋는다면서 오지게 조리돌림 했을텐데.
나라도 대신 해야 하나?
"부탁할게."
"후, 차원 이동 마법 연구실 최종기록부."
한숨을 내쉰 류아가 천천히 문서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걸 명령을 하지 않으면서 하게 만드네.
이게 수증기님의 능력?
"어제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차원 이동 마법 연구실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내부를 확인하니 본래 연구실에 준비되어 있던 장비가 전부 고장이 난데다, 마치 누군가에게 습격받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건 처음 연구실에 이상이 생겼을 때의 이야기로 보였다.
지금 우리가 연구실에 와서 느꼈던 거랑 똑같은 내용이네.
그럼 결국 이걸 왕국이 먼저 발견했었다는 거잖아?
"바뀐 연구실에서 발견한 자료에 따르면, 왕국은 게이트라고 불리는 적들에게 습격받아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게이트가 나오네."
- ㄷㄷㄷㄷㄷㄷㄷㄷㄷ
- 왕국도 게이트로 멸망했구만
- 게이트로 바뀌고 발견한건가 보네
- 오....
- 연구실만 그대로였구나
- ㄴㅇㄱ
- 여기서 게이트가 나와버리네
- 차원 이동 마법은 그럼 성공한 건가?
우리가 아까 찾아볼 때는 이 이상의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이 보고서를 뺀 나머지 데이터는 다 폐기했겠지.
수증기님이 아주 정확하게 골라온 것 같은데?
"그리고 단 한 명만을 차원 이동 마법을 통해서 살릴 수 있는 상황, 왕국 모두가 살기를 원했던 사람 하나가 차원 이동 마법에 타게 된다. 그 사람은...."
"아...."
수증기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깨달아 버린 탓이겠지.
류아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내용을 계속 읽어나갔다.
"왕국 최고의 보물인 스우 공주님이었다."
주현씨가 알려준 것을 토대로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같은 결과였다.
그나저나 저렇게 들으니까 뭔가 좀 그렇네.
수증기님은 벌써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 최고ㅋㅋ의ㅋㅋ보물ㅋㅋㅋㅋㅋ
- ㄷㄷㄷㄷㄷㄷㄷㄷ
- 와! 증기나라 수증공주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공주님! 공주님! 공주님!
- 미치겠네ㅋㅋㅋㅋ
- 와! 보물!
"스우 공주님이 살아있는 이상 절대로 왕국은 멸망하지 않으리라. 그것이 이 실험실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이들의 메시지였다."
잠시만, 수증기님이 살아있는 이상 왕국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
그럼 반대로 말하면 수증기님이 죽는 게 왕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거 아니야?
물론 그렇게 쉽게 생각할 건 아니지만,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내용이었다.
"이 세계는 거짓된 만들어진 세계이다.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고, 우리의 기억이 멋대로 조작될지 모르는 세계다. 그렇기에 이 문서를 남기기로 했다. 누군가는 이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니까."
"뭐야, 내용만 듣고 끝인 줄 알았는데 뒤에 더 있네...."
다만 아까 읽던 부분이랑 종이가 달랐다.
뭔가 급하게 추가로 붙여놓은 거라고 해야 하나?
덧붙여서 적어놓은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공주님은 다른 차원으로 떠났기 때문에 찾을 수 없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공주님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
이건 수증기님이 공략을 시작하던 시점에 적힌 내용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오래된 기록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이게 이번사건의 핵심이 되는 것도 맞겠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왕국 모두는 공주님을 찾기 위해 뛰어다녔고. 우리는 코멘코에서 진짜 공주님을 찾아낼 수 있었다."
"코멘코면, 우리도 코멘코에서 시작했지?"
"맞아."
수증기님도 처음 게이트에 들어왔을 때는 코멘코에서 깨어났구나.
게이트로 들어오게 되는 위치는 거기로 고정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수상한 사람을 잡으려는 병력이 코멘코에 많았던 거네.
"경사였다. 하지만 우리는 경악스러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멸망했던 실험실에 설명된 게이트와 같은 시스템이 코멘코에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공주님의 생존 여부에 따라 변화하게 되어 있었다."
이게 진짜로 수증기님 목숨이 제일 중요한 거였어?
진정한 의미로 이 왕국이 멸망하는 것은 모두가 지키려고 했던 공주님의 사망.
그리고 공주님에게 묶여있는 게이트와의 관계성.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결론을 끌어내고 있었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을까. 공주님을 죽인다면 게이트를 멈춰 왕국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공주님을 살린다면 이전의 세계처럼 게이트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 우리에게 선택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무조건 공주님을 희생해야만 한다."
공주님의 죽음이 있다면 이게이트는 클리어되어서 아무도 희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왕국의 그 누구도 공주님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왕국은 다른 결단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공주님을 희생하지 않고, 끝까지 게이트와 맞서 싸우기로했다. 그게 우리의 결정이었다. 따라서 이 자료는 폐기될 예정이다. 알려져서는 안 되는 진실이니까."
이 내용을 은폐한 뒤에 공주님을 지켜내기로.
왕국을 침략하는 이들과 온 힘을 다해서 싸우기로.
이 연구실을 조사했던 모두는 그렇게 합의하고 모든 진실을 바위 속으로 묻어버렸다.
"중간부터 이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존나 허무한 결말이었네."
"우린 진짜 뭐랑 싸우고 있었던 거지?"
수증기님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관련된 내용 대부분을 모르고 있던 류아야말로 내용을 읽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확실히 원주민 처지에서 보면 당연한 거긴 한데....
"결론적으로, 우리 공주님이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거네."
"공주님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게 할 것 같으냐!"
저기요 류아씨.
굳이 제가 공주님을 죽일 필요가 없어요.
지금 누구보다도 그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류아. 미안해."
"공주님! 안 돼요! 그냥 그럴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그걸 위해서 공주님이 희생한다니요!"
"수증기님, 조금 진정하세요. 천천히 설명할 수 있는 건 설명을 하고 진행을 합시다."
지금 여기서 수증기님이 바로 자살하면 우리랑 왕국 사이에 전쟁부터 난다.
이건 오해부터 다 푸는 게 먼저지.
☆ ☆ ☆ ☆ ☆ ☆ ☆
내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 아니 왕국의 공주복이 심하게 펄럭거렸다.
내 말을 듣기 위해서 빼곡하게 모여있는 센트로의 주민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들 뿐만이 아니라, 마법을 통해서 왕국의 전 백성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랑하는 바포로 왕국의 백성여러분들. 최근 저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참 많았습니다.걱정을 끼쳐드려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목이 바짝바짝 마른다.
내가 지금부터 이들에게 설명해야 할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미 바포로 왕국은 한 번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왕국은 저를 지키기 위해서 저를 차원 이동 마법을 통해 다른 세계로 보내줬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스우가 아니라 한승우가 되었고.
왕국의 이름에서 따온 수증기라는 닉네임으로 방송까지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올 수 있었다.
전부 왕국의 모두가 나에게 선물해준 것이다.
"바포로 왕국을 멸망시킨 게이트는 이제 다른 세상에 나타나서 침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포기하지 않고 남아있던 여러분들의 정신은 바포로 왕국을 되살려냈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면 바포로 왕국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열망.
그 열망이 우리 왕국을 EX급 게이트로 탄생하게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모두와 다시 만나서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가 살아있다면, 결국 이 되살아난 바포로 왕국은 다시 멸망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시스템이니까요."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
나를 되살리려고 진실을 숨겼던 이들도 많다고 했었지.
나는 정말 항상 과분한 사랑을 받아왔구나.
이 마음을 다 갚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구나.
그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그렇기에 저는 죽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직접 만나러 올 기회는 한동안 잃게 되겠지만, 이곳에서 제가 죽어도 정말로 죽지는 않아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겠다고 말하자마자 난리가 났다.
절대로 안 된다는 소리가 내 목소리를 순간적으로 묻어버릴 정도로 울려 퍼질 정도였다.
"이는 모두를 속이려는 생각이 아니라, 모두 진실입니다. 제가 여기서 죽으면, 왕국도 저도 모두 살 수 있습니다.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왕국이 멸망할 때도 눈물 하나 보이지 않으셨던 아바마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누님과 류아도 서로 손을 꽉 잡은 채로 떨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역시 이 사람들 아무도 믿질 않네.
어디까지 나를 착해빠진 바보로 만들 생각이야.
물론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정말로 죽는 거라고 해도, 나는 왕국을 구하기 위해서 자결했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착각 받아도 할 말이 없긴 하네.
"여기요."
나는 하얀별님이 건네준 사약을 받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원샷으로 들이켰다.
매캐한 감각이 목을 태우며 지나간다.
속에 불덩이를 넣은 것 같더니, 지금은 그 불덩이가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커흑.... 쿨럭!"
"공주님!"
"류아...."
"지,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세척.... 치료를!"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은 뒤에 류아를 껴안고 토닥여줬다.
아주 옛날에는 자주 이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온몸을 찢어발길 것처럼 고통을 준다.
혈관 하나하나를 불로 지지는 듯한 감각이 온몸에 생생했다.
"공주님!"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전신을 괴롭히던 끔찍한 고통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시나리오 퀘스트: 생존
당신은 처음으로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건강 상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건강 상태를 회복....]
우리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메시지가 나타난다.
시야가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공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큐브를 종료하고 나오니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찐득거리는 수액을 무시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금방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옹!"
"단팥아...."
평소에 수액이 묻어 있으면 가까이 올 생각도 하지 않던 단팥이가 수액을 무시하고 내 품속으로뛰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나에게 쓰다듬으며 애교를 부렸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먀옹?"
어라, 이상하네.
분명 전부 잘 끝났을 텐데.
이제는 평소 일상으로 돌아가면 끝인데.
"나, 나 왜 눈물이 나오지? 지금 굉장히 행복한데?"
나는 그렇게 한참을 단팥이를 껴안고 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는 인간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