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30장 - 여름의 미아(4)
"여름 어때? 정여름."
겨울은 어지간한 이름으로는 이것보다 괜찮은 것이 없을 거라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확실히 겨울이와 둘이서 방송을 한다면 딱 맞는 이름이긴 하겠네.
아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언니는 봄이고, 오빠는 가을이라는 밈이 있잖아. 딱 여름이 남더라고."
"예쁜 이름이네. 겨울이랑 여름이면 대칭도 잘 맞고."
"그치? 그럼 이제 우리 팀명만 정하면 되겠다."
"팀명?"
둘이서 함께 활동하면 그런 것도 정해야 하는 거였던가?
아연은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잘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도 같았다.
확실히 둘이서 하나의 방송을 진행하면 누구 한 명의 이름보다는 팀명이 낫겠지.
여름은 겨울의 의도를 파악하자마자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별로인가?"
"음, 다 이쁘긴 한데.... 뭔가 확 와닿지는 않네."
"방송이니까 그런 느낌이 중요하긴 하지."
두 명의 여자애들이 하는 방송이라.
생각해보면 우리가 방송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부터 골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연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
"그런 것 같아. 우리가 할 방송 컨셉부터 정해야 하네."
그녀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방송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서로의 생각이 튀어나왔다.
"언니, 나는 뭔가를 도전할 기회를 주고 싶어. 최대한 많은 꿈의 공모전을 여는 방송이 재밌을 것 같아."
"나는 뭔가 여러 가지에 새로 도전하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어. 그 도전을 위한 튜토리얼이 되는 방송을 하는 거지."
그녀들이 내놓은 답은 어딘가가 닮아있었고.
잠시 생각하던 둘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한참을 웃었다.
이렇게 되면 두 의견을 종합하여 하나로 만들어버리면 되는 거였다.
"튜토리얼.... 아, 아연 언니!나 좋은 팀명 떠올랐어!"
"어떤 건데?"
"게임에서 튜토리얼을 요정이 안내해주는 경우가 많았잖아? 그러니까 그걸 따서 페어리즈!"
"튜토리얼의 요정인 페어리즈야?"
"응!"
아연이 생각하기에도 꽤 그럴듯하게 들려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른 것보다 이름 자체가 친숙하고 어감이 귀여운 느낌이라서 잘 달라붙었다.
겨울은 자신들의 팀명이 정해지자마자 기분 좋게 웃었다.
"페어리즈, 페어리즈.... 귀엽네. 좋다."
"겨울아, 준비됐어? 슬슬 준비해줘!"
"응, 접속할게."
생각해보니까 오늘 하얀별 방송의 게스트로 나가기로 되어 있었지.
겨울은 일단 실험을 위해 준비한 값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큐브를 켰다.
"겨울님은 뭐 궁금하신 것 있어요?"
"궁금한 거라...."
방송의 내용은 게스트인 설화와 겨울의 타로를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겨울에게 타로를 볼 주제에 관한 질문이 들어왔고, 이때 살짝 장난기가 생긴 겨울이 묘한 말을 꺼냈다.
"전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까요?"
"네?"
"겨울아!"
깜짝 놀란 아연이 겨울을 불렀지만, 겨울은 그녀에게 혀를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 질문은 과거 아연이 얀별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타로 질문이었고.
질문을 듣자마자 얀별은 꽤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오케이, 그럼 하나씩 골라보시겠어요?"
그래도 얀별은 금방 정신을 차려서 방송을 진행했고.
겨울도 타로를 뽑을 때만큼은 진지하게 진행에 임했다.
"혹시 카드를 뽑을 때, 미래 계획에 대해 고민한 것이 있나요?"
"네. 있어요."
"그 계획이 기존의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도가 될 거예요. 그리고 이 시도가 행운이 된다. 성공할 거란 이야기네요."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더 불타오르게 되는데.
겨울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연의 손을 꽉 잡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겨울은 자신에게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후우, 안녕하세요."
바로 다음 날.
겨울은 설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얀별을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이게 실제 아연 언니의 몸이구나?
겨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얀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 별거 아니에요. 현실에서 보는 건 처음이니까 신기해서 그래요. 혹시 만질 수 있나?"
겨울은 별생각 없이 얀별의 손을 잡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
겨울은 실제 아연의 몸에서 느껴지는 사실적인 감각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수호령과 닿을 수 있고 체온을 나눈다고 하더라도, 큐브 내에서 만나는 것처럼 묘한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연은 그런 겨울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괘, 괜찮으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긴 하네요. 느낌이 이상하다."
"혹시 너 지한씨 노리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장난기가 동한 아연이 농담을 던졌고.
겨울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며 고개를 휘저었다.
"힉? 자, 잠깐만요.생각해보니까 하얀별님이 왜 제 머리를?"
"아, 죄송해요. 무심코...."
"더 즐겨도 괜찮은데?"
미친, 당연히 아연 언니가 쓰다듬어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겨울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쓰다듬을 받던 자신을 자책했다.
침대에 앉아서 그걸 구경하던 아연은 키득거리면서 겨울을 놀리기 시작했다.
겨울은 그것이 악의가 아니라 부러워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슬슬 열받는 말을 많이 받은 탓인지 복수 하나를 시도하려고 했다.
"...하얀별님"
"네?"
"잠시 껴안아 봐도 괜찮을까요?"
"...네?"
"겨울아?"
겨울은 이제까지 아연과 몸이 닿을 수는 있었지만, 체취는 맡아본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용품이기는 해도 얀별을 껴안아서 아연의 냄새를 맡아보고.
아연이 좋아하는 지한씨 품을 빼앗아서 살짝 부러움을 유발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 이렇게 보니까 뭔가 내가 당하는 것 같아서 이상한데!?"
"킁, 킁킁"
어딘가 포근해지는 보드라운 향기.
순간적으로 그 냄새에 중독된 것처럼 멍해져 있던 겨울은, 자신의 언니가 사진을 찍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자, 자매 덮밥?"
겨울은 순간적으로 수치심 때문에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 쪽팔려.
☆ ☆ ☆ ☆ ☆ ☆ ☆
"어때? 나는 솔직히 이 게임은 현실이랑 차이를 못 느끼겠던데."
"정말이네. 너무 똑같아서 신기할 정도야."
아연, 아니 여름은 자신의 몸이 신기하다는 듯이 만지작거렸다.
물론 수호령 상태일 때도 어느 정도 몸은 만져졌지만, 이렇게 살아있고 맥동하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라 신기했다.
물론, 이건 현실성을 극대화해주는 제한해제모드와 몸 자체가 너무 현실적인 리트라이가 조합된 결과물이었다.
"겨울이 덕분에 내가 호강을 하네. 다시는 이런 경험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저한테 잘하셔야 합니다?"
"그래야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는데! 내가 더 고맙거든?"
누가 더 고마운지로 싸우고 있는 황당한 상황이지만.
둘은 지금 누구보다도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제야 좀 몸 움직이는 게 익숙해졌네. 맨날 날아다니고 그러다가 이러니까 기분이 이상해."
"정 뭐하면 마력으로 날면 되잖아."
"그거랑은 느낌이 달라."
처음에는 리트라이의 기본이라는 각성을 위해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하고.
그 뒤로는 안전을 위해 심플월드를 위주로 검증된 지역만 다니면서 여행을 했다.
특히 심플월드는 벌써 적당한 시세가 돌아와서 현 거래까지 활성화된 상태라, 어느 정도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여름 언니 진짜 적응 속도 빠르네."
"그래? 요즘 지한씨, 아니 얀별님 체험모드 보고 나면 왠지 느낌이 오던데."
"그거 치트키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몸이라서 그런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감이 온단 말이야."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억울해."
물론 그렇게 말하는 겨울도 정립 마법의 실력 자체는 빠르게늘고 있었다.
다만 여름처럼 오러를 담는 실력은 부족했기 때문에, 항상 둘이서 연습을 하면 겨울이 패배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오러만 담기 시작하면 비슷할 것 같은데?"
"그런가...."
"응, 워낙 마법을 효율 높게 다루고 있잖아. 나는 그렇게까지는 아직 못해."
그래도 항상 이런 대화의 끝은 둘이 서로 달라서 오히려 좋다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둘이서 함께 방송하게 될 거고.
이렇게 서로 스타일이 달라야 방송이 재밌어지지 않겠냐는 결론.
"하긴 그렇지."
"맞다! 언니 이제 신서울이 안정화되었다는데, 거기 좀 구경하러 가볼까?"
"신서울?"
"응, 기존 살아있는 건물들을 재활용하긴 했어도 거의 새것 같은 도시래."
"그게 원래 인천이있던 자리지?"
여름의 질문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력석을 판매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심플월드의 루니가 아니라 마력석으로 대금을 치르는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이쪽에서 마력 등록하시고, 신청서 작성해주시면 되거든요?"
"아, 네."
처음으로 심플월드 게이트의 밖으로 나왔더니 처리해야 할 것들이 좀 많았다.
특히 신분증 대신 마력으로 자신의 신분을 검증한다는 것은 꽤 신기한 방법이었다.
"암호화도 적당하고. 꽤 잘 만들었네."
"어휴, 공돌이 기질."
"내가 이렇게 된 이유가 다 언니 때문이거든?"
"그래, 고마워."
이런 걸 바라고 그녀를 살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을 뿐이었는데.
여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큰일이다. 밖에 나가기 싫어."
"지금이야 게이트 밖이니까 나가기 힘들겠지만. 이따가 심플월드에 놔두고 나면 나가야지."
"싫은데.... 나가면 여름 언니가 쓰다듬어주는 감각이 약해진단 말이야. 약간 하위호환으로 즐겨야 해서 싫어."
"어리광쟁이네."
어리광쟁이가 되더라도 포기하기 싫은 것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어차피 장기접속모드라서 한 달은 나가지 않아도 문제가 없고.
"오, 방금까진 완전 허름했는데. 여기부터 갑자기 확 바뀌네."
"여기부터가 신서울이래."
방금 지은 것처럼 깨끗한 건물들이 끊임없이 들어차 있었다.
현실에 있는 인천보다도 화려하게 지어진 느낌인데, 이걸 아포칼립스 상태에서 해냈다고?
새삼 한국 게이머들이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광경이었다.
"저기 국밥집 열려있어! 언니 국밥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어?"
"그러게, 심플월드에서는 국밥집을 본 적이 없었네."
여름이 오랜만에 먹는 음식으로 식사를 하기도하고.
인터넷에 있는 신서울 건립 전 사진이랑 비교하며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신서울 내부를 대부분 구경한 뒤, 슬슬 심플월드로 돌아가려는 순간 일이 터졌다.
"여긴 또 어디래...."
"S급 게이트"
[권장 등급: S
클리어 조건: 전쟁을 종식시켜라]
여름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메시지창을 보면서 표정을 굳혔다.
분명 게이트랑은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을 텐데, 왜 우리가 안에 끌려들어 온 거지?
"언니, 날개...."
"겨울이 너도 생겼는데? 아마 이 안에서는 자동으로 생기나 봐."
이 게이트에서는 천사와 악마라는 종족이 서로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건인 전쟁의 종식이라는 건 둘을 화해시키든 아니면 한쪽을 전멸시키든하라는 소리겠지.
"이거 얀별님한테 연락을 해봐야.... 꺄악!"
"겨울아!"
침식에 휘말린 둘은 도착한 세상에 대해 미처 다 알아보기도 전에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결국 끌려가는 것을 막지 못하면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지ㅎ.... 얀별님. 제발 도와주세요."
"예?"
"겨울이, 겨울이를 구해주세요."
그리고 조금 전 여름은 게이트 안에 들어온 얀별을 발견했고.
그녀에게 겨울이를 구해달라는 말을 꺼냈다.